[어쩌다 예술로 산책] #6. 사이로 은은한 예술의 향기가 스민 동네, 성북동 (feat. 2021 미술주간 미술여행)

젊은 화랑들이 사이를 비집고 찾는 성북동에서 예술로 산책
글 입력 2021.10.17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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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예술로 산책》은 매달 격주로 기고되는 예술 에세이입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좋았던 일상 속 예술 조각 또는 흔적을 보고 느끼며 열렬히 사유한 것들을 지극히 사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합니다.

 

*감상 포인트: 계획된 산책로는 없습니다. 정해진 목적지도 없습니다. 뜬금없이 걷기 시작할 수도,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기도, 도중에 지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prologue

 
 

처마 끝.jpg

 

 

가을,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 왔다. 여름과 겨울 사이의 계절. 맑고 청명한 하늘, 햇빛은 적당히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 적당히 솔솔 부는 바람, 그에 따라 적당히 나부끼는 풀과 꽃들까지. 여러모로 '적당함'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이라 참 좋아한다. 온도, 바람, 습도 등 전체적으로 밸런스를 맞춰주는 느낌이랄까. 가을이 보여주는 풍경에서 묘한 편안함과 안정감에 젖어들곤 한다. 무엇보다 셔츠 안으로 따스히 스미는 햇빛의 온도가 바뀌었음이 느껴질 때만 괜히 더 자유롭고 싶어진달까.

 

무엇보다 올해 초부터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서 글을 쓰고 이전보다 더 다양한 문화예술에 관한 소식을 자주 접하면서부터 가을이라는 계절이 더욱 풍성하게 느껴졌다. 봄은 꽃이 만개하는 계절인 대신, 가을은 단풍을 물들이는 것 말고도 예술제, 비엔날레, 축제, 캠페인 등 다양한 문화예술을 꽃피우는 계절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이곳저곳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문화예술 축제의 향연을 앞에 두고 '다음은 어디가 좋을까' 그런 행복한 선택의 장애에 가로막혔다. 며칠째 다음 행선지를 고심하다 날아온 반가운 메시지 한 통. 아트인사이트의 인연으로 알게 된 박세나 에디터 님이었다.

 

'2021 미술주간 미술여행'을 아시나요?

 

예술경영지원센터와 한국자전거나라의 주도 아래 전국 6개 권역에서 미술 전문 가이드와 동행하며 즐기는 아트 도보 투어로, 다양한 공간에서 다채로운 전시를 즐길 수 있다. 처음 알게 된 프로그램이었고, 무엇보다 프로그램 설명에서 '우리가 걸었던 거리들을 예술로 만들어 주는 '미술주간' 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라는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단번에 초대에 응했다.

 

그렇게 10월 8일, 어쩌다 성북동으로 미술여행을 떠났다.

 

 

p.s.

 

비록 이번 '2021 미술주간 미술여행'은 도슨트와 함께하며 정해진 루트를 따라 걷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예술 조각'을 풀어내는 <어쩌다, 예술로 산책>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해당 미술 기행에 대한 이야기를 이곳에 풀어내는 이유는, 정해진 루트대로 따라가도 그곳에서 발견한 우연한 예술 조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무엇보다 정해진 미술여행을 끝내고 개인적으로 발견한 비밀스러운 장소와 예술 조각을 덧붙였으니, 끝까지 읽어보길 바란다.

 

덧붙여, 이번 2021 미술주간 미술여행을 추천해 준 박세나 에디터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Episode 6. 사이로 은은한 예술의 향기가 스민 동네,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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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북쪽에 위치해 있어 붙여진 이름, 성북동. 예로부터 이곳을 둘러싼 수려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선비들의 풍류와 문인들의 문예활동이 활발한 곳이었으며 화랑 청년들이 모이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성북동'은 '그저 먼 곳',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성북동 바로 아래에 위치한 혜화동은 익숙했다. 어쩌다 한 번씩 연극을 보러 갔던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성북동은 생소했다. 워낙 집에서 먼 곳이었기 때문에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이었고 특별히 갈 일도 없었다. 그러니 애초에 어떤 이미지도 그려지지 않았다. 마침, 성북동으로 미술 기행이라니 이참에 서울의 새로운 동네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었다.

 

- 산책 전 주절주절_2021.10.08

 

 

 

◈ 예술 조각 01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누구인가?

