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리플리 증후군을 아시나요 ① [영화]

글 입력 2021.09.14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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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슷한 결의 영화를 이어보는 걸 좋아한다. 예컨대 음식 영화 <리틀 포레스트> <아메리칸 셰프> <카모메 식당>을 후루룩 몰아본다든가 제목이 유사한 <레이디 멕베스> <레이디 버드>를 난데없이 이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고스트 스토리>와 <마카담 스토리> 역시 마찬가지의 경우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즐겨보는 방법이 있다면, 직전의 영화와 유사한 분위기를 풍길 것 같은 작품을 주로 골라보는 편이다. 혹은 영화를 보면서 - 영감을 받아 - 자연스레 떠오른 대상을 다루고 있는 작품을 이리저리 찾아다니기도 한다. 영화 <리플리>와 <태양은 가득히>도 얼마 전 그런 식으로 만나게 된 영화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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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이 서로 같은 내용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은 <리플리>를 보고 난 지 며칠이 지난 후 우연이 손 가는 대로 틀게 된 <태양은 가득히>의 도입부를 보고 있을 때였다. 원작 소설이 있는 줄은 당연히 몰랐거니와 두 영화가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했던 나는 <태양은 가득히>의 오프닝을 보자마자 불과 며칠 전에 관람한 <리플리>가 곧장 떠올랐다.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인물 관계까지 –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고서야 – 똑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초반부터 엄청난 긴장감을 자아내는 이 범죄 스릴러 작품의 기원을 알게 된 건 두 영화를 모두 관람하고 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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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플리>와 <태양은 가득히>는 미국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있는 리플리 씨」(1955)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리플리는 고등학생 동창생을 죽이고, 그이의 신분을 빌려 음모를 꾸민 뒤 혐의에서 빠져나가 자신이 죽인 동창생의 부를 손에 넣는다. 이 문학 작품은 배우 알랭 들롱이 주연한 1960년 영화 <태양은 가득히>로 각색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이름을 알렸고, 영화가 크게 흥행한 뒤로부터 본격적으로 '리플리'라고 불리는 증상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영화적 흥행에서 비롯된 ‘리플리 증후군’은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뜻하는 용어이다. 스스로 지어낸 거짓말을 믿어버리는 정신적 상태에 대한 사회적인 신조어로서 공식적인 질병으로 인정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에 가까우면서도 실존하는 병명은 ‘공상허언증’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두 영화는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기에 내용의 전체적인 틀만 놓고 보면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태양은 가득히>의 도입부를 볼 때만 해도 두 영화가 비슷한 결을 띠고 있으리라 무의식적으로 확신했던 것 같다. 이미 주요 내용부터 결말까지 모두 알고 있으니 그저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고 있을 찰나 영화는 그런 나의 예상을 비웃듯 <리플리>와는 전혀 다른 전개 방식을 선보였다. 하기야 제작 시기가 얼추 40년 가까이 차이나는 두 작품에 차별점이 있는 건 당연지사가 아니겠냐만. 두 영화는 원작의 전반적인 흐름과 내용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는 동시에 오프닝부터 인물 관계도, 전개, 그리고 결말까지 각각의 서로 다른 내막을 품고 있었다. 같은 줄거리를 담고 있으면서도 이토록 다른 분위기와 내용을 취할 수 있다니! 덕분에 두 작품이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두 영화 모두 재밌게 관람했지만, 본 글에서는 필자가 조금 더 인상 깊게 본 <리플리>를 중심으로 <태양은 가득히>와의 차이점, 그리고 작품 곳곳에서 느낀 여러 흥미로운 지점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가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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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플리>는 조각조각 나 있는 검은 화면 사이로 리플리(맷 데이먼)를 비추며 막을 연다. 곧 “The Talented Ripley”라는 제목이 화면으로 떠오른다. 제목이 온전히 제 이름대로 떠오르기 전의 ‘Talented’의 자리에는 mysterious(비밀에 싸인), yearning(동경하는), lonely(외로운), troubled(불안해하는), loving(애정 어린), intelligent(총명한), beautiful(아름다운), haunted(겁에 질린), musical(음악적인) 등의 갖가지 미사여구가 빠르게 등장하고 사라진다. 모두 리플리를 가리키는 용어다.


영화에서 리플리는 뉴욕의 하위 계층에 속하는 인물로서 피아노 조율사와 호텔 일을 업으로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리플리가 앞선 단어들과 한 몸이 되어 파국의 세계를 향해 내달리기 전, 그는 우연한 계기로 선박 부호 사장인 그린리프 씨로부터 이탈리아에서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들 디키 그린리프(주드 로)를 직접 데려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린리프 씨는 리플리가 디키의 프린스턴 대학 동창인 줄로 잘못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디키를 데려오면 1천 달러를 보상으로 주겠다는 그린리프 씨의 말에 리플리는 곧바로 프린스턴 대학 출신인 척 시치미를 떼며 이탈리아로 떠나게 된다. 호텔에서 일할 적부터 오페라를 몰래몰래 훔쳐보며 눈을 떼지 못하던 리플리에게 그린리프 가문과 같은 귀족층은 거부할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나 다름없었다.


리플리는 귀족 집안 자제인 디키와 가까워지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 그이가 즐겨듣던 재즈 음악을 주도면밀히 조사하고 공부한다. 리플리에게 재즈는 그 자체로 음미하고 향락하는 음악적 창구가 아니라 그저 머릿속에 욱여넣고 달달 외워야 하는 속물적 수단에 불과하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애초에 <태양은 가득히>와 <리플리>가 두 인물 사이에 서로 다른 시작점을 가지고 영화의 막을 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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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태양은 가득히>에서 그린리프 씨의 아들은 ‘디키’가 아닌 ‘필립'(알랭 들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필립과 리플리는 본디 리플리가 이탈리아로 날아오기 전서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사이다. 그린리프 씨는 아들 필립을 데려오는 조건으로 5천 달러를 내건다. 영화는 이러한 두 사람의 인물 관계를 근간으로 오프닝부터 필립과 리플리가 이미 이탈리아에서 만나 대화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리플리>는 디키와 리플리가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생면부지 타인으로 인물 관계를 설정해둔다. 따라서 영화는 관객에게 리플리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소개하는 작업을 우선으로 한다. 즉 리플리가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는 장면을 오프닝에서 보여줌으로써 그가 사회의 하위 계층에 속한다는 걸 관객으로 하야 미리 어림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더불어 영화는 리플리가 상위 계층의 삶을 명백히 동경하고 우러러보고 있음을 찬찬히 조명한다.


두 작품을 비교해서 바라보니 원작 내용을 알고 있지 못하더라면 <태양은 가득히>가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로 다가올 우려가 있어 보였다. 도입부부터 필립과 리플리의 관계가 기본 가정으로 깔려있을 뿐 아니라 둘에 얽힌 다양한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니 말이다. 이와 달리 <리플리>는 2시간이 훌쩍 넘는 상영 시간을 자랑하는 만큼, 내용적인 측면에 있어 관객이 쉽게 이야기를 따라올 수 있도록 리플리를 뒤쫓으며 차근차근 진행 단계를 밟아나간다.

 

<태양은 가득히>에 앞서 <리플리>를 먼저 관람한 것이 신의 한 수나 다름없었다.

 

 

- 다음 편에서 계속

 

 

[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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