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우린 운명이 아니라 스치는 인연이었을까 -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

글 입력 2024.02.0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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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에 밀씨를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중략) 지금 니들 앞에, 옆에 있는 친구들도 다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 또 나하고도 그렇게 만난 거다.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中

 

 

영화 원작이자 뮤지컬로도 많은 사랑을 받은 <번지점프를 하다>의 첫 대사다. ‘인연’에 대한 대사. 인연은 어쩌면 필연적인 우연이자 엄청난 운명이라는 말.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대사는 결국 그 긴 인연을 돌고 돌아 사랑을 지켜낸 둘의 운명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인연을 운명으로 만들어 낸 둘이기 때문이다.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를 보고 인연과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작품 속에서도, 현실 속에서도 처음 사랑에 빠질 때 ‘이건 운명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랑이 많다. 그러나 그 끝의 끝까지 그 사랑이 진정 운명이었는지 확인하긴 어렵다. 그런데 이 작품은 오히려 결말을 알려주고 시작하며 그 사랑의 끝을 진솔하게 풀어낸다. 이 뮤지컬의 작가인 제이슨 로버트 브라운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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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스쳐야만 했을까


 

극은 처음 시작하기 전부터, 두 주인공인 캐시와 제이미의 시간이 반대로 흘러가는 구성을 취한다고 말해준다. 캐시와 제이미는 둘이 함께했던 5년. 캐시는 5년의 끝부터 시작으로, 제이미는 시작부터 끝으로 향한다. 각각의 시간이 끝날 때마다 무대 배경의 조명으로 표시해 주고, 맺고 끊음이 확실해 이해에 어려움은 없다.


무대는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원형의 턴테이블 무대와 그 안에 놓인 긴 테이블이 다른 방향으로, 혹은 같은 방향으로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다. 우리가 ‘시계’를 떠올리면 흔히 떠올리는 원형 시계와 비슷한 모양의 턴테이블과 시계 안에서 시침과 초침이 있는 것처럼 긴 테이블이 있어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극이라는 게 간접적으로도 느껴진다. 시간 여행을 함께 하는 기분이다.


왜 캐시와 제이미의 시간을 엇갈리게 설정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공연을 보다 보니, 엇갈리는 시간 속에서 돌아가는 무대 그 자체가 캐시와 제이미를 표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같은 공간 속에 스치기도 하지만 결국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는 둘. 돌아가는 원형의 시간 속에서 스쳐만 가는 그들 자체가 그들의 사랑이 스쳐 지나감을 표현하는 것 같아 슬펐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스며든 운명이 되지 못하고 스치는 인연에서 그친 걸 알기에.


둘의 시간이 엇갈린다면 왜 캐시가 역행이고 제이미가 순행일지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이 답은 두 등장인물의 첫 넘버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제이미가 캐시에게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제이미가 떠난 후 아픔을 노래하는 캐시의 ‘Still Hurting (아직 아파)’ 바로 뒤에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진하게 캐시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제이미의 ‘Shikasa Goddess (나의 여신)’이 대비되며 이 둘의 사연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이별과 사랑의 실마리를 따라가며 몰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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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힘


 

퇴장 없는 90분의 2인극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이 극은 배우의 힘이 크게 느껴졌다. 우선, 제이미와 캐시는 결혼식 장면 외에는 다른 공간에 있는 설정이기에, 함께 호흡하며 감정선을 따라가지 않는다. 마주하며 감정을 끌어낸다기보다 각자의 감정선 유지가 중요한 극이다. 그 와중에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극한의 감정을 바로 표현해야 하는 넘버가 제이미와 캐시 모두 있기에, 감정을 터뜨리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한 넘버 자체의 난이도도 쉽지 않다. 넘버 자체에도 포인트나 굴곡이 많은 편이다. 소극장에서 2인극에, 특히나 함께 화음을 이루어낸다기보다 개인 넘버가 많기 때문에 배우 각자의 개인 기량이 유독 돋보인다. 돌아가는 무대를 이용하고, 긴 테이블을 폴짝 뛰어다니기도 하며, 그 회전과 함께 무대를 꾸미며 넘버까지 부르는 배우의 역량이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배우의 캐스팅은 완벽에 가깝다. 이미 예상했지만, 더 좋았다. 캐시가 이 뮤지컬의 첫 넘버인 ‘Still Hurting (아직 아파)’으로 공연을 시작할 때부터, 마음 놓고 극을 즐길 수 있었다. 보편적이기에 잔잔할 수도 있는 스토리를 끌고 가는 건 오롯이 배우의 힘이다. 특별하지 않은 스토리를 먹먹하게 표현한 배우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특히 캐시 역할은 초반부에는 깊은 슬픔, 후반부에는 깜찍함 두 가지를 자연스럽게 동화시켜야 했는데, 훌륭히 해낸 배우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중에서도 캐시의 ‘Climbing Uphill (오디션 시퀀스)’ 넘버를 짚고 가고 싶은데, ‘A Summer in Ohio (오하이오에서의 여름)’과 더불어 이 극의 상큼함을 배가시켰다. 뮤지컬 <렌트> 모린의 ‘Over the Moon’이 생각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민경아 배우가 모린과 캐시를 둘 다 하기도 했고. 배우의 개인적 매력이 철철 느껴지는 넘버이다. 배우의 팬이라면 이 넘버를 보기 위해 한 번쯤 이 극을 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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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지만 저릿한 스토리


