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향수

글 입력 2021.04.0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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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좋은 스펙 한 줄이 될 만한 단기 아르바이트를 우연한 기회로 얻게 되었다. 첫날은 오리엔테이션인지라 10분 일찍 와야 했지만 제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상황이었다. 초조하게 시계만 쳐다보던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낯선 동네, 위압감이 느껴지는 높은 건물. 회사를 향해 뛰면서도 오늘 아침에 받은 안내 문자를 한 번 더 확인하며 헐레벌떡 오티 장소로 들어갔다.


내가 제일 마지막에 왔는지 자리는 대부분 차있었다. 뛰어오느라 헐떡이는 숨을 차분히 몰아쉬며 조심스레 남은 빈자리로 향했다. 자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서 오티 담당자처럼 보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내 자리는 그와 제일 가까웠다. 그때, 나는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지만 달려오느라 진정되지 않는 급한 호흡과 긴장된 회의실의 분위기, 처음 해보게 될 직무에 대한 앞선 걱정 등으로 감정의 동요를 꼼꼼히 인지하지 못했다. 여러 생각들과 방어기제로 짜인 이불이 마음 한자리를 덮어 버렸다. 하지만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을 땐 점차 직감할 수 있었다. 목소리가 좋다, 키가 크네, 계속 눈이 마주치네. 뭐 이런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중간중간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의 안정을 추구하는 편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란, 이전에 없던 바이러스가 몸에 잠입하는 일과 같다.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항체가 발동한다. 나는 매우 안정된 체계로 일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당시의 내 상태와 상황에 만족했다. 안정된 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 다시 시작할 만큼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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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와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진 친구가 한 명 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과감히 뛰어드는 법을 잘 몰랐지만 그녀는 그것을 잘 알았고 매우 적극적이었다. 몇 년 전 어느 날, 친구는 대뜸 내게 파리에 가자고 제안했다. 당시 나는 빡빡한 스케줄 소화와 더불어 한 달 생활비 마련에도 힘겨운 상태에 있었다. 그랬던 나에게 파리에 가자는 친구의 제안은 먼 나라의 뜬구름처럼 느껴졌다.


현실의 문제에 대한 생각이 많았고, 미지의 영역을 향해 간다는 일은 내게 두려움이자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욕망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어도 나의 이성은 엄격한 조교처럼 나를 강하게 통제하곤 했다. 친구는 결국 혼자 파리에 갔고 나는 한국에 남아 열심히 돈을 벌며 공부를 했다. 적당히 만족스러운 시험 성적과 매달 아슬아슬하게 맞춰지는 생활비를 바라보면서, 욕망은 희미한 목소리로 ‘파리에 가고 싶다.’ 웅얼거렸던 것 같다. 엄격한 조교가 순찰을 나오자 그 생각은 곧바로 잊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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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뭐 쓰세요?”

 

아르바이트 둘째 날, 결국 그가 먼저 문을 열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재고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던 나보다 그는 훨씬 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코트와 잘 어울리는, 무겁지만 달달한 머스크 향이 나는 향수 브랜드를 알려 주었고 그 말을 시작으로 일주일간 우린 자잘한 대화를 나눴다. 나중에 알게 된 건, 그 향수 냄새가 그에게 진한 인상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계절과 맞지 않아 지금은 뿌리지 않는 그 향수를 볼 때마다 가끔 그가 생각난다. 나답지 않게 전혀 다른 분야를 도전하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은, 그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서 비롯된 현재이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마지막 날, 그의 연락처를 물어본 것부터가 나답지 않은 선택의 시작이었다.


그는 취업과 진로의 문제로 고민하는 내게, 나는 아직 어리니 뭐든 한번 해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한창 젊은 나이였지만 크게 자각하지 못했고 ‘내가 할 수 있겠어?’라는 의심에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그 미지의 영역은 그의 말 한마디에 가능성의 문을 조금씩 열어갔다. 그의 격려, 응원, 칭찬.. 그때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자신 없어 했지만, 잊은 줄 알았던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에게 희미한 파동을 남긴 것이다.


그와의 관계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도전과도 같은 큰 선택이었다. 비록 지금은 흔적도 남지 않는 관계가 되었지만 그 선택에 후회가 남지 않는 것을 보며 나는 도전하는 기쁨을, 그 후련함과 성장의 문턱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나는 올해 2월에 졸업을 했고 울타리 밖 야인(野人)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불안감이 자주 찾아오기도 한다. 이 분야를 도전하기까지 많은 고민과 내면의 방황이 있었지만 한번 결정을 내리니 뒤도 안 보고 달리고 있다. 자소서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벌써 수십 통을 쓴 것 같다. 그만큼 많이도 떨어져 봤다는 말이다. 이전 같으면 한번 떨어질 때마다 멘탈이 깨져 견디지 못하고 돌아섰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꽤 잘 버티고 있는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의 응원 한 마디는 누군가에게 꽤나 큰 영향력을 미친다. 사랑을 받을 때, 나는 나를 더 사랑했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못 나눈 나의 내면과도 진솔하고 조용한 자리에서 친밀함을 쌓을 수 있었다. 나를 좀 더 돌아보니 도전을 결정하는 그 찰나의 순간도, 실패의 아픔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가을, 겨울과 잘 어울리는 그때 그 머스크 향의 향수는 거의 다 쓴 채로 내 화장대 위에 올려져 있다. 지금은 봄과 어울리는 보랏빛 향수가 내 최애 자리를 대신한 상태이지만, 이따금 자소서를 쓰고 공부를 하다가 구석에 쳐박혀 있는 그 향수를 꺼내어 슬며시 향을 맡아보곤 한다. 그 향은 기분 좋은 긴장감과 설레었던 그때 그곳으로 나를 다시 데려간다. 방향을 잡지 못해 불안하고 미숙함에 자책했던 나와, 그런 나를 기분 좋은 말로 격려하고 성장시킨 그가 있는 곳으로.


그래도, 그가 있는 그때의 나보다 그가 없더라도 꿈에 대한 확신과 똑바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지금의 내가 훨씬 더 좋다. 그 향은 그저, 백일몽의 환상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백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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