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읽어주기와 교감, 책이라는 세계로 [영화]

영화 <책 읽어주는 여자>
글 입력 2021.04.2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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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eader lives a thousand lives before he dies. The man who never reads lives only one. - Jojen Reed, [Game of Thrones: A Dance with Dragons], George R.R. Martin

 

읽는 사람은 죽기 전에 천 번의 삶을 산다. 읽지 않는 사람은 오직 한 번 살뿐이다. - 조젠 리드, 조지 R.R. 마틴의 <왕좌의 게임: 드래곤과의 춤>

 

 

영화 <책 읽어주는 여자>는 ‘책 읽어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주인공 마리가 ‘일’하며 겪는 이야기들을 다룬다. 즉, 여러 사람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생겨나는 사건들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영화는 마리의 책 읽어주기라는 행위와 책 읽어주는 사람이라는 역할을 중심으로, '책 읽기'의 의미를 조명한다.

 

 

 

책이라는 세계, 책이라는 삶


 

인간은 끊임없이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느끼고,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애쓴다고 전부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결핍의 원인이 제각각인 데다가, 결핍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능력 밖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 결핍은 욕망으로 이어진다. 이 부족함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은 마음은 절대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욕망. 그 자체로 남게 된다. 또한, 결핍 때문에 하지 못 하는 일들에 대한 욕망은 늘 결핍 아래에 침전돼있다.

 

마리의 고객들은 ‘책 읽기’를 통해 그들이 가진 결핍을 채우려 한다.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경험을 경험하고, 욕망을 해소하며, 결핍이란 없는 또 다른 삶을 체험한다. ‘책’ 안에서.

 

책을 통해 여러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는 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관용구 같은 문장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간접’이라는 책 읽기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마리의 목소리를 통해, 책을 읽어주고 그것을 음성으로 듣는 과정을 통해, 책에서의 경험이 책 바깥의 실제 경험으로 전이된다.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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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는 ‘젊은 여성이 댁에서 책을 읽어드립니다’라는 신문 광고를 내게 된다. 이후 다섯 명의 사람에게 책을 읽어준다. 이들은 모두 신체적인 면이나 정신적인 면에서 ‘결핍’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결핍 때문에 이들의 비정상성이 두드러지지만, 관객들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평범한 인간의 일면을 발견한다. 다섯 명의 인물들은, 결핍 때문에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욕망을 마리로부터 해소한다.

 

마리는 책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더 정확히는 마리의 책 읽어주는 행위가 그렇다. 마리는 표면적으로 책 내용을 전달해주는 전달자로서, 이면적으로 두 개의 다른 인생을 매개하는 매개자로서, 욕망의 해소를 돕는 도우미다. 혼자 책을 읽을 때 분리된 형태로 받아들여야 했던 책의 세계와 실제 세계는, 마리로 인해서 하나의 세계가 된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에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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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가 처음 만나는 사람은 하반신 마비의 열다섯 살 에릭이다. 마리는 에릭에게 모파상의 『머리카락』을 읽어준다. 『머리카락』은 한 남자가 머리카락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으로 이 책에서 머리카락은 ‘성적인 것’의 상징물이다. 섬세하고 관능적인 묘사가 두드러지는 이 책을 읽어내는 마리의 목소리는, 혼자 집안에 박혀 ‘여성’이라고는 경험해 볼 수 없었던 사춘기 소년의 성적 호기심을 들춰낸다.

 

소년의 성적 욕망은 직접적인 성행위를 통한 육체적인 갈망보다는 ‘여성’이라는 성 자체에 대한 호기심에 가깝다. 이러한 욕망은 마리가 읽어주는 책의 내용, 마리라는 인물, 마리의 목소리가 겹쳐져 해소된다.

 

마리는 에릭 앞에서 드러난 허벅지를 애써 감추지 않거나 치마를 들쳐 속옷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이에 에릭은 “다음번엔 속옷을 입지 않고 올 수 있나요?”라고 말하며 더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후에 매혹적인 시구가 돋보이는 보들레르의 시를 읽으며 에릭은 여성이라는 존재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게 된다.

