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찬란하고 처연한 어느가족 이야기 [영화]

글 입력 2021.06.22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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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가 시작된지 100주년이 되는 2019년 5월의 어느 봄날,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칸 국제영화제 최고 권위의 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을 기점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4개 부문의 수상을 거머쥐었다.  그로부터 1년 전, 2018년 제71회 칸 국제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은 일본의 시대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감독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연속되는 해에 일본과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의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는 점과 '기생충'과 '어느 가족' 모두 한국과 일본이라는 사뭇 닮은 두 사회의 소외 가족(소외계층)을 주제로 선정했다는 점에서 서로가 서로의 비교대상이 되기 충분했다.

 

두 감독 모두 각자의 개성이 독특한 덕에 두 영화의 연출 스타일과 내러티브는 꽤나 다르지만 서로의 영화를 비교하면서 본다면 의외의 재미를 발견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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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을 일상으로 하며 사는 가족이 있다, 오사무(릴리 프랭키)는 아들 쇼타(죠 카이리)와 함께 마트에서 먹거리와 생필품을 훔쳐 집으로 돌아온다. 오사무와 쇼타는 샴푸를 가져오는 것을 까먹었지만 이들이 가져온 음식으로 아내 노부요(안도 사쿠라)와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 하츠에의 손녀 뻘인 아키(마츠오카 마유)는 누구보다 배부르게 다양한 음식을 먹는다. 이들은 가족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혈연관계가 아닐뿐더러 법적으로도 이들이 사는 집은 할머니 하츠에 혼자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위장'가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위장'이라는 단어 뒤에는 '위장결혼', '위장전입' 등 특정한 목적을 위한 불법적 행위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 가족에게는 그런 비도덕적인 목표 따윈 없다. 어떤 모습으로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뿐이다. 더하여 이들은 영화에 나오는 어떤 가족보다도 가장 가족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행복하고 따뜻해 보인다는 말이다. 비록 혈연을 매개로 한 가족 관계는 아니지만 이들의 마음과 마음은 하나로 이어져있어 보인다.

 

오사무는 가정불화와 가정폭력에 갇혀 지내던 유리(사사키 미유)를 길거리에서 데려온다. 이렇게 다섯 명의 가족에 '막내딸' 유리가 더해져 6명이 가족을 이룬다. 오사무는 건설 현장에서, 노부요는 공장식 세탁소에서 일하는 일용직의 신세다. 힘들어 주저앉고 싶은 삶일 수도 있겠다만 이들은 다른 누구보다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부조화가 만들어내는 조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오사무가 다리를 다치면서, 노부요는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되면서 이들의 생계는 이전보다 더 불안정해진다. 그런 가족에게 할머니 하츠에까지 타계한다. 그럼으로써 가족이 할머니에게, 그리고 할머니가 죽은 남편에게 하던 기생 관계는 숙주의 죽음으로써 끊어지게 된다. 가족의 해체를 직감해서일까, 쇼타는 마트에서 도둑질을 하다 일부러 걸리고 도망가던 중 다리가 부러진다. 그를 버리고 야반도주를 하려던 '어느 가족'은 경찰에게 발각되고 이들은 모두 각자가 돌아가야 하는, 사회가 규정해 놓은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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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어느 가족'은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개인들이 모인 가족이라고 생각된다. 국가도, 법도, 그리고 가족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사회의 최하층에 있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도둑질, 그리고 같은 처지의 사람을 가족으로 연결 짓는 일뿐이었다. 이들은 '잘' 살아가고 있었다. 날갯짓은 못하지만 꿈틀꿈틀 힘겹게 나아가고 있는 애벌래 같은 가족이었다. 이 가족을 해체시킨 것은 결국 머무를 자리 하나 주지 않았던 사회이다. "너네는 불행해, 그니까 이렇게 살아가야 해" 하고 정의 내려 버렸다. 사회로부터 버려져 상처받은 개인을 사회는 다시 상처받게 했다.

 

어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다. 아물지 않는 상처는 상처 입은 다른 누군가가 보듬어주어야만 한다. 흉이 남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듬어야 덜 아플 수 있고 아물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유리와 노부요가 서로의 팔에 있는 긴 화상 자국을 어루만져 주는 샷은 서로가 서로를 치유해주며 괜찮다고, 이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말도 별로 없는 어린 유리의 따스한 손길에 노부요의 상처가 조금은 아물지 않았을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은 잔잔하면서도 묵직하다. 특별한 기교를 넣지 않지만 전혀 본 적이 없는 유형의 내러티브를 탄탄히 갖춘 영화다. 그의 작품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지만 속이 아리다. 속이 왜 아파왔는지 알기 위해 엔딩 크레디트가 내려가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긴다. 영화 '어느 가족'은 가족의 형태와 행복, 그리고 삶에 대한 고찰을 하게 만드는 담백한 영화다.

 

 

[박도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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