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인간의 삶으로부터 길어 올리는 역사 - D. H. 로렌스 유럽사 이야기

영미 문학의 거장이 펼쳐낸 인간의 이야기
글 입력 2021.03.2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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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럽인의 마음속에서 치솟은

거대한 파도 같은 움직임들에 대한 인상을

기록하려는 시도이다.


- D. H. 로렌스

 

 

『D. H. 로렌스 유럽사 이야기』

_ D. H. 로렌스

 

 

표지(평면)_D. H. 로렌스 유럽사 이야기(온라인 업로드용 수정).jpg

 

 

[PRESS]

인간의 삶으로부터 길어 올리는 역사

 

 

참으로 많고 다양한 책들 중에서, 내가 시간을 내어 읽을 도서로 역사서를 선택한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한 번 살펴보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매력적인 책 소개였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백 년 전, 옥스퍼드 대학의 학생들은 궁금증에 휩싸여야 했다. 눈앞에 놓인 이 유려한 문체와 재기 넘치는 서술의 역사서가 도대체 누구의 저작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은 고대 로마의 성립부터 근대 유럽 국가가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을 그야말로 숨 막히듯 서술해내고 있었다. 마치 욕망이 만들어내는 인간사 스캔들을 탐구하듯, 역사 속 인간과 그 사건을 분석해낸 이 책은 엄밀해야 할 역사책과 흥미로워야 할 소설의 장점을 두루 갖고 있으면서, 교육이라는 목적에조차 더할 나위 없이 충실했다. 거기에 ‘역사란 무엇인가’와 ‘역사에서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질문과 해답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누구의 작품이란 말인가?

 

- 책 소개



“아니 도대체 무슨 작품이길래?” 책을 만나보지 못한 21세기 방랑자1은 소개만 보아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백 년 전 독자들의 흥미로운 수군거림에 잠시 끼어들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다른 책도 아니고 역사서가, 책에 대한 관심을 넘어 저자를 향한 호기심으로 이어질 만큼 독자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는 것이 아닌가.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했길래 한 권의 책이 이런 소란을 일으킨 걸까. 그런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D. H. 로렌스 유럽사 이야기』를 만나게 되었다.

 

 

*

 

 

dhlawrence1.jpg

D. H. 로렌스

 

 

『D. H. 로렌스 유럽사 이야기』(이하 『유럽사 이야기』)라는 제목에서 이미 밝혀졌듯 이 소란의 주인공은 바로 영국의 소설가 D. 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다. 그러나 당시 로렌스는 민감한 소재를 거침없이 써 내려간 작품들로 생겨난 문제 작가라는 낙인과 함께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로 작품 발매 중지를 당하는 등 작가로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던 상황이어서 가명으로 책을 출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역사서를 집필하게 된 이유는 옥스퍼드 대학의 제의 때문이었다. '고답에서 탈피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 집필'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옥스퍼드 대학은 작가 로렌스를 선택했고, 로렌스는 의뢰를 받자마자 일필휘지로 원고를 완성했다. 그렇게 가명으로 출간된 역사서가 일으킨 반향은 대학을 넘어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퍼져나갔고, 책을 읽은 이들은 저자명으로 쓰인 로렌스 H. 데이비슨이란 인물이 누군지 알 도리 없이 궁금증에 휩싸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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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관련된 유쾌한 기억이라 할 만한 것이 없는 내게 '역사'라는 것은 알아야 할 일련의 상식, 증거들에 기반하여 구축된 지식이나 사실 내용 같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른 대륙의 역사는 더욱이나 그랬다. 그래서 역사를, 다른 것도 아니고 책으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져본 적이 없었던 내게 로렌스의 유럽사는 처음 소개를 읽을 때 느낀 호기심만큼이나 역사를 읽는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었다.

 

 

1.jpg

 

 

“인간의 욕망이 사건을 만들어내듯

역사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행동이 만들어낸다”

 

 

책과 함께한 경험을 이야기하기 전, 반향을 일으킬 만큼 흥미로운 역사 서술을 펼쳐낸 작가의 이야기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유럽사 이야기』의 '서문'은 책의 주인공인 길고 긴 유럽사 못지않게 매력적인 파트라 할 수 있겠다.


로렌스는 역사서가 쓰이는 3가지 서술 방식을 비판하며 내용을 시작한다. 첫 번째는 사실만을 나열한 역사서다. 로렌스는 이런 방식은 역사를 책 속의 죽은 지식으로 전락시킨다고 지적한다. 두 번째는 역사 인물의 ‘사적’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우리가 ‘생생한 역사’라 일컫곤 하는 역사서다. 이는 매혹적인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으나 오히려 역사성을 제거할 수 있다. 세 번째는 과학처럼 논리와 인과를 중시하는 역사 서술인데 이와 연관된 로렌스의 비유가 인상 깊다. “두서 없이 섞인 반죽 속에 박혀 있는 사건이라는 건포도를 골라내, 그것이 제멋대로 박혀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도표처럼 나열해 다른 사실들과 연관시키는 것”, 그는 훌륭한 학자의 논리적으로 흠 없는 역사도 결국 실제 사실을 ‘발견한 것’이 아닌 나중에 덧붙여진 ‘유추’의 결과뿐이란 걸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로렌스의 주장을 읽다 보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역사서는 어떻게 쓰여야 하는가?” 이제부터 『유럽사 이야기』를 읽은 나의 경험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나는 그 내용이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고 증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기에는 섬세한 묘사와 함께 역사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그리고 시대와 지역, 인간을 자세하게 묘사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따라 읽노라면 사건과 사건 사이에 놓여있는 어떤 매듭들이 여러 장면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과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내가 놀란 것은, 로렌스가 사건과 사건 사이를 연결하는 인과의 존재를 따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는 나의 머릿속은 역사 속 여러 순간에 대한 인상과 그 장면들을 기대보다 더 생생하게 그려나가며 일련의 흐름을 이해하고 있었다.

