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주어진 일을 해낸다는 것

평범한 일상 살기
글 입력 2021.05.09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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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데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내 방의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일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전리품마냥 꽂아놓은 책장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을 때가 있다.


나만이 겪는 순간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다들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건 24시간이라는 시간뿐인데 (지금은 ‘코로나’라는 범국가적인 팬데믹도 추가할 수 있겠다.) 그나마도 어떻게 구성하느냐는 개인의 몫이다. 겪어보지 않은 일은 이해할 수 없고, 내가 겪어본 사건이라 하더라도 나의 삶과 다른 이의 삶에 미치는 파장은 다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삶이란 외로움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를 살아간다.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며 잠에 들고,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뜨고 일어난다. 잠에서 깬 뒤의 시간을 어떻게 꾸려나가는지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가령 나처럼 중간고사가 끝난 대학생, 그것도 수업 전부가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경우에는 아주 느긋하고 한가하다. 원한다면 새벽까지 휴대폰을 할 수도 있고, 알람도 없이 해가 어디까지 떠오르든 푹 잘 수도 있다. 일어난 뒤에는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으며, 고작 일어났을 뿐인데 몇 시간 남지 않았음을 계산하며 오늘 할 일은 뭐가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스불재’라는 말이 있다. 인터넷에서 소소하게 유행하는 준말인데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라는 노래 가사를 줄인 것이다. (노래의 제목은 ‘Lazenca, Save us’다. 넥스트 원곡으로 하현우(국가스텐)가 복면가왕에서 부르며 다시금 유명해졌다.) 내게 주어진 대부분의 할 일들을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시간을 버리는 것을 사랑하는 동시에, 온갖 소소하고 귀찮은 일들을 벌리는 것을 좋아한다. 모순적인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는지 의아할 수 있겠지만 정답은 ‘그렇다’다. 내가 산 증인이니까.


침대에 반쯤 누운 채로 (삼각 쿠션을 침대와 벽 사이에 기댄 채 파고들면 반은 앉고 반은 누운, 흘러내린 자세가 된다.) 의미 없이 휴대폰을 만지며 새로고침을 하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다시 휴대폰을 만지다가 잠이 드는 것. 시간과 동떨어진 채 내키는 대로 혼자만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는 것은 매우 편안하고 안락한 동시에 사람을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정말 일이 한가하면 모를까, 스스로 만든 할 일은 죄책감처럼 사람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사실 할 일이라는 것도 별 게 아니다. 하루에 한두시간 정도의 수업, 하나를 마무리할 만하면 주어지는 과제, 바닥난 체력을 위한 운동, 스스로의 지적 허영심을 위한 독서, 스펙보다도 실력을 올려야하는 영어,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 정도가 고작이다.


거기에 스불재를 더하자면, ‘다꾸(다이어리 꾸미기의 준말로, 스티커나 마스킹테이프 따위를 이용해 다이어리를 꾸미는 것을 뜻한다.)’를 위해 잔뜩 사 둔 스티커를 정리해야하고, 공연을 보고 난 후기를-여섯 개 정도 밀려있다.- 작성해야 한다.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 산 포토프린터에 뽑을 사진을 정리하고 인쇄해야하고,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해서 엄마에게 받은 책도 읽고 정리해야한다. 아직 겨울옷이 자리하고 있는 옷장도 계절에 맞춰 정리해야하고, 마우스 패드도 찾아봐야 한다.

 

가볍게 걸칠 외투도 사야하고, 한 달 정도 전부터 동생과 함께 사기로 했던 텀블러가 적당한 게 있는지도 검색해보고 구매해야 한다. 일 년이 다 되가는 미용실도 가야하고, 요새 은근히 저릿하게 울리는 이가 걱정돼 치과도 가봐야 한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서 구매한 뮤지컬 DVD도 한 번은 봐야하고, 매 달 돈만 내고 있는 넷플릭스와 왓챠에서도 어떤 영상을 봐야한다.


이렇듯 나의 to do list는 -해야 한다, 체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들은 어느새 해야 하는 의무가 되어있고, 나는 점차 그것을 견디기가 버겁다. 과제가 아니라서 당장의 마감기한이 없는 할 일들은 차일피일 미뤄지기 마련이고, 나는 또다시 침대와 휴대폰으로 도피한다. 차라리 하지 않겠다고 포기하면 모를까, 결국 내가 전부 해야 하는 일들이기 때문에 외면하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무겁다. 거기에다 남들은 훨씬 힘든 일상을 살고 있는데, 나는 겨우 이것조차 버거워한다는 사실이 떠오르면 드는 자괴감은 덤이다.


어쨌든,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그것도 주어진 할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당연하고 일상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는 모든 일련의 활동들이 각자에게 무겁거나 버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우울은 수용성이란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물에 씻겨 내려가니 따뜻한 샤워가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나도 이제 힘내서 할 일을 해야겠다. 가득 찬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갈 때의 쾌감, 부지런하게 하루를 보냈을 때의 뿌듯함을 알고 있다.


할 일로 가득 찬 우리의 하루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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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우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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