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극작가 아일린 린(Isley Lynn)의 수상작 연극 <너울(THE SWELL)>이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국내 초연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연극 <너울>은 50대 여성 커플 벨과 플로의 현재와 20대 시절을 교차해 보여준다. 질병 후유증으로 일상에 제약이 생긴 벨과, 그 곁을 지키는 플로의 삶은 평온해 보이지만, 정체불명의 전화 한 통을 계기로 균열이 생긴다. 이후 과거의 기억이 현재로 밀려들며 두 인물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연극은 6인의 배우를 통해, 퀴어의 삶과 사랑, 그리고 돌봄의 시간을 그려낸다.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하기, 그리고 견디기
연극<너울>에는 20대 시절과 현재를 그리는 총 6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6인의 배우는 2인 1역을 맡아 3명의 인물-벨, 애니, 플로-을 그려낸다. 20대 시절 벨과 애니는 우연히 카페의 점원과 손님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고 약혼을 하게 된다. 애니는 비영리 기구를 운영하며 자기 일과 사랑 모두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한편, 애니와 벨의 평온했던 일상은 애니의 친구인 플로가 등장하며 둘의 관계는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플로는 애니와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지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서핑을 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인물이다. 플로는 애니와는 다른 것을 벨에게 준다. 이를테면, 클럽에서 춤추기, 퀴어 커뮤니티를 찾는 법, 서핑의 즐거움 같은 것.
플로는 벨과 애니의 관계를 변화시켰는가 또는 방해했는가. 그러하기도, 또한 그러하지 않기도 하다. 벨이 플로를 만나게 되며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벨 자신에게 있었다. 벨은 플로를 통해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대했던 애니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었다. 벨은 애니를 만나기 전까지는 퀴어 커뮤니티에 속해본 적도, 커밍아웃해 본 적도 없다. 퀴어라는 이유로 가족과는 연이 끊긴 상태였고, 연락할 수 있는 친구도 없었다. 벨에게 애니와의 관계는 단란함이기도 했지만 고독함이기도 했다. 이미 부모님께도 커밍아웃한 애니, 다른 퀴어 친구들이 있는 애니, 활발히 사회 생활을 하는 애니가 주는 사랑의 방식은 벨에게는 치유인 동시에 독이었다. 이 사실은 벨이 플로를 만나지 않았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플로를 만났기에 벨은 애니에게 말할 수 있었다. 오픈 퀴어의 세계로 자신을 초대하려는 애니의 방식에 구구절절 반박할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의 누군가를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명제이지 않은지 질문하고 싶다. 원래의 나와 변형된 나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 싶다. 사랑은 각자의 방식으로 타인을 착각하는 과정이고, 나와 남을 바꾸는 과정이고, 상처를 입히는 과정이다.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허용하지 않았을 것들을 허용하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단 한 가지, 떠나지 않을 것임을, 함께 할 방법을 찾을 것임을 약속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래서 파괴적이다.
퀴어 시간성의 너절함과 간절함
여자를 만나는 여자, 남자를 만나는 남자, 여자도 남자도 아닌 횡단자들. 퀴어란 단지 정체성, 즉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개인의 답변일 뿐인가. 그러니까 기존의 이성애 규범 속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하던 결혼의 여자 혹은 남자를 다른 성별로 바꾸는 것에 그치는 것인가. 그렇게 성립될 수도 있다. ‘우리도 이성애 커플과 다를 바가 없다’라는 외침.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무의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가.
제인 갤럽의 책 ‘퀴어시간성에 관하여’는 에덜먼의 시간성 이론을 인용하고 있다. 에덜먼에 따르면 규범적 시간성이란 (미래의 약속에 모든 것을 부속시키는) 강제적 미래주의이며, 퀴어들은 현재보다 미래를 선호하는 강제적인 사회질서에 대한 위협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퀴어는 미래의 약속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주류 시간성 바깥에 있는 존재 그리고 미래 전망에 훼방이 되는 존재다. 규범적 시간성의 미래주의는 재생산성과 연관이 된다. 퀴어들은 재생산을 하지 못하는 섹슈얼리티를 실행함으로써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없는, 미래의 약속을 보장하지 않는 섹슈얼리티를 추구한다. 물론 다양한 생식보조술을 활용하여 아이 낳는 퀴어들의 존재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식보조술을 사용할 때조차 퀴어 섹슈얼리티가 헤테로 섹슈얼리티와 같은 것을 사회로부터 기대받는 것은 아니다.
릴리 댄시거의 에세이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는 사랑과 우정의 다정함과 복잡함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을 구분하는가. 혹은 구분하기를 요청받는가.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가 숨기고자 하는 사랑의 정체는 세계와 너무 밀접하게 붙어있다. 결혼식과 혼인관계증명서, 겹겹이 가족들과 출산하게 되는 아이라는 강제성이 없는 퀴어 사랑의 세계의 문법이 이성애의 그것과 ‘성별’만 바뀐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너절하게 사랑하고 간절하게 매 순간에 매달려야만 한다.
한편, 퀴어 커뮤니티의 존재에 대하여도 연극 <너울>은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애니와 플로가 작은 마을의 학교에서 서로 퀴어라는 사실만으로도 의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연극은 퀴어의 구분할 수 없지만 동시에 구분되는 우정과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20대의 그들은 장년의 그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너울처럼 몰려오는 감정들을 붙잡고, 때로는 그것을 정리하며 여전히 사랑이 속삭이며 껴안을 수 있는 사람들을 무대는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