 

사실 스토리는 보편적인 연애 이야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아는 맛도 맛있게 말아주면 계속해서 보게 되는 작품에 ‘김치찌개 맛집’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처럼, 이 극도 일종의 김치찌개다. 이미 결말까지 말해주고 시작하는 사랑 이야기, 다 알지만. 그래도 캐시와 제이미의 그 사랑을 보며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져들고, 이별과 사랑의 과정에 대해 고찰해 보게 되는 것이다.


제이미는 너무 빠른 성공 가도를 달린다. 넘버 제목부터 ‘Moving Too Fast (너무 빨라)’인 것처럼, 사랑도 일도 원하는 것을 빨리 쟁취한다. 실제 제이미의 모티브 캐릭터인 작가 본인인 제이슨 로버트 브라운은 20대에 이미 여러 상을 받으며 천재 작곡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너무 순탄하고 순조롭게 풀리는 인생, 그러나 그녀가 사랑에 빠진 캐시는 다르다.


사람마다 각자의 시간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사랑은 타이밍이다’라는 말을, 옛날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람과 나의 시간 속도가 맞아지는 것, 그 또한 타이밍이 아닐까. 캐시와 제이미는 각자의 시간이 달랐다. 캐시는 뮤지컬 배우를 준비하지만, 제이미처럼 빠르게 성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오하이오에서 지방 공연을 하며 제이미와 장거리 연애까지 하게 되고, 둘의 갈등은 더 깊어진다.


솔직히 극을 다 보고 나면 ‘너무 진부한 결말로 이어진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 결말이었을까 싶다가도, 자전적 이야기를 배경으로 했다니 그런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곱씹어 보게 된다. 결국 이 극이 말하고 싶었던 건, 연인 관계에서는 잘못한 사람도 상처받는다는 것 아닐까. 보통의 연애 관계에서는 한 사람만 잘못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잘못해서 헤어짐을 겪게 된다고 해도, 결국 그 헤어짐 자체가 둘 모두에게 상처인 건 변함이 없으니.


극의 후반부에 제이미가 새로 쓴 신작 소설을 낭독하는 장면이 있다. ‘캐시에게’로 시작하는 소설. 한 남자는 수영하다 지쳐 옆 레인의 여자를 바라본다. 인어 같은 그녀. 그러나 그녀를 다시 보았을 때, 그녀의 미간에 배인 강렬함과 단단한 팔 근육과 종아리를 보게 된다. 그녀를 새로이 볼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못한 그는 그녀의 새로운 면을 본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나한테 일부러 져주지 마”라고 외친 소리는 그에게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 소설이 이 둘의 5년을 5일에 빗대었다고 생각했다. 3일이 지나고 그녀를 새로 보게 된 그. 그러나 그녀의 외침을 듣지 못해 남은 그녀가 남은 하루를 침묵에 잠기게 한 그. 그는 그녀 자신의 힘과 강인함을 알아주지 못했고, 그녀는 그가 진정 힘들어 쉬고 있는 걸 일부러 져준다고 생각했다. 비약하자면 자만심에 눈이 먼 그와 자격지심에 눈이 먼 그녀. 왜 사랑할수록 사소한 것을 참지 못해 결국 끝을 맺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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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만의 삼연


 

15년 만에 삼연으로 올라온 극이니만큼, 많이 준비한 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는 캐스팅부터, 번역과 무대에 많은 공을 들인 게 느껴졌다. 재연 때 리뷰만 찾아봐도 2인극임에도 다른 배우가 무대를 옮기는 소리나 행동에 난해함이 느껴진다는 평이 많았는데, 이번 삼연에는 그런 걸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다른 배우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배우의 감정선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눈으로 좇아야 할 정도였다.


번역에도 공을 들인 게 느껴졌다. 수많은 대극장 공연을 번역했던 김수빈 번역가가 참여했다고 들었는데, 원어를 보았을 때 매끄럽게 번역됐다고 느꼈다. 특히 캐시가 ‘기부니가 조크등요~’ 이런 식의 애드리브를 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 약속된 애드리브인지 즉흥 애드리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이 이 극의 자연스러움을 더 살려줬다.


잔잔하지만 배우의 역량으로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는 극이었다. 특히 캐시가 결혼식 때 부케를 던져주는데, OP 석부터 2열 정도까지는 모두 부케의 가시권 안에 있었다. 앞 열은 특히나 무대와 같은 눈높이기도 하고. 뮤지컬 배우가 직접 던져주는 부케를 받을 수 있는 극이라니,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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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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