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실 결제 금액 720원

싼값에 추억을 샀다
글 입력 2021.05.1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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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 당시 정가 8,000원, 중고가 3,800원. 적립금 제외 최종 결제금액 720원.

 

싼값에 추억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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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입학 직후, 음악 취향이 비슷해서 친해진 친구와 어쩌다 보니 책 구경을 하러 손 붙잡고 교보문고에 드나들게 되었다. 집 가는 방향이 같아서 하굣길에 서로 읽었던 책을 이야기하는 날도 있었고, 때로는 재밌게 읽은 책을 추천하거나 빌려주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 친구가 주말에 아빠와 서점에 갔다가 본 책을 이야기해줬는데 특이한 설정이 재밌어서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도서관에서 ‘그 책’을 읽었다. 그때가 우리 나이 열다섯. 이제는 기억도 흐린, 오래되어가는 이야기.


고등학생이 된 나는 공부하겠다고 도서관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책을 읽었다. 남들은 책을 읽으면 이해력이 좋아져서 공부를 잘한다는데, 나는 확고한 취향을 자랑하면서 책을 읽어서 그런지 시험에 필요한 능력을 기르지 못했다. 몰래 대출해 온 소설을 엄마에게 들켰고, 결국 책은 나중에 읽고 공부부터 하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블로그에 일기로 남겼더니 나의 좋은 이웃이 ‘책은 읽어야 할 때, 그때만의 감성이 있다’고 하면서 읽고 싶은 책을 읽으라고 했다. 그 결과 19살의 여름, 나는 저 이웃에게서 위에서 언급한 ‘그 책’의 저자가 쓴 다른 작품의 원서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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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얼마 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 예전엔 교보문고를 가겠다고 집을 나섰는데, 이젠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 지하철역의 중고서점에 들른다. 책이 목적이었던 10대에서 나태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책을 읽는 어른이 되고 말았다.


서점에서 유일하게 그나마 아는 척할 수 있는 한국문학을 구경하다가 옆쪽의 일본 문학을 흘긋 보는데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책’이 꽂혀있었다. 요즘 나온 소설은 중고가가 만원을 넘는다고 비싸다는 얘기는데, 그 책의 정가는 8,000원이었고 중고가는 3,800원이었다. 책이 세월을 맞은 탓인지, 너무나도 부담 없는 금액에 웃음이 나왔다.


그때는 광화문역에 ‘책은 서점에서 읽고 구매는 인터넷 서점에서 사라’는 광고가 붙어있었다. 무겁게 들고 다니지 말고 집에서 편하게 오늘 주문해서 내일 받으라고 광고하던 시절.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전이라 동네 서점에서 10% 할인과 10% 적립으로 책을 싸게 구할 수 있어서 나는 인터넷 서점의 메리트를 느끼지 못했다. 구하는 책이 서점에 없어도 사장님께 부탁하면 며칠 만에 들어왔으니 늘 가는 곳에 적립금 쌓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동네서점 대신 인터넷 서점 앱에 들어가서 온갖 적립금을 모아 열심히 책을 사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만화 코너에서 그 시절 읽었던 출판 만화를 구경하고, 우리 세대의 것인 듯 아닌듯한 웹툰 단행본을 보고, 우리가 어릴 적 봤던 전집은 없는 동화책 코너를 기웃거렸다. 그리고 서점에서 나올 때 내 손에는 ‘그 책’이 들려있었다. 서점 앱에서 모은 적립금 제외한 최종 결제 금액 720원. 음료 한 캔 가격에 추억을 샀다.


책장에 오래된 책 한 권이 늘었을 뿐인데, 내 안의 많은 추억이 너울거렸다. 그 시절의 감성, 습관, 추억, 그리고 사람. 책을 펼치면 그때 그 감성이 나오지 않을까 봐 한동안 책상에 올려놓고 고민했다.


도서관은 몇 번의 리모델링을 거쳐 환하고 편리해졌지만, 나는 종이 회원증을 들고 나무 책장에서 책을 꺼내 커다란 나무 책상과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던 때가 더 좋았다. 서고의 낮은 책장에서 낡은 책을 구경하다가, 서고가 더는 개방되지 않아서 사서에게 부탁해서 책을 대출하다가, 이제는 도서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책들이 생겼는데 그렇게 나에게 익숙했던 것들이 과거가 되고 남들은 모르는 이야기가 되는 동안 나도 많이 변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아직도 머릿속에 그 책의 구절이 흐르는데 다시 읽으면 모르는 내용이 튀어나와 낯설까 봐. 추억으로 남겨둬야 하나, 추억 전시품으로 두어야 하나, 여전히 내 것인지 확인해야 하나 고민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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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이야기했던 그 친구와 함께 도서관에 갔다. 이제는 옛날 낡은 나무 책장이 있던 시절의 도서관 구조가 가물가물해졌고, 내 몸은 지금의 도서관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원하는 책이 어디에 있는지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도 잘 찾는다. 그래도 추억이 궁금해서 일본 문학 코너를 기웃거렸다. 일본 문학 833.6.ㅇ454 구역에는 내 추억과 현재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큰맘 먹고 책을 펼쳤다. 내 기억에는 책을 한 번 읽었던 거 같은데 그게 아니었는지, 내가 그 책을 정말 좋아해서 그런 건지 아는 문장들이 줄줄 이어졌다. 여전히 책의 내용은 내 것이었다. 읽지 않은 문장들을 기대하며 허겁지겁 읽었던 처음의 감상은 당연히 없지만, 내가 아는 내용과 내게 익숙한 감성이 그대로 있었다. 오랜 시간을 돌아, 짧은 고민을 거쳐 내 것을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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