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이 본 영화에는 '여성'이 있었나요? [영화]

벡델 테스트, 벡델 영화, 벡델 데이···에 대해서 아시나요?
글 입력 2021.09.1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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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험 모두들 있을 거다. 영화를 보든, 연극을 보든, 또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든, 그 작품 안에서 여성에 대한 삐뚠 시각이 곁들여져 있어 다소 불편했던 경험 말이다. 필자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장 좋아했던 '인생 영화'를 며칠 전 다시 보다가 중간에 다 보지도 못하고 그냥 꺼버렸다. 영화가 여성차별적인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너무나도 뚜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개봉한 지 매우 오래된 고전 영화인 탓도 있겠지만, 어찌 됐건, 필자는 이 영화를 예전과 같은 감동으로 관람하지는 못했다.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린'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영화와 어찌 사랑에 빠지리.

 

필자는 몇 년 사이 이런 경험을 정말 많이 했다. 아마 내 안의 깨우침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시선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보인다. 그때는 불편하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불편하고 불쾌하다. 이러면서 불과 몇 년 사이 영화를 비롯한 여러 예술 분야 작품들을 향유하며 생긴 필자의 습관 같은 것이 있다. 바로 작품이 '불편하지 않은가' 판단하는 것이다. 영화와 연극을 관람할 땐 표면적으로 그 작품에서 담아낸 모든 장면들을 포함하여 인물의 대사나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는 방식에 시선이 간다. 이를 통해 작품의 의도를 파악하고, 한 발 더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작가나 연출자, 감독이 가졌을 여성관을 읽어내곤 한다. 노래를 들을 땐 노래의 가사가, 글을 읽을 땐 글에서 묘사하는 방식과 말하고자 하는 바가, 말하자면 예술 작품을 표현하는 총체적인 것들과 이를 통해 드러나는 의도에서 성차별적인 지점들은 없는지 살펴보게 된다.

 

그러다가 작품에서 눈엣가시 같은 지점들이 하나둘씩 발견되는 순간, 필자는 작품에 대한 몰입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잘 하나 보자' 하고 팔짱을 끼고 작품을 대하게 되는 거다. 아무리 명성과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그 작품이 담고 있는 위대함과 감동을 떠나서 필자 안에서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으로 기억되곤 한다.

 

사실 정말 피곤하다. 과거에 사랑했던 작품들을 하나둘씩 좋아하기를 포기하며 실망하는 것도, 하나의 필터링을 거쳐서 관람하는 태도도, 전부 다 이전보다 큰 피곤함을 주었다. 그러나 필자는 확신한다. 그 이전으론 결코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는 것을. 내 안의 큰 깨우침으로부터 뻗어나간 예민한 시선들은 이제 '나'라는 사람과는 떨어뜨려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되었다.

 

 


벡델 테스트(Bechdel 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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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민들 속에서 한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된 '벡델 테스트(Bechdel Test)'가 떠올랐다. 벡델 테스트는 영화의 성 평등 정도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일종의 테스트다. 이는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자신의 연재만화인 《주목할 만한 레즈들(Dykes to Watch Out For)》에서 제시하였다. 친구와 영화를 보며 남성 중심 영화들이 얼마나 많은지 계량화할 방법을 궁리하던 중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 3가지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영화 속에 이름을 가진 여성 인물이 두 명 이상 나올 것

2. 1번의 두 여성 캐릭터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것

3. 이들의 대화 내용은 남성 캐릭터에 관한 것만은 아닐 것

 

 

이 기준들에 준하는 영화를 '벡델 영화'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엘리슨 벡델이 고안한 벡델 테스트 3가지 기준 외에도, 국내에서 매년 한국영화감독조합(DGK)가 진행하는 '벡델 데이'를 통해 작년에는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4가지의 항목을 추가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4. 감독 · 제작자 · 시나리오 작가 · 촬영감독 중 1명 이상이 여성일 것

5. 여성 단독 주인공 영화이거나 남성 주인공과 여성 주인공의 역할 비중이 동등할 

6. 여성 캐릭터가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현되지 않을 것 

   (성별 고정관념에서 탈피된 여성 캐릭터일 것)

7.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 시선을 담지 않을 것


 

벡델 테스트 조항들을 읊으며 필자가 들었던 생각은 현실이 참 암담하다는 것이었다. 7가지 기준들은 명료하고 간단한 듯 보이면서도, 그에 해당되는 작품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다 보면 쉽게 작품이 떠오르지 않곤 한다. 그러나 반대로 위 문항들에서 '여성' 단어를 '남성'으로 바꾼다면 예상보다 많은 작품들이 떠오르곤 한다. 이러한 괴리감은 사실상 현재 영화 산업과 영화 작품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 멀었다는 지점들을 시사하고 있는 건 아닐까.