- 아트노이드 178 ≪초대받지 않은 손님≫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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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주간의 첫 번째 장소, 아트노이드178에 도착했다. '아트노이드'는 예술을 의미하는 '아트'와 인간의 외모를 지닌 것, '휴머노이드'를 결합한 단어로, 예술을 탐구하고 즐긴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주로 추상적인 개념예술을 탐구한다. 이름 뒤에 붙은 숫자는 178번지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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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김형주 작가의 개인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열리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작가님이 직접 도슨트를 진행해 주셨고, 덕분에 전시 및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 이외에도 동양화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비롯하여 작품 제작 비하인드스토리, 그밖에 궁금한 부분들 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동양화의 기본 재료는 장지, 분채, 석채이다. 장지란 화선지를 겹쳐 만든 종이를 말하며 캔버스 역할을 한다. 분채와 석채는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는 전통 안료이다. 작가님은 장지에 스미는 '깊이감'을 선호하여 장지 중에서도 가장 두껍게 겹쳐 만든 장지를 선택하였다. 가장 전통적인 방식은 장지 위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분채와 석채로 채색을 하는 것이 가장 전통적인 방식이지만 이 방법은 습도에 민감하여 작품이 쉽게 손상될 우려가 있다. 그렇기에 작가님은 가장 비슷한 느낌을 구현해낼 수 있는 아크릴 작업으로 대신 채색을 진행했다고 한다. 나름 작품의 비밀이라고.

 

덧붙여, 알아두면 좋을 알짜배기 지식 하나. 캔버스와 장지의 차이점은 안료가 표현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캔버스의 경우 안료가 얹어지면서 마치 위로 튀어나와 반사되는 느낌을 선사하고, 장지의 경우 안료가 그대로 안으로 스며들어 반사됨 없이 깔끔한 느낌을 선사한다는 것. 실제로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들으면서 '깊이 스미어 표현됨'이 어떤 느낌인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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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주 작가는 동양화를 전공하였고 주로 산을 소재로 작업하였다. 왜 하필 산이었냐고 묻는다면 특별한 계기가 있다. 어느 날 이름 없는 산이 자본에 의해 일주일 만에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이름 없는 산을 쫓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비슷한 맥락으로 '잡초'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는데, 왜 하필 '잡초'였는지는 아래 작품 비하인드 스토리에서 확인 가능하다.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고 직접 구성한 비하인드스토리입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잔디 마당에 신경질적으로 나있는 잡초들을 제초기로 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날이 떠올랐다. 이름 없는 산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날,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자비한 폭력성에 충격받았던 그날. 도대체 지금이 그날과 무엇이 다른가? 이제껏 제초기를 밀며 정갈한 잔디의 모습에 마음의 안정을 취했던 지난날들, 그리고 별반 다를 바 없는 폭력적인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자 떠오른 생각 하나.

불청객은 잡초가 아닌 내가 아니었을까?

 

그날 이후로 제초기로 잡초 밀기를 그만두었다.

그저 가만히 잔디 옆에서 여러 잡초들이 무성히 자라는 과정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 <유예>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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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시리즈의 그림들은 모두 비슷한 형태를 띤다. 잔디가 있고 사이마다 불균질한 잡초들이 듬성듬성 나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무언가 깎인 흔적이 보인다. 잔디보다도 더 낮고 정갈하게 직사각형의 형태로. 그러다 갑자기 뚝 끊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유예란 '망설여 일을 실행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작품 <유예>시리즈에서는 제초기로 잡초 깎기를 멈춘 순간을 보여준다. 대신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잡초들이 자라는 모습을 관찰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렇게 잡초에 대한 시선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한 차원 더 깊어진 작품을 하나 더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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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제거되어야 할 (블랙) 리스트였지만 현재 제목은 '리스트'이다. 해당 작품에서 잡초는 더 이상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닌 원래 땅의 주인임을 강조하고 이러한 사고의 전환을 표현하고자 했다. '블랙리스트'라는 단어에서 제거의 의미가 담긴 '블랙'을 생략하고 '리스트'만 남긴 것. 잡초는 없어져야 할 존재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도를 가장 잘 표현한 제목이라는 생각에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다.

