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 그 자체, 피카소 [전시]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2021.05.01.~08.29)
글 입력 2021.05.1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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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너머의 것을 꿰뚫는 사람,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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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

 

이 구절은 20세기를 대표했던 화가 피카소가 한 말이다. 여러 시점에서 본 다양한 모습을 하나의 화면에 나타낸 입체주의 화가였기에, 남길 수 있었던 어록이다. 그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술만이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화가였고, 그의 명성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시쳇말로 “OO 이 OO 했다.”라는 말도 있듯이, 피카소는 피카소 자체의 장르를 만들었다. 그리고 현재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는 이러한 피카소의 작품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은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소장품을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총 6개의 연대기적 테마로 구성되어 있어 입체주의를 예고한 작품부터 피카소의 사고가 깃든 작품까지, 그의 넓은 작품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본 글에서는 테마의 순서대로 피카소의 작품을 언급하되, 피카소라는 사람에 대해 더 집중하여 서술하였다.


피카소는 청색시대, 장밋빛 시대에서 나아가 입체주의의 기원이었고 나아가 미래주의, 신조형주의 등의 새로운 미술 양식에 영향을 주었다. 우선 입체주의는 1900년 당시 프로이트의 주장이나 아이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등장하면서, 절대적인 관점에 대한 비판이 기여되어 만들어졌다. 즉  고정된 시각은 없다는 사상이 입체파 형성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새로운 정의를 만드는 사람,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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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년

ⓒ 뉴욕 현대미술관

 

 

피카소의 첫 번째 작품 세계인 ‘청색시대’의 작품을 보면, 유난히 파랗고 암울한 주제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1901년부터 1904년으로,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많이 담았다. 이는 당시 스페인의 세기말적 암울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 ‘장밋빛 시대’의 작품은 부드럽고 붉은 색채를 띤 것이 특징이다. 연인 페르낭도 올리비에와의 만남이 이 시대의 요인이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초기 입체주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다. 현대 미술의 시작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 작품은 마치 종이로 접으면 입체적으로 되살아날 것 같다. 인체의 정형적인 골격을 자연스럽게 그리지 않아 당시에도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대중에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 애초 그의 목적이었는데, 그의 생각은 아래 구절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는 진부한 생각과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정의에 매몰되어 예술가의 역할이 새로운 생각과 정의를 만드는 것임을 언제나 망각한다.”


계속해서 새로움을 찾아 진보하고자 했던 피카소는 1910년 작은 기하학적 도형으로 '분석적 입체주의'를 향해 나아갔고, 1912년부터는 종합적 입체주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입체주의에 영향을 끼쳤던 브라크와 피카소는 당시 파피에 콜레와 콜라주로 작품을 제작했다. 지금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기타와 배스병>은 전통적인 조각 등을 조합해서 제작되었다. 당시 비평가 기욤 아폴리네르는 잡지 <파리의 저녁들>에서 "현대 조각사에 한 획을 그은 걸작"이라고도 평했다. 이 평론처럼, 그의 작품들은 ‘피카소’라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사랑’만 하던 사람, 예술가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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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평생동안 나는 사랑만 했다. 사랑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 피카소는 정말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성을 향한 사랑을 넘어 동물에 대한 사랑도 많았고, 대중적 사랑도 중요하게 여겼다. 3~5번째 테마까지는 특히 그러한 측면이 엿보인다.


이와 관련해 그는 여성편력이 심하던 사람이었다. 앞서 언급한 장밋빛 시대의 영향을 준 페르낭도 올라비에와 헤어진 이후 친구의 약혼녀인 에바 구엘을 만났고 무용수 올가 코클로바, 마리 테레즈, 도라 마르 등 이 이상의 연인들을 만났다. 심지어 헤어진 연인들이 슬퍼하는 모습까지 그림으로 그렸는데, 연인의 입장에서는 참 잔혹한 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매력이 아주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전시 작품 중인 <시계를 찬 여인> 역시 마리 테레즈인데 도라마르의 등장으로 이별을 맞으면서 처량한 모습이다.


피카소는 대중의 삶에 밀접한 도자기도 만들었다. “도자기는 조각도 아니고 회화도 아니지만, 조각인 동시에 회화이기도 하면서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림은 보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그가 말했듯이 대중의 시선에서 가까운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1947년부터 피카소는 도자기 작업을 했으며, “고대 그리스의 풍경이나 신화 속의 장면”을 연달아 그렸다고 한다.