 



벡델데이 2021 : '벡델초이스 10'과 '벡델 심포지엄'


 

올해 성 평등 주간(9월 1일 ~ 9월 7일)을 맞아 한국영화감독조합(DGK)이 주최,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벡델데이 2021'에서 벡델 테스트 7가지를 전부 통과한 10개의 작품 '백델초이스 10'을 발표했다.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개봉작 가운데 선정되었으며 총 9명의 심사위원(김동령, 신아가, 조원희 감독, 배우 봉태규, 최정화 PGK 대표, 권김현영 여성학자, 함연선 평론가, 이보람 작가, 작년 '벡델리안' 선정자 영화 제작자 이동하 대표)이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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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델초이스 10' 작품에는 위와 같은 영화가 선정되었다. 영화 《69세》(감독 임선애),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감독 이태겸), 《남매의 여름밤》(감독 윤단비),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 《디바》(감독 조슬예), 《빛과 철》(감독 배종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모교》(감독 이미영), 《콜》(감독 이충현), 《혼자 사는 사람들》(감독 홍성은)이다.

 

한 심사위원은 언론사 뉴스토마토 인터뷰를 통해 "영화의 성 평등적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영화의 내용과 형식, 산업적 측면까지 포함하여 치열하게 논의했다"라며, "벡델 데이가 제시한 새로운 기준 7가지 모두를 통과할 수 있는 작품이 극히 드물었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계가 여전히 시대가 요구하는 성 평등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단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올해 '벡델데이 2021'측에서는 '벡델 심포지엄'을 통해 '벡델초이스 10'에 선정된 영화와 지난해 7월부터 6월까지 개봉한 한국 영화 흥행작 20편을 AI를 통해 분석한 자료를 공개하였다. (개최된 벡델 심포지엄 녹화 영상은 네이버TV와 유튜브를 통해서도 관람할 수 있다.) 감정의 다양성, 시간 점유율, 공간 점유율, 나이, 안경과 메이크업, 주변 물체의 종류 등 총 7가지 지표를 통해 남녀 캐릭터를 분석했다. 분석 결과 또한 한국 영화 작품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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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영화감독조합(DGK) 유튜브 채널

 

 

먼저 감정의 다양성은 얼굴 감지 AI 기술로 화남, 역겨운, 경멸, 두려움, 행보, 놀람, 중립적인, 슬픔이라는 8가지 카테고리로 나눠 측정했다. 그 결과 벡델 영화와 국내 흥행 영화 모두 남성 캐릭터보다 여성 캐릭터가 감정이 표현되었다고 분석됐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여성 캐릭터가 특정 영역에 감정을 더 많이 드러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해석을 덧붙였다. 두려움, 슬픔, 행복, 놀라움과 같은 수동적 감정에서는 여성 캐릭터의 수치가 높게 측정됐으나, 화남, 경멸, 역겨움과 같은 적극적 감정에서는 남성 캐릭터가 높게 측정되었다. 이는 여성 캐릭터의 방어적, 수동적 감정 상태가 감지된 결과로 보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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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영화감독조합(DGK) 유튜브 채널

  

 

국내 흥행 영화에서는 남성 캐릭터가 차지하는 시간 점유율이 여성 캐릭터보다 2배가량 높았다. 벡델 영화의 경우에도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이 대다수였음에도 남녀의 시간 점유율이 비슷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분석 자료를 통해 여성 중심 서사 영화에서 남성의 이야기도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다뤄지지만, 남성 중심 서사 영화 혹은 국내 흥행 영화에서는 여성의 이야기가 대다수 배제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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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영화감독조합(DGK) 유튜브 채널

 

 

시간 점유율을 제외하고도 영화 속 남녀 캐릭터 나이 분포 분석 자료를 봐도 그저 영화를 관람하며 느꼈던 불편함과 찝찝함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보다 10살 가까이 나이가 적게 설정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흥행 영화 캐릭터의 평균 나이는 여성 25.2세, 남성 34.4세였고, 벡델 영화에서는 여성 27.4세, 남성 35.9세였다. 그래프를 통해 남성 캐릭터의 연령대는 대체적으로 고르고 높게 분포한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반면에 여성 캐릭터의 연령대 같은 경우 10대와 20대에 집중되어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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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영화감독조합(DGK) 유튜브 채널

 

 

또한 여성 캐릭터와 남성 캐릭터의 안경 착용 여부를 분석한 결과, 벡델 영화와 국내 흥행 영화 모두에서 남성 캐릭터가 안경을 쓴 평균이 높았다. 메이크업 분석 결과에도, 벡델 영화와 국내 흥행 영화 모두에서 여성 캐릭터가 남성 캐릭터보다 눈 화장과 입술 화장이 두드러졌다.