 

전시의 제목이 직관적일 때도 있지만 은유적인 표현으로 여운을 남기는 것들이 있다. 해당 전시가 그러했다. 작품의 제목에서 말하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과연 잡초인가 나인가,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진짜 자연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 인공 자연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인공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을 의미하는데 모두 인간의 목적, 의지, 힘, 자본이 투입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잔디도 마찬가지이다. 잔디는 본디 인간의 조경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인공 자연이다. 즉, 진짜 자연은 보기에 때깔 좋은 정갈한 잔디가 아니라 그 옆에 신경 거슬리게 자라나는 불균질한 형태의 잡초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안고 갤러리 밖을 나서자 바로 눈앞에 돌바닥 구석 틈을 비집고 피어난 야생 들풀 하나가 보였다. 괜히 시선을 툭, 마치 두 시선이 우연찮게 맞닿은 듯했다. 이내 속으로 나지막이 내뱉었다. '저거다, 진짜 자연.'

 

참고로, 전시는 이번 달 26일 화요일까지이다.

 

 

 

◈ 예술 조각 02 구석구석 전통과 현대의 흔적

- 길거리 벽화 그리고 건물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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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문으로 향하는 횡단보도 앞. 저 멀리서도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이 훤하게 보였다. 세월의 때가 묻어 살짝 벗겨짐이 있었지만 나름 선명했다. 비가 내려서 그런가. 공기가 머금은 촉촉한 수분 덕분에 그림이 더 촉촉하게 보이는 걸지도.

 

그림의 배경은 성북동의 길거리로, 주로 성북동에서의 옛 문화예술의 요소들을 그려낸 듯했다. 요컨대, 혜화문 앞을 걸어 다니는 옛 의복 차림의 사람들, 옛날 영화 포스터 그림들, 중요무형문화재 92호로 지정된 강선영 태평무 전통문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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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전통의상을 입고 태평무를 추는 사람을 바라보기도 그냥 지나치기도 하는 편한 일상복 차림의 아이들의 그림이 눈에 띄었다. 무형문화재가 자연스럽게 일상에 스미었으면 하는 바람을 그림으로 표현한 걸까. 무엇이 되었든, 이렇게나마 누구나 지나다니며 볼 수 있는 길거리 벽에 성북동에서 나름 의미가 있는 문화예술을 새기고 기리는 의미가 담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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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곳곳에서 우리나라의 전통가옥 한옥이 남아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덕분에 성북동의 전경에서는 현대적인 건물과 전통적 건물을 한 시야에 담을 수 있는 기회도 있다. 이건 성북동의 유일무이한 매력이니 놓치지 말길 바란다.

 

 

 

◈ 예술 조각 03 준비를 전시합니다

- 17717 ≪준비전≫


 

두 번째로 향한 곳은 17717. 숫자로만 이루어진 이름이라니 신기했다. 역시나 앞서 들른 '아트노이드178' 처럼 이름 그대로 177-17번지에 위치한 곳이었다. 주소를 잊어버릴 일은 없겠다 싶었다.

 

이곳에서는 박연 작가님의 개인전 '준비전'이 열리고 있었다. 작가님은 작년에 계획하고 준비만 한 전시 2개가 있었지만 한 번은 코로나19로, 또 한 번은 살인적인 스케줄로 인해 무산되었다가 우연한 기회로 전시를 열게 된다. 이름은 준비전. 말 그대로 ‘준비하다 못한 전시’를 선보인다. 받아본 전시 도록에 적힌 문구가 꽤나 인상적이다.

 

준비를 전시합니다. 결과만 주목하는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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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자마자 입구 벽면에는 여러 종이들이 덕지덕지 붙어져 있었다. 일전에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린 도안, 스케치, 습작들이었다. 이번 ‘준비전’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를 살짝 맛보는 기분이랄까.

 

이어지는 전시에서는 이전에 준비만 하다 미처 보여주지 못한 핵심 작품들이 나온다. 첫 번째 작품은 <경계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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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에 위치한 데스쿨 De School은 경계 없는 어른들의 놀이터다. 데스쿨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 공지가 떠 지원을 했고, 초대를 받았다. 데스쿨의 자유로운 정신에서 영감을 받아 ‘경계’를 주제로 작업했다. (코로나19로 무산된 전시)

 

우측 하단은 장벽의 생성을, 좌측 상단은 장벽의 붕괴를 보여준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에 그려진 천상과 지옥 등장인물들을 통해 경계로 인해 우리가 잃는 것과 우리가 얻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경계는 곳곳에 존재한다. 무너져 온, 무너져야 할 경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이미 무너졌고 무너져가는 지리적 경계. 사회적 계급, 인종, 성 정체성 같은, 막 무너지기 시작한 경계. 국가라는 이름으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경계.

