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일이 궁금한 삶을 위하여 - 우투리: 가공할 만한

글 입력 2021.04.2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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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한 번쯤은 우투리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날개를 단 어린 아이가 영웅이 되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다. 권력자들 아래에서 근근히 생을 이어가는 힘든 시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영웅이라니. 얼마나 간절했을까. 누구라도 영웅을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굉장히 잔혹한 설화라고 생각했다. 모든 이의 간절한 소망을 등에 무겁게 지고 세상에 뛰어든 영웅의 삶은 누가 구원해줄까? 더군다나 우투리는 과업을 짊어지기에는 너무도 어린 아이였다. 아이에게 대체 누가 그 운명의 무게를 실어준 것인지. 태어날 때부터 피부 위로 솟아오른 날개는 우투리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운명이 원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투리에 대한 내용은 들을 때마다 불편했다. 어린 아이가 운명에 매여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영웅됨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창작집단 LAS의 손에서 새롭게 탄생한 우투리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연극 <우투리 : 가공할 만한>은 주체적인 영웅의 탄생을 그려낸다. 거대한 운명에 휩쓸린 미약한 개인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끝내 스스로 영웅이 되길 결심한 사람의 이야기다. 세계관과 인물 설정 방식에도 변주를 주었다. 기본적인 우투리 서사를 바탕으로 하되 계급이 분명한 가상의 산업화 시대를 배경으로 삼아 더욱 현실감 넘치는 영웅담을 들려준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로 계획한 점이 흥미롭다. 남성 위주의 영웅 설화를 여성을 중심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시각과 시대적 상징성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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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스토리텔링이 빚는 새로운 영웅담



주인공의 이름은 3(삼). 홀대받는 외곽 지역에서 태어났다. 중앙으로 갈수록 권력자들의 세상이며 주변부로 향할수록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빈민들의 터전이다. 3에게는 과감한 행동력과 용기, 그 무엇이든 단숨에 고쳐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3은 이 능력을 가지고 고향을 떠나 더 넓은 세상에서 활약하길 원했다. 제 어머니처럼 세탁소에서 쳇바퀴 굴리듯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심을 굳힌 3은 자신을 곁에서 묵묵히 지켜주는 약혼자 2를 남겨두고 고향을 떠난다.


기계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공장을 찾아 가까스로 일자리를 찾게 된 3은 정신 발작을 일으키는 4를 만난다. 모든 이들이 피하던 4였지만 3만은 그녀를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 친해진 그들은 공장의 부품을 훔치고 팔거나 새로운 물건을 제작하는 재미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행복한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날 갑작스레 검문이 시작된 것이다. 부품을 들킬지 몰라 긴장하고 있던 4는 발작을 일으킨다. 3은 그녀를 이해하며 변호했다. 그러나 3을 제외하고는 그 공간에 4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안죽어. 나는 안전해. 나는 괜찮아." 4는 온 몸이 뒤틀리는 발작이 시작될 때마다 자기 자신을 달래주던 주문을 또다시 중얼거렸다. 주문은 여느 때처럼 효과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발작이 멎는 것보다 군인의 총성이 들리는 것이 더 빨랐다. 3은 오열했다.


감옥에 갇힌 3은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입을 닫고 지낸다.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러던중 반란군의 리더 1의 이야기를 들은 3은 주저 없이 합류하게 된다. 이들은 은밀하게 반란을 준비해가는 동시에 전설 속 영웅 우투리를 찾아 승기를 끌어오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3은 각종 무기를 제작하는 핵심 인력이 되어 반란군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지만, 결국 정의 구현에 대한 가치관 차이로 뜻이 갈려 리더 1과 헤어지고 다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끝내 3은 등에 칼을 그어 날개 같은 흉터를 냈다. 그 스스로 영웅 우투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영웅이 될거야.

내가 하려는 일에 그 이름이 필요해.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간다. 우투리 설화를 새로운 세계관에서 변주해나가는데 그 흐름이 굉장히 짜임새 있다. 특히 박진감 있는 전개도 인상깊지만 역동적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속 각 캐릭터의 개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점에 눈여겨볼 만하다. 설화를 재해석하며 자칫 평면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캐릭터들에 각자의 서사와 개연성을 부여해 훌륭하게 입체화해냈다.

 

칼로 연필 깎는 것조차 무서워하던 2는 3의 부탁으로 제 손에 칼을 든 채 아내의 등에 날개를 새기는 역할을 맡게 되고, 4가 중얼거렸던 "나는 안죽어. 아무도 날 안 죽여. 나는 안전해. 괜찮아."라는 대사는 고통을 참으며 우투리로 거듭나기로 결심한 3의 중얼거림으로 치환된다. 대의를 위해 시민을 거리낌없이 희생하는 리더 1의 과거도 드라마틱하게 밝혀진다. 연극 초반 나타났던 억울한 시민들의 처형 장면, 그리고 처형당하는 가족을 향해 비명을 지르던 작은 꼬마가 바로 1이었던 것. 이처럼 각 캐릭터의 역사를 뚜렷이 드러내는 시나리오가 무대를 더욱 풍부하게 이끌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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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부수는 구성


