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시적 영화와 영화적 시가 지닌 무국적성 - 1편

영화와 시의 서사성 비교
글 입력 2021.07.0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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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영화적 서사를 역행하다


 

영화라는 집은 그것의 예술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수많은 이들의 분투를 벽돌 삼아 지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탄생은 새로운 예술 장르의 도래이기보다는 기술 혁신으로 인식되었다. 특정 시점의 재현 및 영구적 보존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밤을 낮으로 바꾼 전구의 발명과도 다를 바 없던 것이다.

 

그러던 영화가 그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은 건 ‘서사적 가능성’을 예견한 후부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통해 서사의 인과를, 또 그 사실성을 설득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매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상당 부분의 영화 역시 ‘서사의 사실적 구현’을 큰 목표로 제작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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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내러티브 영화를 제작한 감독, 알리스 기


 

개인적으로 영화 서사를 크게 두 갈래로 인식하는 버릇이 있다. 다소 아마추어식의 거친 분류이긴 하지만 밝히고 가고자 한다. 하나는 ‘할리우드식 서사’, 또 다른 하나는 ‘키노아이식 서사’라고 명명한다. 이 둘은 서술 방식에서의 차이를 보인다. 할리우드식 서사는 흔히 기승전결이라 일컫는 서사의 덩어리들을 정밀하게 끼워 맞춰 실제처럼 보이게 하는, 조금은 모순적인 종류의 사실성을 달성한다.

 

한편, 지가 베르토프의 용어를 빌린 키노아이식 서사는 현실 세계를 그대로 포착한 이미지들을 엮어낸, 일축하자면 인위성이 배제된 서사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사실성을 넘어 ‘실제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두 서사가 공통으로 방증하는 바이다. 관객인 우리에게 사실성이란 어떤 의미에서든 영화 작품의 가치 판단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의도적으로 역행하는 실험 영화들이 존재하는데, 이 중 하나가 바로 ‘시네포엠(Cine-Poem)’이다. 시네포엠이란 그 용어에서도 짐작 가능하듯 시나리오 형식의 영상 시, 혹은 영상으로 시적 감흥을 일으키는 작품의 묶음이다. 사실 면밀한 분류는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 공통된 장르적 특징이 적기 때문이다.


하나 분명한 점은 시를 담는 그릇으로써 영화를 선택한 경우라는 것이다. 이는 영화적 사실성을 거부하고, 시적 서사성을 가미한 과정이라 볼 수도 있겠다. 영화의 서사성에 공백을 뚫고 시의 서사성을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로서 촘촘히 채워 넣는 시네포엠 작업은  ̄비록 대중적이진 못하더라도 ̄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다. 그러나 의문은 여기서 발생한다. 개인적으로 올해 상반기에 시네포엠을 제작했는데, 내 작업 과정 전반을 괴롭혔던 문제이기도 하다. (이 글의 썸네일은 필자가 제작한 시네포엠의 스틸컷이다.)


영화적 서사와 시적 서사가 포개질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 내가 제작하고자 했던 것은 영화적 시인가, 아니면 시적 영화인가? 이들의 하릴없는 무국적성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앞서 영화 서사에 대해 개괄한 바와 같이 시적 서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또 이 둘을 적절히 비교 분석하는 과정이 절실해졌다.


정지돈 작가는 에세이집 <영화와 시>에서 ‘가장 영화적이지 않은 것은 서사가 없거나 픽션이 없는 게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중략) 가장 시적이지 않은 것은 감정이나 영원성의 결여가 아니라 수다스러운 것이다.’라고 서술했다. 스틸 컷이 주를 이루고, 내레이션과 텍스트, 기타 소란스러운 이미지들로 가득한 내 시네포임 작품을 떠올리면 영화와 시의 국경에 어중간하게 걸친 무국적자를 탄생시킨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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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시인의 3번째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강한 이미지성과 이로 인해 태동하는 서사적 힘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적 서사와 함께 비교군에 두기에 적절한 텍스트라 여겼고, 개인적으로 오랜 시간 마음에 품어온 시집이기도 하기에 대상으로 선정했다.

 

두 장르의 서사성을 분석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영화가 시적이다’라는 표현이 마냥 칭찬으로만 들리지 않게 된 나에게 꽤나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서사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영화와 시를 이해하고, 보다 더 나은 영화 작업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 싶다는 개인적 욕심도 작용한다.

 

 

 

시적 서사와 영화적 서사의 비교


 

심보선 시인은 <오늘은 잘 모르겠어>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시는 세련되고 그렇지 않고를 떠나, 또 모든 구별이나 위계를 떠나 ‘소리’라고 생각한다. 글로 쓰인 것이든 육성이든.’이라고 밝혔다. 그의 시는 종이 위에 납작하게 붙어 일방적으로 발화되지 않는다.

 

텍스트 자체로 울림을 지니게 된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볼록하게 솟아올라 마치 주파수처럼 우리의 일상을 맴돈다. 서사성이 응당 겸비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입체성’이라 생각한다. 그 누구의 서사도 납작하게 누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보선 작품의 서사성은 그 해석의 외연이 넓다. 이를 중심으로 세 파트를 구성해보았다. 서사적 공백, 서사적 인간들을 위한 의식, 이미지로서의 연출이 그것이다.