 

역사는 말하고 있다. 어떤 경계로든 우리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음을.

 

- 준비전전시 도록 中

 


경계,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를 말한다. 즉, 경계가 생기려면 어떤 특정한 기준이 필요하고, 이 기준은 사람의 힘에 의해 나뉘게 된다. 첨예하게 나뉠수록 선명하다가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 경계이다. 그래서인지 불완전한 경계의 모습이 그림에서 잘 드러나는 듯했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그려진 천상과 지옥 등장인물들을 재배치한 것도 신기했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힘으로 장벽을 쌓고 동시에 무너뜨리는 상황이 한 캔버스 안에 담기니 왜 경계라는 것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인지 그 이유가 보이기도 했다.

 

이어서, 두 번째 작품은 <구속과 해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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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직장 생활과 프리랜서 생활을 병행하던 중에 새로운 화두가 떠올랐다. 구속과 해방의 반복.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뿐또블루 PuntoBlu에서 전시 기회가 생겼을 때 그 화두를 잡고 싶었다. (살인적인 스케줄로 인해 무산)

 

기대, 구속, 해방, 그리고 또 다른 구속. 우리는 구속을 원하는 것일까 해방을 원하는 것일까. 벗어나고 싶은, 하지만 벗어나면 또 불편한 일상이라는 굴레를 표현했다.

 

인생은 구속과 해방의 연속이다. 이것은 운명이다. 방법은 오직 하나. 무의미한 삶의 축제를 즐겨가는 것뿐이다.

 

- 준비전전시 도록 中

 


그림을 보자마자 가장 중앙에 중심을 잡고 앉아있는 불상과 그를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들로 뻗어나가는 줄들이 눈에 띄었다.

 

왼편에는 얽혔다 풀리기를 반복하는 줄이, 오른편에는 곧게 뻗은 팽팽한 줄과 도중에 끊어진 줄이, 그리고 여러 손들이 그것들을 꽉 붙잡고 있다. 그림의 위쪽에는 새장에 갇혀있다 이제 막 자유롭게 날아오르기 시작한 새들도 있다. 이런 모든 움직임들이 그림의 주제인 구속과 해방을 동시에 말해주는 듯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작품 아래부터 중앙까지 곡선 형태로 흐르는 글귀들이었다. 인간이 태어나고서 20대까지 자라면서 주변으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을 나열한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 태어난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의 'Welcome'부터 시작하여 잠을 자고 먹고 배우고, 그러다 자아가 생성되면 주체가 'I'(나)로 바뀌어서 공부하고, 배우고, 마침내 졸업하기까지의 일련의 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졸업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사회로 나가자 돈, 사람, 타인의 시선, 생계 유지 등 여러 방식으로 얽혔다 풀리기를 반복하며 또 다시 구속된다는 것이다. 인간인지라,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굴레를 살고 있다고, 결국 인간은 이렇게 산다고, 캔버스 안에서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인상 깊었던 거대한 작품 하나. 놀랍게도 아직 미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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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는 성수동, 오른쪽에는 암스테르담의 길거리를 담아냈다. 작가님이 성수동과 암스테르담에서 각각 못다 한 전시를 선보이는 만큼 각 장소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이곳으로 옮겨온 그림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중앙에 사다리가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실시간으로 작가님이 작업을 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눈앞에서 새로운 선들이 생겨나는 것을 지켜보는데 신기한 경험이었다.

 

작가님은 작품에 대한 설명을 짧게 마치고 갑자기 작은 손전등을 하나씩 건넸다. 그리고선 소등. 사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암흑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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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파란 전등을 켜니 서서히 주황빛 노랑빛 선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니, 휘황찬란하게 선들이 살아나듯 빛났다고 말할 수 있겠다.

 

작가님의 설명으로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요소들의 의미가 점점 더 선명해지고 명확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모든 작품에서 대비와 대칭을 이루는 속성들을 마냥 흑과 백의 논리가 아닌 양면성을 다루는 듯해 인상 깊었다.