 

극중 인물에게는 구체적인 이름이 없다. 단순히 숫자를 부여받았을 뿐이다. 막이 오를 무렵 인물들이 얘기했다. 숫자로 지어진 이 이름에 별 뜻은 없으니 엄청난 의미 부여를 하지 말라고. 흥미롭게도 그 한 마디 자체에 의미와 상징이 발화했다. 불특정다수를 지칭하는 평범한 숫자의 이름은 누구든지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은지. 제 손으로 등에 피로 물든 날개를 새겨 영웅이 된 3에 어쩌면 자신을 투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1, 2, 3, 4, 5. 평범한 숫자를 이름으로 단 인물들이 이야기를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3을 주인공으로 분명한 중심축을 두고 전개되지만, 상황을 설명하는 나레이션이 동반돼 무대 외부의 목소리가 흐름을 이끌고간다. 인물들이 모호한 숫자를 이름 삼았기 때문인지 배우들이 무대 안팎으로 오가는 모습을 한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점이 재미있다. 우투리의 설화적 속성을 재치 있게 풀어낸 것으로 느껴졌다.

 

더욱이 극중 인물이 번갈아가며 극을 설명해가지만 우투리를 맡은 3은 무대 밖을 나서는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3에게 오롯이 몰입하며, 이야기에서 한 발짝 떨어져 무대를 지켜볼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열린 결말을 부담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우투리가 치켜든 총구가 과연 권력자의 수뇌부를 향했을지, 오히려 반란군의 리더를 향했을지, 어쩌면 빗나가버렸을지 짐작할 수 없는 엔딩이었으나 갑작스러운 마무리임에도 의외로 무덤덤했다. 이야기를 지켜보는 관객 모두는 멀리서 들려주는 우투리 설화를 경청하고 있을 뿐으므로. 동시에 극을 화자를 건너 전해지는 설화처럼 연출하면서도, 현실로 받아들일만큼 생생한 상황을 눈 앞에서 펼쳐 허구와 현실을 오가는 아이러니한 감각이 더욱 깊게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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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영웅이 될 수 있다



연극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뒤엎는다. 3의 성향부터 그렇다. 3은 옷감을 다리거나 바느질을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온 몸에 검댕을 묻혀 가면서도 기계를 고치거나 만드는 일이 취미이자 특기였다. 이후 이야기에서도 3은 무기를 개발하고 각종 총기를 다루며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모습을 보인다.

 

3의 남편인 2 역시 기존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한 인물이다. 빵집 주인이 된 그는 새로운 일을 배우기 위해, 반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떠나는 3을 위해 빵을 구워준다. 특정한 활동을 부각하지 않는다. 묵묵히 집을 떠나간 2를 믿으며 기다려준다. 이처럼 기존의 성 역할을 탈피한 설정을 보여줘 관람객의 사고에도 자유를 부여한다. 이와 함께 여자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공장장의 태도나 여자가 복잡한 기계를 해체할거라곤 생각하지 못할거라는 대사 등 성 역할에 대한 일상적 고정관념을 드러내 현 세태를 한번 더 곱씹게 했다.


*


이 극에서 우투리는 여성이다. 성에 대한 의식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 최근에야 다양한 서사가 등장하는 중이지만 그 이전 시대에서 영웅이란 남성에게 부여되는 지위에 가까웠다. 여성 영웅도 있었으나 여성은 가정, 남성은 사회로 활동하는 분야갸 명백히 분리된 상태였기 때문에 굉장히 평면적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던 얌전하고 순종적인 이미지 아래, 수동적이지만 착한 성격을 지녔거나 모성이나 효녀, 열녀의 속성을 강화하는 것이 여성의 영웅상이었던 것이다.


이제 시대는 변화했다. 여자든 남자든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무엇이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현대 사회다. 그러나 아직도 옛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은 그 지위가 무척 낮고 소극적인 존재이며, 남성 위주의 영웅 서사가 중심을 이룬다. 이미 지나간 역사와 옛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과거가 현재의 우리의 사고방식을 얽매지 않으려면 해석의 가능성 정도는 열어 두어야 한다. 여성에 대한 얘기만 꺼내면 왜 이렇게 불편한게 많냐 페미니스트냐며 몰아세우는 시대지만, 아이들이 환호하는 히어로물 사이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얼마나 드문지에 대해서는 모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한 실험에서 참가자들에게 '여자처럼 달려보라'고 했을 때, 성인은 팔을 양 옆에 붙이고 폴짝 폴짝 뛰었지만 여자 아이들은 오히려 '여자처럼'이 무엇이냐는 둥 제멋대로 팔과 다리를 휘두르며 힘차게 달려나갔다. 여성성은 학습된다. 그렇기에 사회적 여성성에 얽매이지 않은, 그저 한 사람으로서 여성이 이끌어가는 이야기, 그리고 주인공으로서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여성의 이야기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현대의 새로운 시나리오뿐 아니라 보편적으로 알려진 플롯까지도 여성을 중심으로 재해석하는 시도가 이어지는 이유다. 계속해서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해야 한다. 최소한 '여자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문장이 너무도 당연한 말로 느껴질 때까지.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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