 

*

 

지금까지 벡델 테스트와 얼마 전 국내에서 진행된 '벡델데이 2021'에서 논의된 내용을 중점적으로 나열해 보았다.

 

물론 국내 '벡델데이' 측에서 제안한 4가지 조항 외에 엘리슨 벡델이 제시한 3가지 조항들에 의한 벡델 테스트에 관해서는 현재 다양한 비판과 오해가 있다. 벡델 테스트에 통과한 영화임에도 여성 고정관념이 가득한 영화가 있었고, 여성 주인공의 영화인데도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한 영화도 있었다. 벡델 테스트는 그 테스트에 통과 여부를 따지는 것을 떠나서, 영화 속 여성 서사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자료일 뿐이며, 영화 자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에는 애매하고 부족한 기준이라는 의견이 존재한다. 따라서 단순히 3가지 기준에 부합하는 영화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여성 영화'내지는 '페미니즘 영화'라고 불리는 것은 다소 오류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스웨덴에서 2013년부터 세계 최초로 영화 산업에 벡델 테스트를 기반으로 하여 영화 속 성 평등 지수를 측정하여 등급 시스템을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성별 고정관념이나 여성 혐오, 여성에 대한 폭력 및 욕설 등을 분석하여 이를 토대로 등급을 매긴다. 당시에는 찬반 논란이 뜨거웠지만 현재는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최초 시행된 2013년에는 제작 영화 중 약 34%가 벡델 테스트를 통과했으나, 2018년에는 약 65%까지 그 비율이 증가하는 성공적인 실적을 거두기도 했다.

 

*

 

최근에는 독립 영화를 중심으로 상업 영화에서도 여성 중심 서사 영화라던가, 성 고정관념을 깨고자 하는 영화들을 일부 발견할 수 있어 반갑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사점을 남기고 있는 벡델 테스트와 '벡델데이 2021'를 통해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이 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창작진들은 영화 속에 편협적인 성 관념이 녹아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며, 보다 더 다양한 여성 서사를 다루도록 시도를 거듭해야만 한다. 관객들은 이제는 더 이상 소모적이고 고정관념으로 떡칠되어 대상화된 여성 캐릭터를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절반은 여성인데, 과연 영화 속 현실도 그랬었는지 이제는 다시금 되돌아볼 차례다.

 

 

[참고 자료 출처]

유튜브 채널 한국영화감독조합(DGK)

영화 속 성평등 가늠하는 벡델 테스트...이번엔 어떤 영화들이 통과했나

(경향신문, 백승찬 기자, 2021-08-17 입력)

그 영화에 정말 '여성'이 보이던가

(한겨례, 홍석재 기자, 2013-08-15 입력)

단 10편 뿐인 올해의 '벡델초이스 10' 영화 목록

(맛있는 뉴스토마토,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2021-08-17)

스웨덴 영화협회, 영화분야 성평등 달성을 위한 페미니스트 등급 시스템 운영 중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홍희정 웁살라대학교 젠더연구센터 객원연구원, 202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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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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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나이 많은 여자
    • 나이를 많이 가지면서 살아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다양한  그 시대의 가치와 문화 속에서 살아 왔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대가 요구해온 가치들과 동떨어진 생각들을 부여잡고 힘들어하던 시간도 있었고 그 시대의 부당한 대접도 느끼지 못하고 사랑하고 누려왔던 과거도 있습니다. 그냥 그때는 그렇게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그 한가지 예로  직장에서의 성희롱 또한 만연한 그 때, 불편하지만 왜 불편했는지 몰랐던 그 때. 어떻게 보면 그 모두가 다 성범죄자 였습니다. 그냥 그런 상황들  속에서 모르고 살았으니까요 그게 왜 불편한건지를 . 지금 성장한 시각으로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로 만들어진 일이 태반입니다. 하지만 그 과거를 미워만 하겠습니까.,,지금도 이 시대, 이 사회는 우리에게 어떤 규범으로 우리를 규정할까요,,한 시도 깨어있지 않으면 안되고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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