 

개인적으로 의도가 명확하고 상징적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을 선호하는데, 그런 작품들은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 조각 하나하나가 하나의 언어처럼 느껴진다. 요컨대, 생각지도 못했지만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언어의 세계가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어쩌면 예술과 언어가 주는 즐거운 경험이다.

 

 

 

◈ 예술 조각 04 오랜 시간을 품어낸 한옥 갤러리

- 오뉴월 이주헌


 

- 저어기 갤러리가 있어요.

- 어디요?

- 저어기요. 40년 된 짜장면 집 옆에 검은색 정사각형이요. 그게 건물 표지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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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쭈욱. 시선은 검은색 정사각형을 쫓고 있었다. 금방 1분은 넘겼다. 그러다 진짜 저어기 멀리 설명한대로 비슷한 것이 있는 듯 했다.

 

 후우,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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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미술 투어는 끝났지만 그래도 소개받은 이 비밀스러운 작은 갤러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도 있었고 무엇보다 지도로 봐도 이건 절대 다시 못 찾겠다 싶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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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가니 선명히 적힌 간판 이름이 보였다. O'NW 이주헌(오뉴월 이주헌).

 

 

오뉴월은 5월과 6월을 아울러 이르는 ‘오뉴월’은 여름 한창, 한여름을 뜻하는 말이다. 2011년 6월 성북동에서 시작한 스페이스 오뉴월 Space O’NewWall은 한여름의 뜨거운 열정으로 꾸며지는 새로운 전시 공간(New Wall)이다.

 

장르, 연령, 매체, 국가, 시대가 한데 들끓으며 생겨나는 젊은 에너지로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찾는 예술 실험실로서 스페이스 오뉴월은 ‘도시-이미지-문화’를 매개하는 에이전트(agent)가 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예술을 통해 공동체와 지역의 문화적 이슈에 개입하는 다양한 전시, 학술 행사 및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 참고: 스페이스 오뉴월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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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틈 사이로 사람, 축축이 젖은 땅바닥, 그리고 구석구석 오래된 나무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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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세월의 흐름이 진득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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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들어선 내부. "어떻게 이런 곳에 이런 작품들이?!" 처음 들어서자마자 보인 반응이었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고 들었는데, 한옥이라는 전통적인 공간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에 살짝 이질적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공간이 주는 묘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비까지 오니 더 운치 있었다.

  
본격적으로 전시를 관람하기 전에 잠깐 멈칫했다. "신발은 벗고 들어가야 하나요?" 참으로 한국인 다운 발상이었다. "아니요. 신발 신고 들어가셔도 돼요." 대답을 듣자마자 순간 나도 모르게 머쓱한 웃음을 퍼뜨렸다. 신발을 신고 한옥집을 드나들다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이 상황이 신기했다. 삐긋, 오른쪽 발을 아주 어색하게 마룻바닥 위에 내딛였다.

 

공간을 쭉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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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여긴 화장실. 거실. 사랑방 등등. 집안의 구조가 훤히 보였다. 이곳이 매력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한옥을 개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구조와 공간을 살려내어 순수하게 벽에 작품을 걸어둔 것. 나름 한옥 갤러리만이 가지는 특색 있는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전시는 이미 끝났지만 여전히 계속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 제목도 특이했다. <위장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정보화 세계에 떨어진 건에 대하여 About a person who thinks with stomach and intestines fell into the information world>. 아무 정보도 없이 작품을 감상하자니,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난감했다. 결국 집에 와서야 찾아보게 된 작품 의도.

 

 

김윤섭 작가의 <위장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정보화 세계에 떨어진 건에 대하여 About a person who thinks with stomach and intestines fell into the information world>는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라는 망가 애니메이션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제목이다.

 

디지털과 메타버스 등 가상 세계가 전면화하며 인간의 시각은 물질과 물체의 표면에 맺히는 것이 아니라 매끈한 모니터나 디지털 픽셀에 맺히게 되었다. 예술과 회화의 인지에도 이러한 환경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기존 언어로 예술 작품을 해석하는 차원을 넘어 작품을 하나의 정보 뭉치 혹은 개별 정보 단위로 분석함에 따라 어느 순간부턴가 데이터로서 존재 양태와 형식이 강요되고 있는 듯하다.