<풍경, 부부, 여인과 원숭이 : 세 개의 원형 장식이 있는 술병>을 보면 가족이나 동물이 있는 평화로운 풍경을 작품의 배경으로 하길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올빼미를 대상으로 한 재미있는 도자기의 형태를 만들거나 염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빚어낸 동상에서, 동물에 대한 사랑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동물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강했던 그는 나이가 들어 성찰적인 작품도 제작했다. 현재 예술의전당에서 감상할 수 있는 <그림자> 작품을 통해 그의 회고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이 제작되었던 해, 1953년에는 프랑수아즈 질로와 그의 두 자녀가 피카소를 떠나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하며, 여러 사각형 안에 자신의 추억을 담았다.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으로 보이는 여자가 누워있고, 겹쳐져 있는 틈 속에는 색깔을 미묘하게 달리하여 독특한 그림을 완성했다. 그림자는 검게 처리하여 그 장면 속에서 회상하는 자신의 모습을 잘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을 보며 결국 삶이란 다각적으로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순서대로 흘러온 삶의 장면들이 테이프처럼 돌돌 말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조각이 모여 입체적인 다면체 하나가 ‘삶’ 같았다. 당시를 회상하는 그림 속 그림자는 다른 시공간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피카소처럼도 느껴진다. 그렇게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회화적으로 얇은 표현 같지만, 다방면의 입체였고 가벼움 속에서 무거움을 드러냈다.

 

 

 

예술의 존재 이유를 확립한 사람,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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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년

ⓒ 파리 피카소 미술관

 

 

전시의 다섯 번째 테마에서 <한국에서의 학살> 작품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1951년 완성되었으며, <게르니카>, <시체 구덩이>와 함께 피카소의 3대 반전 작품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작품은 이분법적 구도로 총을 겨누고 있는 학살자 그룹과 죽음을 맞이하게 된 피해자 그룹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러한 구도는 피카소가 존경하던 프란시스코 고야와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산 너머에는 다른 학살이 일어나듯 보이고, 피해자들은 공포에 질려 있다. 어머니는 아이를 감싸 안고 있고, 배가 불러온 임산부는 아예 눈을 감은 채 체념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만이 바닥에 앉아 꽃을 바라보며 놀고 있다. 그리고 한 소녀는 화면 밖 감상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마치 앞에 있는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듯이.


이 작품은 사진처럼 겁에 질린 사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았지만, 응시하는 눈동자, 종이처럼 구겨진 여성의 고통스러운 얼굴은 감정이 전달될 만큼 세심하게 그려졌다. 반면 총구를 내미는 학살자들은 인간처럼 보이기보다 로봇처럼 보인다. 그들의 눈은 살아 있는 사람의 눈 같지 않으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제목 외에 ’한국‘의 요소를 굳이 찾을 수 없으며 구체적인 사건은 알 수 없는데, 이것이 피카소의 의도였다고 한다. 전쟁은 특정 인종이나 국가를 떠나, 참혹한 사건이며 그 속에서 무고한 죽음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애적 가치를 중요시한 피카소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림이란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전쟁도구이다.”

 

전시장에 적힌 이 문구를 바라보며, 예술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피카소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 예술의 가치를 발견했고, 이를 자신만의 그림으로 나타냈다. 지금도 예술은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물론 오답은 아니지만,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


동굴에서 살던 초기 인류도 그림을 그렸으며, 전쟁 중에서도 힘을 내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으니, 인류의 역사에 있어 예술은 영혼적 기반이었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존재적 가치를 잃지 않기 위해 예술을 향유했고, 그것이 동물과 다른 사람의 차이였다. 따라서 피카소에게 있어 예술은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전쟁도구“일 수 있었던 것이다. 추락하는 인간의 도덕성 틈에서, ’나‘자신을 지키고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힘, 그것이 예술이 가진 사회적 가치였다.


피카소는 회화를 아울러 조각, 판화, 도자기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전개했고 대중에게 가까운 예술을 펼쳤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의 삶엔 사랑이 많았고, <입체주의>라는 새로운 정의를 탄생시켰다. 전시를 통해 그의 세계에 빠져들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친다.

 

 

* 참고 자료

- 전시 오디오 서비스 [가이드온]

- 전시 도록 및 월텍스트

 

 

[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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