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Ice Breaking1. 1935년 논문을 읽어야 할까? [도서/문학]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글 입력 2021.07.2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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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 Breaking. 안면 트기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이번 글과 다음 글은 책을 통해 영화와 기술, 작품과 광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마주한다. 안면 트기 시리즈 중 이번 글은 영화와 기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인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와 기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인사할 기회를 주는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로 발터 벤야민의 논문을 엮은 발터 벤야민 선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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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발터 벤야민을 소개하는 글은 아니기 때문에 벤야민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발터 벤야민은 독일 출신의 유대계 언어철학자, 번역가, 좌파 지식인으로 한때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비평가이다. 그는 종교적 차원으로 사용되던 “아우라〔Aura, 독특한 분위기〕”를 예술, 작품에 적용했는데 그는 아우라를 이중적 입장으로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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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아우라에 대해 “진품성의 영역 전체는 기술적 복제의 가능성에서 벗어나 있고, 물론 기술적 복제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복제의 가능성에서도 벗어나 있다(p.45).”라고 논하며 아우라를 복제 불가능한 유일한 것으로 여기는 한편 아우라는 사소한 대상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벤야민이 아우라의 붕괴로 인해 예술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하며 아우라의 붕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내용도 있지만, 이는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생략하겠다.


혹자는 “1935년 논문인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2021년을 사는 사람이 왜 읽어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이에 대해 “2021년에도 우리는 기술 복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하겠다. 현재도 우리는 기술 복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기술 복제 시대로 인해 무엇이 변화했고 무엇이 사라졌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2021년을 사는 우리에게 기술 복제 시대는 너무 당연한 말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인쇄술의 발달도 기술 복제 시대에 속한다. 현대사회에서 복제되지 않은 것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루브르박물관에 걸려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을 우리는 손과 핸드폰만 있다면 쉽게 접할 수 있다. 모나리자의 그림을 실제로 보지 못한 사람은 있더라도 모나리자 그림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렇듯 기술 복제 시대는 현대사회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심지어 이제는 인간 복제에 대한 논의도 나오고 있는 세상이니 현대사회에서 복제되지 않은 것을 논하는 것은 입만 아프다. 기술 복제 시대에 사는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복제 기술로 인한 이점을 누리고 있다. 가수가 직접 노래하는 장소를 찾아가지 않아도 우리는 노래를 들을 수 있고 배우의 연기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배우의 연기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기술 복제 시대에 파묻혀 사는 동안 얻은 것만 있을까? 잃은 것은 없을까? 아니면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잃은 것이었다면? 혹자에게는 쉽게 답이 나올 질문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글에서 이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복제 기술을 통해 인류는 예술작품을 편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복제 기술을 통해 일어난 변화를 알기 위해서는 “아우라”의 붕괴조건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아우라의 붕괴를 초래한 사회적 조건은 대중이다.

 

“사물을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오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이 지닌 열렬한 관심사이며, 모든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그것의 복제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바로 그 관심을 나타낸다(p.50).”

 

이 문장에 대한 이해는 어렵지 않다. 우리의 주위에서도 관련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앙리 마티스의 그림이 그려진 핸드폰 케이스, 에어팟 케이스, 필통을 보면 대중은 언제나 사물을 자신에게 가까이 두고자 하는데 열정적이었고 복제 기술을 통해 역사에서 오직 한 번만 일어나는 성질인 일회성(여기서는 앙리 마티스가 그린 “그” 그림이 하나라는 것에 적용할 수 있음)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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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대중의 욕구로 인해 아우라가 붕괴하면서 일어난 변화는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능이 변혁을 겪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술이 의식에 바탕을 두었었는데, 이제 예술은 다른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p.53).”

 

기술 복제 시대 이전의 예술작품이 전통의 맥락에 편입되는 원초적 방식은 제의로부터였다. 또한 이러한 종교적인 의미에서 아우라가 논해졌다. 즉 “진정한”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의식에 근거를 두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이 제기되며 예술작품은 의식에 기대어 살아온 기생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예술이 의식에서 벗어나며 제의 가치가 떨어지고 전시 가치가 격상되었다. 전시 가치가 격상되며 예술작품은 전혀 새로운 기능을 가진 형상물이 되었고 이를 벤야민은 영화라고 말한다.

 

“오늘날에 이러한 인식에 대한 가장 적절한 예를 제시해주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점이다(p.55).”


영화, 다시 말해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접하는 “영화”는 촬영 현장의 모습을 편집하고 조립한 “결과물”이다. 영화는 과거 그리스인이 한번 만들면 수정하기 어려워 예술에서 영원한 가치를 생산해내야 했던 목표를 이룰 필요가 없다. 쉽게 말하면 예술은 더는 영원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전처럼 절대적이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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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영화는 개선 가능성이 가장 큰 예술작품이다. 이러한 개선 가능성은 영화가 영원한 가치를 극단적으로 포기하는 것과 연관된다(p.61).”