 

이번 전시는 문득 이세계(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현란한 변화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에 관한 물음이다. 위장의 외침과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하나의 정보 뭉치로 실존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내가 만들어 내는 작품들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데이터로서 탄생하기를 거부하는 작품은 어떠한 형식이 될 수 있을지 더욱 실험하고 부딪혀 볼 생각이다.

 

- 작가의 말 中

 

 

사실 사이트에서 작품에 대한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도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작가님의 설명을 들으며 감상했다면 더 가깝게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럼에도 전시보다도 공간에 압도된 느낌을 받았던지라, 오늘은 성북동에 이러한 매력적인 한옥 갤러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실만으로 만족스러웠다.

 

 

 

◈ 더 보기) 산책자의 시크릿 노트


 

어쩌다 예술로산책.jpg

 

 

1. '아트노이드178', '17717'처럼 성북동의 갤러리 이름에는 종종 숫자가 보인다. 이 숫자에 숨겨진 비밀은, 바로 장소의 이름이 곧 주소라는 점. 이름 하나로 주소까지, 공간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얻어 가는 셈이다. 자 이제, 성북동에서 숫자가 있는 건물 이름을 발견한다면, 가장 먼저 그곳의 주소를 의심해 보길 바란다. 나름 갤러리 이름의 비하인드스토리를 듣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2. ‘이런 곳에 이런 갤러리가?!’ 또는 '이런 곳에 이런 전시가 열린다고?!"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곳들이 구석구석 많다. 그만큼 길거리에 나와 있는 갤러리보다 골목마다 또는 집과 집 사이에 비집고 숨어든 작은 갤러리들이 많다. 또, 의외로 개성 강한 젊은 작가들의 개인전이 주로 열리는 듯했다. 어쩌면 아직 모르는 갤러리와 전시가 더 많다는 생각도 든다. 또 '오뉴월 이주헌'같은 숨은 갤러리가 있을지 어떻게 아는가? 이런 것이 진정 보물 찾기가 아닐까.

 

3. 성북동은 굽이진 길, 골목 사이, 경사진 곳 등 겉보기에는 보통의 평범한 동네의 모습이다. 그러나 틈틈이 비좁은 골목 사이로 현대적 건물과 전통적 한옥 건물을 한 시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성북동을 갈 일이 생긴다면, 꼭 한성대 입구역을 시작으로 혜화문을 오르고 아래로 내려오는 길에 성북동의 전경을 시야에 담을 수 있는 핫한 사진 스폿이 있다. 날씨 좋은 날 멋진 사진 찍어보길 추천한다.

 

4. "성북동, 저기 어디 서울 위쪽 아냐?"라고 말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곳곳에서 은은한 예술의 향기가 묻어있는 곳이었다. 뚜렷하지 않고 흩어져 있어서 흐릿하지만 그럼에도 개성 강한 젊은 화랑들이 꾸준히 찾아와 예술의 세계를 펼치는 이곳. 앞으로 나에게 성북동은 '그저 먼 곳'을 넘어서 구체적인 언어로 '사이를 비집고 예술이 은은하게 베인 동네'라고 말해두겠다.

 

산책 후 주절주절_ 2021.10.08

 

 

당신은 오늘 어떤 예술 조각을 마주했나요?

 

 

아트인사이트 신송희 컬쳐리스트.jpg

 

 

[신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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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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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연
    • 신송희 에디터님,
      안녕하세요. 공간 17717에서 준비전을 가진 작가 박연입니다. 꼼꼼하고 훌륭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전시를 재미있게 보셨다니, 뿌듯할 따름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설명글에 오탈자가 있어서 이렇게 댓글이라도 남겨드립니다. 현장스케치에는 (성북동이 아닌) 성수동이 그려져 있습니다. 번거러우시겠지만, 가능하다면 수정 요청드려도 될까요?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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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9 13: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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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연박연 작가님, 안녕하세요. 신송희 에디터입니다. 우선 부족함이 많았던 리뷰글을 꼼꼼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급해 주신대로 오탈자인, 현장스케치 설명 부분에서의 '성북동'을 '성수동'으로 수정하였습니다. 조금 더 꼼꼼히 살피고 표기했어야 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죄송합니다. 다음 번에 개인전 열리면 꼭 찾아뵙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작가님의 소중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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