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광인에 대하여 [도서/문학]

세상을 초극하는 광기
글 입력 2021.09.24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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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는 소설을 넘어 신화가 되었고, 책 속의 등장인물을 넘어 인류 보편의 수식어가 되었다. 수식어로의서 돈키호테는 그 의미가 굉장히 다양한데, 우리가 누군가를 돈키호테라고 부를 때 그는 낭만적인 이상주의자일 수도 있고, 앞뒤 가리지 않는 고집불통일 수도 있고, 무엇인가에 과할 정도로 몰입하는 괴짜나 오타쿠가 될 수도 있다. 돈키호테라는 인물은 이처럼 다면적이고, 그렇기에 독자들이 그를 이해하는 방식 또한 다양하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을 관통하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면, 그가 무언가에 미쳐 있는 ‘광인’이라는 점이다.

 

<돈키호테>가 근대 소설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이유는 돈키호테가 영웅이 아니라 광인이기 때문이다. 서사시의 영웅, 기사 소설의 기사와 달리 그의 이상은 현실에 부딪혀 이뤄지지 않는다. 그가 사랑하는 둘시네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며, 그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다른 편력 기사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모험을 떠난다. 우리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에게 ‘강력한 적들을 물리치고 아름다운 귀부인과 결혼하는’ 결말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어떻게 실패하는지 보기 위해 <돈키호테>를 읽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돈키호테 1.jpg

 


돈키호테가 실패하는 이유는 그의 신념에 구체적인 방향과 목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를 둘러싼 세계가 그를 대하는 방식에 있다.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박식하고 지혜로워도) 광인 취급을 받는 것은 그의 신념이 지배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광인은 그 신념의 형태와 상관없이 질서를 흔들 여지가 있고,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지배적인 가치의 역전이 일어나는 순간 그는 영웅이 된다. 권력의 입장에서 광인은 틀림없이 없애야 하는 위험 요소고, 권력은 오래전부터 광인을 효율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권력의 역사는 광인, 또는 잠재적 영웅에 대한 제재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광인에 대한 권력의 대응이 보통 개인적/사법적인 제재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을 고려할 때, <돈키호테>에서 주인공을 둘러싼 외부 세계가 그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특이하다. 작중에서 돈키호테는 자기 나름의 기사도만을 추구하는 탓에 근대적인 권력의 질서에서 자꾸 엇나가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돈키호테라는 인물이 지닌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으로서의) 권력은 그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22장에서 돈키호테가 죄를 짓고 끌려가는 죄인들을 풀어주는 장면만 보더라도 국가 권력이나 사회적 질서는 그의 관심 밖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전후 사정과 별개로 누군가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행동은 단순히 누군가가 묶여 있으면 풀어줘야 한다는 일차원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죄인들이 잘못에 대한 벌을 받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죄인들의 자유가 침해당한 것은 그들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거나 판관이 잘못된 판단을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권력이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 자체에 반기를 든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돈키호테가 여기저기서 심각한 민폐를 끼친 것은 물론 국가 체제에 저항하는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제재는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작품 내에 ‘성스러운 형제단’이라는 공권력이 엄연히 등장함에도, 그들은 작품의 전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가 힘없는 늙은이에 불과하기에 제재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종교와 민족 간의 충돌이 만연하던 당시 스페인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설명은 충분치 않다. 혼란의 시대, 권력이 촘촘한 감시망을 기반으로 체제에 저항하는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제재하는 모습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하지 않았는가.

 

대신 그들은 돈키호테를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환자로 취급함으로써 그를 사회의 질서에서 교묘하게 배제한다. 이는 돈키호테의 친구인 신부가 돈키호테를 연행하려는 관리를 설득하는 46장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돈키호테는 제정신이 아니고, 그를 데리고 간다고 하더라도 미쳤다는 이유로 곧 풀려날 것’이라고 말하자 관리들이 물러가는 장면은 그가 심신미약자로서 국가의 공식적 제재 대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권력은 구체적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그를 환자로 분류하며, 사회로부터 격리되었지만 격리되지 않은 상태로 만든다. 이 과정은 묘하게도 근대 이후의 권력이 개인을 통제하는 방식을 닮았다.

