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견된 익숙함, 클리셰 [영화]

클리셰가 우리에게 주는 것
글 입력 2021.08.2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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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모 채널에서 진행하는 영상 콘텐츠를 시청한 일이 있다. [무조건 나오는 장면]이란 제목을 단 영상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장면들을 묘사하는 내용이었다. 그랬다. 흔히 떠올릴법한 '클리셰'를 연기하는 콘텐츠였다. 조회 수 역시 인상 깊었다. 100만 뷰를 넘긴 영상들도 제법 보였고 240만 뷰를 넘긴 영상도 보였다.

 

흔히 사용되는 '클리셰 범벅'이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 현재 클리셰는 그다지 좋은 의미로 사용되진 않는다. 방금 언급한 유튜브 콘텐츠 역시 클리셰를 희화화한 영상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해당 콘텐츠를 비난하는 댓글은 전체적으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여러 장르 영화의 클리셰를 인지하고 있고, 클리셰가 영화 매체에서 쉽사리 소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클리셰(cliché), 대게 진부하거나 상투적인 표현을 이르는 프랑스어다. 영화에서는 긴 시간 공식처럼 쓰여오는 전형적인 장면이나 캐릭터를 말할 때 사용된다. 최초의 영화가 프랑스에서 촬영되었기에 클리셰란 단어의 시작 역시 영화에 근거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의 출발점은 본디 프랑스어 'clichér(to click)'에 있다. 인쇄를 쉽게 하고자 미리 활자를 합쳐놓은 '틀', 인쇄연판을 뜻하는 용어가 바로 클리셰였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를 지나며 틀에 박힌 내용이나 표현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현재 우리가 아는 의미로 변해왔다.

 

 

인쇄 이미지.jpg

 

 

더하여 클리셰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 단어, 스테레오타입(stéréotype) 역시 인쇄업에 뿌리를 둔 단어이다. 19세기 초 프랑스 인쇄업자들의 전문 용어였던 '고정형 블록(stereptype block)'이 단어의 유래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도 흔히 사용되는 두 단어의 시작에는 동일한 하나를 끝없이 생산하겠다는 자기 복제의 목적이 숨어있는 셈이다. 둘을 함께 언급해 본 이유이기도 하다. 변화 없이 한 가지만을 만들었기에, 진부함과 상투성은 예견될 결과일 듯싶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익숙하고 진부한 클리셰도 분명 처음부터 이리 흔해빠진 뭔가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원학이 밝힌 단어의 역사도 이를 보여줄 것 같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이 프랑스어 관용구는 비록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 확장되는 흔적을 쭉 보여주지만, 1920년대까지만 해도 영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진부함'을 나타내기 위한 단어에도 새로움이 받아들여질 정착 과정이 필요했던 셈이다.

 

언어의 사용이 그러했듯, 현재 클리셰로 여겨지는 영화의 장면과 기법들도 과거에는 분명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 이상으로 재미와 편안함을 증명하였기에 지금까지 하나의 공식으로 자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예를 들어 스릴러 장르의 대가 히치콕 감독이 즐겨 사용한 '맥거핀(MacGuffin)'을 떠올려 보자.

 

히치콕은 '영화의 캐릭터들이 중요시하고 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실상 관객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맥거핀을 설명한다. 그의 영화에서 맥거핀은 이야기 흐름에 서사를 부여하고 인물의 행동을 이끌지만 최종적으로 영화의 흐름과는 무관한 완결성을 가지게 된다. 그의 영화 < North by Northwest(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1959 >에서 등장하는 의문의 인물 '조지 캐플란'이 대표적인 기법의 활용일 것이다. 이는 주인공 '로저 쏜힐'이 첩보 사건에 휘말리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의미를 잃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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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법은 히치콕 이후 보편화되었다고 하는데, 즉 그의 적극적인 활용으로 클리셰 화가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과거로 돌아가 히치콕에게 맥거핀은 진부하고 상투적인 기법이라고 한다면 히치콕은 당황을 금치 못할 것 같다. 그에게 맥거핀은 신선한 기술임은 물론, 그저 틀에 박힌 시시한 표현법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히치콕 영화의 핵심 주제는 오인의 모티프를 관객에게 적용시키고자 함이기에, 맥거핀은 그의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히치콕이 영화 < Notorious(오명), 1926 >를 촬영할 당시 수많은 프로듀서들이 그의 맥거핀 사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낯설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맥거핀은 영화는 물론 다른 장르에서도 사용될 만큼 보편화되었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 < 곡성, 2016 >이 그러했으며 게임은 물론 광고에서도 맥거핀이 사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새로운 캐릭터나 기법, 장치가 그 효용을 인정받아 꾸준히 사용되었다면 클리셰 화는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경함하였음이 증명된 셈이다. 팜므 파탈이 여전히 소비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며 앞으로도 사라지지 못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현재 영화 시장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상업 영화다. 그리고 상업 영화는 매출을 올려야만 하기에, 이미 증명된 전략을 쉽사리 외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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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클리셰의 타파를 통해 흥행을 이루고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장르 영화 역시 등장한다. 개인적으론 < The Cabin in the Woods(캐빈 인 더 우즈), 2012 >가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은 일이며, 기존의 것을 부순 안티-클리셰가 다시금 클리셰로 자리하기도 한다. 어찌 됐든 클리셰를 완벽히 피해 갈 순 없으며 우리 또한 이를 완전히 외면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클리셰의 배제가 힘든 일이라면 클리셰 사용의 무조건적인 비난 역시 힘을 잃는다. 아무리 진부하고 상투적인 내용의 영화라고 지적해봤자, 그 중단이 즉각적으로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부정의 힘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도 좋지 않을까 싶다.

 

클리셰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 클리셰가 가로막고 있는 것, 방해하고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일이 더욱 생산적이지 않을까. 들뢰즈가 클리셰를 두고 관객의 새로운 사유를 막는 재생산일 뿐이라며 비판을 가했듯이 말이다. 히치콕의 맥거핀 역시 관객의 집중을 위한 장치이자, 그들에게 비판적 자세를 요청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적어도 히치콕이 관객들에게 케플란이나 우라늄 병, 돈다발에 매몰되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을 바라진 않을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클리셰 자체에 몰입해 그를 평하는 태도 역시 재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해당 영화의 클리셰가 무엇인지, 왜 등장하였는지, 패러디나 오마주를 일일이 찾는 일 역시 그러하다. 나름의 재미는 분명 있겠지만, 퍼즐을 맞추든 영화를 분해하고 재조합하는 일이 영화적 사유를 돕는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조금 더 중요한 것은 클리셰든 혹은 그 외의 다양한 영화적 요소들이든, 그를 통해 영화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고민하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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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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