또한 영화는 기계적인 노동을 하며 기계 앞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거나 스포츠 결과처럼 자연적인 테스트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 앞에서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아야 하며 그 결과를 전시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는 성과의 전시 가능성 자체에서 일종의 테스트를 만들어냄으로써 테스트 성과를 전시할 수 있게 만든다. 대중은 영화배우의 인간성(또는 그들에게 비친 그 인간성)이 기계장치 앞에서 버텨낼 뿐만 아니라 그 기계장치를 자기 자신의 승리에 복속시키는 모습을 보고자 한다(p.67).”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특정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은 처음으로 - 그리고 이것이 영화의 작용인데- , 비록 자신의 생생한 인격 전부를 바치면서도 그 인격의 아우라는 포기한 채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p.69).”


영화만이 아닌 영화 기술을 통해서도 대중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확대촬영을 통해 당연히 불분명하게 보이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고 전혀 새로운 물질의 구조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속촬영을 통해 알려진 모티프들 속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움직임까지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지각과 의식에서는 알 수 없던 새로운 세계를 열게 되었다.

 

벤야민은 영화를 통해 우리가 접하는 것은 감각적 지각의 정상적 범위에서 벗어나야 접할 수 있는 것이고 영화 속의 일그러짐, 변신, 재난, 고정관념의 여러 장면이 실제로 정신이상, 환각, 꿈에서 나타나는 지각 세계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앞서 말한 확대촬영, 고속촬영 같은 카메라 기법은 관중의 집단적 지각이 정신병자나 꿈꾸는 자의 개인적 지각 방식을 전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기술적 발전이 얼마나 위험한 긴장 관계들을 대중에게 몰고 왔는지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똑같은 기술화가 영화를 통해 그러한 대중적 정신이상에 대해 정신적 예방접종의 가능성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즉 영화는 사디즘적 또는 마조히즘적 망상들이 과장되게 발전한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에서 그러한 에너지들이 자연스럽고 위험한 방식으로 성숙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 그와 같은 대중적 정신이상의 에너지가 미리 앞질러, 그리고 유익한 방식으로 분출하는 형태들 가운데 하나가 집단적 웃음이다(p.85).”


또한 벤야민은 회화와 영화를 비교하면서 다수의 관중에 의한 동시 감상은 영화에만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관에서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결정적인 점은, 어디에서도 관중 개개인의 반응이 - 이 개별 반응들의 총화가 집단 반응을 이루는데 - 영화관에서만큼 처음부터 집단에 의해 직접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곳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개별적 반응들은 밖으로 표출되면서 서로 컨트롤하게 된다(p.81).”


끝으로 벤야민은 예술이 제공하게 될 정신 분산을 통해 지각이 당면한 새로운 과제들이 어디까지 해결될 수 있는지가 은밀히 컨트롤되는데 개인들은 그러한 과제를 회피하는 성향이 있어서 예술은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바로 그곳에서 예술의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과제를 공략할 것이라고 말하며 영화가 수행하고 있는 과제에 대해 말한다.

 

“예술의 전 영역에서 점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고 또 지각구조의 변화를 가리키는 징후라고 할 수 있는, 정신 분산 속의 수용은 영화에서 그 고유한 연습 수단을 갖고 있다(p.92).”


이 글에서 소개한 벤야민의 기술 복제 시대와 영화 소견 외에도 가볍게 설명하고 넘어간 아우라에 대한 그의 의견, 전쟁에 대한 그의 생각이 책에는 길게 서술되어 있다. 책 내용 전부를 소개하기에는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생략한 부분이 많으니 관심이 생겼다면 꼭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이 글은 기술 복제 시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내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한 글이 아니다. 예술은 대중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소통하고 연결되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기술 복제 시대를 통해 대중이 예술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고 이로 인해 예술의 민주화가 일어났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인 결과다. 그러나 얻은 만큼 잃은 것도 많다. 예술의 영원성을 잃었고 우리가 우리의 정상적인 지각의 범주에서만 볼 수 있던 기회도 잃었다. 또 기계 앞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아야 하는 “배우”라는 신비한 직업도 얻었지만 어떻게 보면 기계 앞에서 인간성을 잃을 기회를 잃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기술 복제 시대에 스며든 현대사회를 살고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지 우리가 얻은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고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지 한눈에 보기 쉽지 않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가 우리에게 이점만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1892년에 태어난 발터 벤야민이라는 외국인이 집필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글에서 소개한 내용 말고도 해당 논문에서는 더 깊고 자세한 이야기를 논하고 있어서 관심이 생겼다면 꼭 읽어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또 소개한 책에는 글에서 소개한 논문 외에도 다양한 벤야민의 논문이 실려 있으니 벤야민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면 다른 논문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쉬운 글은 아니기 때문에 읽는 동안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한 문장을 이해하는데 몇십 분이 소요되기도 하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직접 읽어보고 기술 복제 시대에 파묻혀 사는 동안 잃은 것, 혹은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잃은 것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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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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