 

 

돈키호테 3.jpg

 

 

광인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교묘한 사회적 배제의 작동 원리는 돈키호테와 관련된 등장인물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작중에서 돈키호테와 마주치는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다.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회피하거나, 부딪히거나, 다른 목적을 가지고(혹은 단순히 유희를 위해) 적당히 그의 망상에 동조한다. 앞선 두 경우가 광인에 대한 물리적 차원의 소극적/적극적 격리 과정이라면, 세 번째 선택지는 앞서 언급한 교묘한 사회적 배제가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모습이다.

 

돈키호테의 친구들이 그를 고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돈키호테의 신념이 기사 소설에서 비롯됨을 눈치채고,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그의 망상에 동조하는 연기를 시작한다. 이는 돈키호테 같은 극단적 광인을 사회에서 가장 안전하게 배제하는 방법이자, 권력이 광인을 다루는 방식을 체화한 개인이 권력의 작동 범위를 확장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권력의 주체이자 객체가 되어, 권력의 ‘바깥’이 존재하지 않는 비극적인 세계를 이룬다.

 

작품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후반부의 객줏집 장면은 돈키호테와 얽힌 수많은 등장인물이 한데 모여 촌극을 벌이는 내용이자, 돈키호테라는 ‘환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혹자는 이 부분에서 수많은 등장인물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며 제자리를 찾는 것이 광인 돈키호테의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돈키호테는 철저하게 배제될 뿐이다.

 

그가 식사 자리에서 객줏집에 있는 모두에게 진지한 연설을 늘어놓을 때도 사람들은 그가 지적인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해할 뿐,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진 않는다. 사람들의 목적은 신부의 부탁대로 통제하기 어려운 돈키호테의 행동에 잠시 어울려주면서 그를 무사히 집에 돌려보내 ‘치료’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객줏집이라는 공간에 있는 모두가 이러한 목표 아래 돈키호테가 날뛰지 않도록 그를 속이는 모습은 지극히 연극적인 동시에, 근대 이후 권력의 중심이 된 병원이나 수용소가 치료라는 세련된 형태로 광인을 격리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돈키호테라는 인물의 비극성은 그가 어떤 것보다 우선시하는 가치인 ‘자유’가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억압되고 있다는 아이러니에서 생긴다.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는 포함되는 방식으로 완벽하게 배제된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배제되었는지도 모른 채, 미시적인 권력의 지배 아래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애매한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이것이 근대 이후의 권력 구조가 개인을 배제하는 방식이며, 우리가 <돈키호테>를 읽으며 묘한 찝찝함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깥이 없는 권력의 질서 아래에 있는 존재는 돈키호테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 5.jpg

 

 

미시적인 권력의 지배 아래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려 있지만 닫혀 있다. 다른 생각,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구성원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배제하는 방법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체화하고 있으며, 다름을 인정하는 척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 지배적 가치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배제당할 뿐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미시적 권력의 확대 재생산의 주체이자 객체로 전락한 지금, 권력의 철저한 억압에서 벗어날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넘어서기 위한 단서는 돈키호테와 같은 광인의 존재 그 자체다. 객줏집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면, 그를 둘러싼 연극적 질서가 잠시나마 흐트러지는 순간은 그가 주변인들이 동조할 수 없는 수준의 극단적 행위를 보일 때였다.

 

그는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는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 장벽에 온몸으로 부딪혀 균열을 내고, 자신을 억압하는 시스템의 존재를 가시화한다. 열려 있지만 닫힌 사회의 변화는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사람 좋게 웃으며 타인을 배척하는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차마 웃을 수 없을 정도의 극단적인 광기를 발산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세계의 질서에 미묘한 균열이 생기면 우리는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질서와 타협한 채 현실에 머물러 있지만, 세상을 초극하는 광인의 광기에 동조할 수 있는 인간들이 나설 차례다. 우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을 갖고 모험 내내 광인의 옆을 지키고 있지만, 가끔은 그보다 더욱 광기에 취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는 인물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토록 품위 있고 명예로운 기사를 소개하는 제 노고를 알아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종자인 그 유명한 산초 판사를 아시게 된 점에 대해서는 제게 감사하셨으면 합니다.
 

 

서문에서 세르반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이는 절망적일 정도로 체계적인 권력 구조에 대응할 인간상을 제시한 세르반테스 자신에 대한 찬사일지도 모르겠다. 돈키호테의 역할이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부당한 세계의 질서에 온몸으로 부딪혀 스러지는 것이라면, 비로소 눈에 보이게 된 장벽을 무너뜨릴 이들은 그의 무모함을 계승하는 산초들이 아닐까.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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