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에스파의 세계관에 담긴 실존주의의 미학

글 입력 2021.07.0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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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그룹 ‘에스파’의 싱글 ‘Next Level’은 케이팝 마니아인 필자가 근래 가장 많이 듣고 있는 노래 중 하나이다. 영화 ‘분노의 질주: 홉스&쇼’에 삽입된 OST를 리메이크한 이 곡은 중독성 있는 후렴구와 다채로운 구성, 독특한 안무가 이목을 집중시킨다. 작년에 발매된 데뷔곡 ‘Black Mamba’와 함께 두 개의 싱글만으로 대중의 관심을 모은 그룹 에스파는 4명의 멤버를 복제한 듯한 AI 캐릭터가 존재한다는 특징적인 콘셉트를 바탕으로 활동한다. 아이돌의 음악과 더불어 뮤직비디오를 포함한 시각 콘텐츠 등에 스토리텔링을 부여하여 팀의 개성을 살리고 콘텐츠의 입체적인 향유를 가능하게 하는 ‘세계관’ 마케팅의 일환이다.


‘Next Level’이라는 곡에 개인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역시 곡 발매 이전에 예고 형식으로 공개된 10분 남짓의 세계관 영상이다. 이전까지는 이들의 활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도 SF에 가까운 심오한 콘셉트가 부가적인 흥미를 쉽게 가져다줄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 짧지 않은 길이로 촘촘하게 짜인 세계관을 설명하는 영상을 시청하고 난 후 이들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되고 말았다.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들의 음악을 재해석하여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련의 움직임 역시 흥미로웠고, 앞으로 어떤 음악을 통해 복잡한 서사를 풀어나갈지에 대한 기대도 더해졌다.

 

 

 

 

두 개의 싱글과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통해 알려진 에스파의 세계관은 대략 이러하다. 사람들은 각자 SNS 등을 통해 온라인상에 축적한 정보로 구성된 가상 세계 속 또 다른 자아인 ‘아이(ae)’를 갖는다. 아이는 평상시에 현실 세계와 분리된 ‘플랫(FLAT)’이라는 공간에 머물다가 현실의 자아와의 연결 상태를 일컫는 ‘싱크(synk)’에 성공하면 두 공간이 이어지는 ‘리콜(rekall)’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들의 데뷔곡 제목이기도 한 ‘블랙 맘바(Black Mamba)’는 이러한 연결을 방해하여 현실의 자아와 아이의 만남을 막는 ‘빌런’의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원래는 무규칙, 무정형, 무한의 영역인 ‘광야(kwangya)’에 떠돌며 이곳은 누구에게나 부정적인 혼란의 공간으로 여겨진다.


현실에 없는 판타지 서사를 접하는 독자가 종종 그러하듯, 이토록 구체적으로 설계된 새로운 세계가 어떤 것을 지향하고 어떤 것을 지양하는지에 관한 궁금증이 생겼다. 왜 현실의 자아와 가상의 자아인 아이가 완전하게 양립하여 만나는 리콜 상태가 이상적인 상황으로 설정된 것인지, 왜 빌런은 이를 방해하고자 하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결정적으로 세계관 영상에 등장한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라는 제언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했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며 본질의 완성을 추구하는 사물과 달리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르트르의 이론에 따르면, 미디어를 통해 사회적으로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형태로 새롭게 직조되는 SNS 속 자아를 옹호하는 에스파의 세계관은 오히려 실존주의 철학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세계관의 방향성을 파악하기 전에 세계관 그 자체의 속성을 알 필요가 있겠다. 에스파의 세계관은 ‘메타버스(Metaverse)’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구축되었다. 메타버스란 물리적 실재와 가상의 공간이 기술을 통해 매개 및 결합되어 만들어진 세계로, 본래 소설 속 허구의 개념이었으나 점차 가상 환경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하자 의료계 등 현실에서의 실현 가능성 역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메타버스를 둘러싼 담론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가상 세계를 현실 세계의 대안이나 반대의 공간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가상과 현실이 교차되고 수렴되는 제3의 공간으로서의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즉, 가상 세계의 존재를 현실 세계의 보완재로 수단화했던 전통적인 접근에서 탈피하여 가상과 현실의 평등한 조우를 모색하는 것이 메타버스의 핵심이다.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자아와 가상 세계의 자아가 공존하는 에스파의 세계관은 이러한 메타버스를 기반으로 하여 두 개의 자아가 떨어져 있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기보다 상호 양립해 있는 상태를 지향한다. 온라인상에서 취사선택의 과정을 통해 인위적으로 구축되는 자아를 현실의 자아를 가리고 인간을 소외하는 허상으로 치부하며 실제와 구분하고자 했던 기존의 보편적 시각과 대치되는 새로운 관점이다. 에스파의 세계관은 가상의 자아인 아이를 현실에서 배제하지 않고 그것 역시 자아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SNS를 통해 드러낸 자아에 타인에게 특정한 형태로 비춰지고자 하는 욕망이 개입되었다면, 그것 또한 허상이 아닌 어떤 내면의 진실한 표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미디어의 흐름으로 인해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진 시대에 제시되는 새로운 접근법이다. 미디어를 통해 선별되고 편집된 자아 역시 나이며, 인간의 경험을 축적한 그것은 엄연히 그 자체로 현존재로서 실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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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Mamba’ 속 ‘Monochrome to colors 이건 evo-evolution’이라는 가사가 암시하는 것처럼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순간, 다시 말하여 이분법이 무너질 때 에스파의 세계는 진화의 걸음을 내디딘다. 그렇다면 이분법은 언제 무너지며, 무너진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에스파의 콘텐츠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듯이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사라지고 인간과 아이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결속할 때 이분법은 무너지고 세계는 도약한다. 미디어를 통해 끝없이 확장하고 변모하는 세계 속 존재를 현실의 틀에 맞춰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상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과 달리 누구도 수단화되지 않고, 다만 또 다른 형태의 자아가 우리 안에 실존하는 새로운 세계이다.