 

 

 

노부인


 

마리는 그다음으로 장군인 남편을 잃고 홀로 지내는 백작 부인에게 책을 읽어준다. 노부인은 레닌과 마르크스를 옹호하며, 전쟁과 혁명에 대한 젊은 시절의 이상과 열정을 아직 품고 있다. 노부인은 마르크스의 책에서 보석과 관련한 구절에 애착을 가지고 귀족적 생활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념에 매몰돼 과거에 갇혀 있는 노부인은 현재의 시간에 다가가지 못한 채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라는 위기에 놓여있다. 지난날의 삶을 욕망하지만,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은 그의 삶 전반에 깃든 결핍의 실체다. 그에게 마리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어준다.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그린 소설로 전쟁 상황의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마리는 책을 읽으면서, 현실의 삶을 경험하도록 돕는다. 또한, 마리는 레닌 서거일에 노부인과 함께 꽃을 뿌리고 시위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이는 어떤 이데올로기의 실현이라기보다 노부인의 이상을 지금 이 현실에 조금이나마 닿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광산 회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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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의 세 번째 고객은 오랜 시간 혼자 지내고 있는 광산 회사 사장이다. 사장은 일 중독이라 할 만큼 쉬는 날 없이 일한다. 교양을 쌓고 싶다는 이유로 책 읽기를 의뢰했지만 실제로는 마리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마리는 그에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읽어준다. 『연인』은 열다섯의 소녀와 삼십 대 남성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이다. 사장은 이 책을 마리의 목소리로 들으며 마리에 대한 욕구를 드러낸다. 

 

그의 성적인 욕망은 첫 번째 고객인 에릭의 그것과 달리, 직접적인 성행위를 통한 성적 쾌락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정상적인 성행위 불능으로, 섹스에 대해 어떠한 강박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코랄리


 

네 번째 고객은 바쁜 엄마 때문에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여섯 살의 코랄리이다. 마리는 코랄리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어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주인공 앨리스가 환상적인 곳들을 모험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마리는 앨리스의 세계를 들려주었고, 하루하루가 지루했던 어린 소녀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었다. 현실에서도 마음껏 뛰어놀고 싶어진 코랄리는 마리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간다. 언제나 시간이 없고, 언제나 놀아줄 수 없는 엄마의 자리를 마리가 대신한 것이다. 코랄리에게는 늘 엄마의 사랑이 부족했고, 마리가 그 자리를 채워주었다.

 

 

 

노판사


 

노판사는 마리의 마지막 고객이다. 그는 마리에게 마르키 드 사드의 『소돔의 120일』을 읽어달라고 요구하며 속물 같고 변태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책은 매우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가학성으로 금기시되었던 책으로, 그 수준이 너무 심각해 오늘날까지 악명이 높다. 마리는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자는 생각으로 꿋꿋이 읽어낸다.

 

후에 마리의 책 읽어주기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던 의사와 형사가 함께 등장해 책을 읽어달라고 요구한다. 이때 마리는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게 된다.

 

판사와 친구들은 개인이 가진 왜곡된 욕망의 바탕을 보여준다. 겉보기에 고상하고, 겉보기에 잘난, 평판에 치중된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이 자신들의 껍데기에 위배되는 금기 행위를 늘 품고 있으며, 이를 특정 상황에서 스스럼없이 깨뜨리려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책’이 남을 영화


 

<책 읽어주는 여자>는 아름답지 않다. 보고 나서 벅찬 감동이나 풍부한 만족을 얻기도 어렵다. 다섯 인물이 가진 결핍과 욕망의 속성을 놓고 보자면, 이게 최선이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남성 인물의 경우 그 서사가 에로티시즘에 치우쳐져 있고, 마리가 이들의 요구를 여러 방식으로 들어주며 주인공의 역할이 저평가되는 부분이 있는 데다, 굳이 이게 꼭? 싶은 장면도 있다.

 

다만 모파상의 책이 영화에 나온 만큼 모파상의 작품을 읽는 시선으로 이 영화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가능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편한 속내와 숨기고 싶은 본심 따위를 책이 주는 교감과 책이라는 작용으로 끌어내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앞서 언급한 성애가 내재된 욕망이라는 개념의 근간임을 고려하면, 그리고 노부인의 이념과 코랄리의 모성애도 본능의 측면에서 그 범주에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결국 이 영화는 인간이라는 개체의 한계와 욕망을 책이라는 세계에 접합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아무래도 이 영화는 책이 남을, 책을 남겨야 할 영화인 듯하다.

  

 

[송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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