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작가와 작품은 분리되어야 하는가? [문화 전반]

문학도의 성역
글 입력 2021.04.0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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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의 성역


 

드디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을 침범해보고자 한다.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가슴 속에 늘 품고 있었지만 차마 풀어놓지 못한 고뇌를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예민한 주제라는 것을 인정한다. 나조차도 항상 문학과 관련된 과에 재학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도 늘 고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주제를 문학도가 아니면 누가 감히 분석하겠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말을 붙이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작품 뒤에 존재하는 비극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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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을 편찬하여 근대 교육의 지평을 열고, 작품 속 소년에게 우리는 교육을 통해 행복해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루소는 자식을 보육원에 내다 버린 무책임한 아버지였다. 일부일처제라는 부르주아 미덕 하에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던 <자본론>의 저자 마르크스는 불륜을 통해 낳은 사생아를 평생 감추었다.

 

모순적인 일이다. 한 개인으로서 그들이 저지른 행위는 현재를 넘어 과거의 도덕관에 빗대어 보아도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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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작품으로서 <에밀>과 <자본론>은 각 분야의 정석이라 불리며 오랜 시간 수많은 이들에 의해 읽히고 분석되어 왔다. 작품 뒤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을 '보이콧'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과연 작가와 작품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는 것일까?

 

2017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특정 시인의 성 추문 사건은 문학계를 넘어 교육계까지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 이유는 그의 작품들이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아왔고, 몇몇 시는 학생들의 대표적인 교육 매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시인은 패소하였고, 그의 작품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루소에게 관대했던 사람들은 그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러면 또다시 의문이 든다. 작가와 작품은 분리되어야 하는가? 흑백 논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난제에 대해 나는 '작가와 작품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지만, 문학을 향유하는 독자에게는 자의성이 요구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문학의 영역과 사회 및 도덕적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위한 말과 언어의 책임


 

완벽한 사람은 없다. 작가 또한 그렇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조금이라도 있는 작가의 작품들을 모두 금지한다면 사실 세상에 향유할 수 있는 문학은 더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요구되는 가치는 '보편성'이 아닌 '다양성'이다. 문학은 겪어보지 못한 타인의 삶과 그 안에 내재된 가치를 전달하는 매개체이며 이를 위해 수많은 인간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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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그들은 '과거의 도덕관이 현재와 변했다', '나는 그것이 범죄인지 몰랐다'라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모범적일 의무가 있고 나랏일을 하는 정치인은 청렴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문학을 다루는 작가는 자신의 말과 언어의 무게에 대한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최소한 피해자가 존재한다면 더욱 그렇다'.

 

 

 

세계를 아우르는 눈, 문학


 

왜 문학은 인류의 자산이라 불리는가? 오늘날 독서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문학은 개개인을 대신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더 넓은 시각을 제공한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통해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은 1940년대 도시 빈민층의 고난과 아픔에 공감한다. 그리고 단순 감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21세기로 시야를 넓혀 노동자, 장애인, 노인과 같은 소외 계층에 관심을 갖는다.


또한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남성들은 여성들의 삶을 이해하고 서로 배려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도가니'라는 소설은 장애인 성폭행이라는 외면받던 주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도가니법'이라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냈다.

 

 

 

문학과 사회란 불가분의 존재이다


 

이처럼 문학은 개인이 속한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는 무결점이나 완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문학을 통해 작가로서 본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에 떳떳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이유는, 글을 읽고 그 안에 담긴 것들을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자질을 함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서적인 풍요로움이 될 수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계몽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학이 한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체 일원이 갖추어야 할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였을 때, 하나의 '인격체'로서 작가가 사회적, 도덕적 가치를 위반할 시 작품의 의미가 변질될 수 있음은 당연하다.

 

 

 

작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의 아고라, 문학


 

그렇다면 ‘작가와 작품은 분리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결론은 무엇인가. 서론에서 언급하였듯이 이는 독자의 자의성을 요구한다.


작가는 문학을 통해 독자와 소통한다. 이들은 주입하는 사람과 주입을 받는 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방식으로는 구분될 수 없다. 양쪽 모두 미완성의 인간인 만큼 함께 반성하고 문학을 향유하며 그 의미를 찾아가야 한다. 따라서 스스로 문학 작품을 향유하거나 타인에게 문학에 대해 교육할 때에는 ‘어떤 점이 훌륭하고 어떤 점은 비판해 보아야 하는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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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작품이 작가와 관련된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에게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될 때, 그것을 교육 매체로 사용하는 것까지는 비난할 수 없지만, 반드시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러한 자세는 작가와 작품을 단지 '좋다 혹은 나쁘다'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바라보지 않음을 의미한다.

 

 

 

향유의 자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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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 내내 ‘자의성’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문학은 하나의 답이 정해진 학문이 아닌 인간의 정서적 산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객관적인 규칙을 확립해 보려고 해도 모든 개인이 살아온 삶의 배경과 가치관은 다르므로 이를 강요할 수도 없다.

 

따라서 어떤 점이 본인에게 인상 깊게 다가왔으며 어떤 점이 부족하게 느껴졌는지 타인과 함께 의논하고, 주체적으로 의미를 분석해 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미완성의 인간


 

모든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독자가 그러한 것처럼 작가 또한 그렇다. 따라서 문학은 이러한 미완성의 인간의 삶을 다루며 발전해 나간다.


결론적으로, ‘작가와 작품은 분리되어야 하는가?’라는 끊이지 않는 논제에 대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자의적인 기준을 공유하고 이해하는 것이 이 난제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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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향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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