사르트르는 자각하거나 의식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상태를 ‘즉자’,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의식의 상태를 ‘대자’라고 규정했다. 존재는 우연적으로 시작되지만 타자와의 관계와 의식의 과정을 거쳐 종합적 형태로서의 ‘즉자대자’를 향해 나아간다. 사르트르가 각각의 상태를 어린아이, 젊은이, 어른에 비유한 것처럼 이는 한 인간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기도 한다. 본질에 앞서는 존재로서 태어난 인간은 본래 그 자체로도 의미를 가지나, 다양한 타인과 소통하고 마찰하며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거쳐 더 높은 차원의 자아를 성취하게 된다.


이러한 즉자대자의 상태는 이상적일 뿐이며 현실적으로는 이루기 힘든 상태로 규명되었지만 현대의 미디어는 이러한 움직임을 끊임없이 유도하고 있다. 드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계속해서 다양한 자아를 만들어내고, 자아 간의 관계를 구성하며,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사람들은 플랫폼마다 다른 자아를 만들어 활동하고 소통하지만 세계는 분열되지 않는다. 가상과 현실 사이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횡단의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실존의 가능성을 포괄하고 무한히 확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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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on the next level 더 강해져 자유롭게

Next level 난 광야의 내가 아냐

 

- aespa, Next Level 中

 

 

빠른 속도로 밀려드는 미디어의 파도는 적지 않은 부작용을 만들어내며 자아의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 현실보다 거대해 보이는 가상은 진실을 은폐하는 그림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자아의 수많은 일부를 가상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것은 본질을 추구하여 현실의 자아를 완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마땅히 존재하며 현실과 상호 양립한다. 간혹 SNS상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 간 괴리감을 느끼는 것은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여 본질에 도달해야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출 수 있다는 관념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다 이상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쉬운 SNS상의 자아를 현실의 자아가 따라잡을 수 없다는 무력감이다.


실존주의 철학에 따르면 이러한 생각은 간단히 반박된다. 어떤 본질을 추구하든 상관없이 가상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는 모두 ‘둘이 될 수 없는’ 나이며,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실존하는 주체로서 미디어의 파도에 잠식되지 않고 오히려 올라타 서로 대화하고 소통할 때 우리는 더욱 넓은 바다로 향해나간다.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가상 속 자아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 데서 오는 허무감을 우려할 수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본질을 초월하는 존재로서 느끼는 바로 그 허무감이 곧 진정한 자유가 찾아온 상태라고 주장한다. 무한히 복제되고 증식되는 자아를 절대적인 실존의 가치로 포괄하는 순간 우리는 더 강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에스파의 세계관이 구현하는 실존주의의 미학이며, 우리 앞에 펼쳐진 ‘다음 단계’의 미래이다.

 

 

참고자료


이장원, ‘뜨고 있는 ‘메타버스’…제대로 알아보자‘, M이코노미뉴스, 202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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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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