   

 

▶ 서사적 공백 채우기: 시 <형>과 영화 <라라랜드>를 바탕으로

 

시 <형>에서 ‘형’과 ‘나’를 서사적 인간으로, 하릴없는 여행자로 만드는 것은 바로 리듬 없이 흩뿌려진 일상이다. 별자리와 그에 얽힌 신화들을 한번 생각해보자.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별들을 이어내 형상을 만들고, 그 모양과 관련한 서사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별자리를 낭만화해왔다. 시 <형>이 지닌 서사성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그 몸짓을 불리고 있다. 리듬 없는 일상에 리듬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나와 형 사이의 빈 시간을 꾸역꾸역 채워간다.

 

 

형/ 심보선

 

형은 어쩌면 신부님이 됐을 거야.

오늘 어느 신부님을 만났는데 형 생각이 났어.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나한테 자율성이랑 타율성 외에도

신율성이라는 게 있다고 가르쳐줬어.

 

신의 계율에 따라 사는 거래.

 

나는 시율성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해줬어.

시의 운율에 따라 사는 거라고.

신부님이 내 말에 웃었어.

웃는 모습이 꼭 형 같았어.

 

형은 분명 선량한 사람이 됐을 거야.

나만큼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을 테고

나보다 어머니를 잘 위로해줬을 거야.

당연히 식구들 중에 맨 마지막으로 잠들었겠지.

문들을 다 닫고.

 

불들을 다 끄고.

(후략)

 

 

먼저 화자와 형 사이에 존재하는 ‘함께 하지 않았던 시간’을 ‘서사적 공백’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시 <형>은 이 서사적 공백을 채우는 과정으로 발화된다. 말하자면 별자리 신화를 키워가는 것처럼, 일상 속 연결고리를 찾아 잇고 이를 통해 공백을 채운다. 화자는 현재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시를 쓰고 있’는 상태이다. ‘시’는 여기서 하나의 일상이자 별이다. 화자는 시를 쓰는 자신의 처지가 ‘형’보다 덜 슬픈 상태이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형에 대한 사유를 이어간다.

 

읽는 책, 방문하는 장소, 만나는 사람들, 사랑의 감정 등 모두가 화자의 서사를 형에게로 수렴시키는 일상의 별들이다. 이것을 하나씩 이어간 화자가 결국 만들어낸 신화는 ‘형에 대한 서사적 가능성’으로 형상화된다. 어떤 별을 어떤 순서로 잇느냐에 따라 형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다. 웃음이 다정한 신부가, 식구들을 단단히 받치는 선량한 사람이, 감옥에 갇힌 죄인이 되기도 하는 형의 서사적 가능성은 시 전반으로 뻗어 나간다.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었던 대상인 형이 부재한 자리에 ‘시’가 들어섰다. 이제는 화자와 시 사이의 새로운 서사가 형성되고 있다. 형과 ‘나’의 서사가 그랬던 것처럼, 이 관계 역시 언젠가는 거대한 공백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쉽사리 ‘수두룩했던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을 결국 하나도 물어보지 못하는 것이다. 미리 그 공백을 예견하는 꼴이 될까 봐, 지금 착실히 쌓여가는 서사에 구태여 금을 긋고 싶지 않은 화자는 돌이킬 수 없는 공백이 난 뒤에야 텅 빈 질문들로 이를 채워간다. 시 <형>에 수많은 물음표가 등장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없었던’. ‘태어나도 죽지도 않았던’ 형의 존재를 (혹은 부재를) 인식할 때쯤에 그 가능성들은 완전히 절멸하고 만다. 마치 별의 죽음처럼 소란하고 또 처절하다.


‘서사적 공백’을 채우는 독특한 방식으로 주목받은 영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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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라랜드>의 스틸컷

 

 

영화 <라라랜드>는 해피엔딩이라고도, 그렇다고 새드 엔딩이라고도 일축할 수 없는 독특한 결말 연출로 높은 평가를 얻은 작품이다. 남녀 주인공은 모두 꿈을 이뤄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관계 면에서는 그러하지 못하다. 이에 따라 영화의 절정 부분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지켜나갔다면 벌어졌을 서사적 가능성들이 환상적인 세트와 미장센을 통해 펼쳐진다. 시 <형>과 유사하게 서사적 공백을 헛채우는 가능성 나열의 영화적 표현인 것이다. <라라랜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누군가의 서사를 망실한 대가로 또 다른 존재와의 서사를 쌓아갈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 서사적 공백은 또 다른 서사로 채워진다.


시 <형>에서 형과 나 사이의 서사가 죽고, 그 사이를 파고들어 잉태된 것이 시와 나의 서사인 것처럼 말이다. 서사는 끊임없이 중첩되고 또 삭제되며 이것은 모여 생활이, 또 삶이 된다. 서사적 인간들의 방황은 하릴없고, 공백은 거대하며 우리보다 평생 ‘두 살 더 늙을’ 것이 분명한 거대한 ‘형’은 그 어떤 서사적 방향성도 제시해주지 않는다. 서사는 마치 물처럼, 그저 끊기거나 흐르는 속성뿐이다.

 

 

- 이후 분석 파트는 2편에서 이어집니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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