 

 

로마인의 마음속 밑바탕에는 소박하고 실제적인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이 점은 심지어 예수의 재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들 개개인은 허영심이 있거나 비도덕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 활동에 있어서는, 특히 정의와 인간의 자유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정함이나 개인과 국가 간의 정의를 추구했고, 논쟁이 되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총체적인 진리를 추구했다. 황제나 총독이 잔인하거나 어리석을 때에도 여전히 그들은 진실하고 옳은 것을 가리려고 들었다. 비록 그들이 항상 옳은 것을 선택해서 행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로마」중에서


 

한편으로 전사들은 게으르고 난폭했다. 그들을 일생 중 절반을 집안의 난로가나 집 밖의 풀밭에 드러누워 취할 때까지 마시거나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노름을 하며 보냈다. 아니면 나무로 만든 족장 집의 넓은 방에 앉아 엄청난 양의 고기를 포식하거나 알몸의 청년들이 예리한 창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민첩하고 재빠르게 위험한 춤을 추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이런 바보스러운 놀이에 진력이 나면 벌떡 일어나서는 나팔을 불고 집 밖으로 뛰어나가 곰과 멧돼지와 사슴을 사냥했다. 물론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전쟁을 위해 모이는 것이었다.

 

- 「게르만족」중에서

 

 

어떻게 이런 경험이 가능할까 질문하던 중, 나는 로렌스가 시대와 그 지역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인간상을 세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가령 인용한 내용을 보면, 각각 이러한 인간상을 지니고 저마다의 역사를 거치며 자신들의 지역에서 살아온 로마인과 게르만족이 서로 조우하거나 충돌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일어난 사건만을 연결한 논리와 인과의 나열에서는 드러나지 않던 인간적인 모습과 장면들이, 그러니까 그것에 대한 인상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지 않은가. 로렌스의 역사 서술은 “이 사건은 이런 상황이 놓여 일어났고, 이런 결과로 마무리되었다”가 아니라 “이 사건은 이런 시대를, 이런 인간상을 지니고 살아가던 이들로부터 일어났다”와 같은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장소와 시간에 매여 있는 존재다. 한 시대에는 그에 걸맞는 인간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시대건 간에 다른 시대의 인물을 해석하기 위한 기준은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가 아닌 당대의 인간상이다”

- D. H. 로렌스


리뷰 글 시작에 인용한 “유럽인의 마음속에서 치솟은 거대한 파도 같은 움직임들에 대한 인상을 기록하려는 시도”라는 로렌스의 고백을 이 지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역사를 이해하는 일에는 사실을 확인하고 연결하는 논리의 존재 역시 중요하지만, 로렌스는 단지 그것만으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당대 그 사건을 일으켜야 했던 인간상을 파악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삶으로부터 파도처럼 일어났던 역사의 순간들을 통찰하며 길어올리고 있었다.

 

즉 로렌스는 사건과 사건을 연결하기 이전에 사건과 인간을 한 편의 시대 속에서 이해하는 과정을 그의 유려한 문체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처럼 로렌스의 『유럽사 이야기』는 건조한 지식의 나열에만 머물지 않고, 그렇다고 특정 위인의 사적인 내용에 치우치지도 않으면서, 사건 간의 논리와 인과를 파악하는 것에만 몰두하지 않은, 로렌스만의 역사관이 묻어난 거침없고도 독특한 서술의 필치로 완성된 역사서였다.

 

 

*

 

 

야심만만한 「서문」에 어울리게 책은 흥미롭지만, 엄밀하고, 엄밀하지만 생생한 역사의 장면과 장면들로 가득하다. 소설가라면 으레 쓸 법한 지어낸 장면은 하나도 없이, 건조한 역사의 기록만으로 역사에 생동감을 이끌어내는 재주는 왜 외설작가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평론가들이 로렌스를 영미 문학의 거장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지 실감하게 만든다.

 

- 책 소개

 

 

단순한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것과 달리, 『유럽사 이야기』는 흥미로운 역사 읽기의 경험과 함께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사유하는 시간을 가지게 해주었다. 몇 년 전 책상에 앉아 교과서를 보며 달달 외웠던 세계사를 이렇게 다시 읽어볼 기회를 가질 거라곤 생각해 보지 못해서 더 인상 깊은 독서가 되었던 것 같다. 유럽사 '다시 읽기'보다는, '새롭게 발견하기'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책과의 만남이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유럽사 이야기』는 매력적인 역사서였다.

 

어떠한 흐름을 바라보는 일에는 분명 다양한 관점과 방법론이 있겠지만, 인간이 일으킨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삶을 통해 다가갈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드러난 것들은 나열된 지식의 차원과는 또 다른, 새로운 이해를 불러올 가능성을 지닌 관점이자 통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로렌스의 '새로운 역사서'를 읽으며 해보았던 짤막한 감상을 남기며 도서  『D. H. 로렌스 유럽사 이야기』 리뷰를 마친다.

 

 

역사를 생명, 특히 인간이라는 생명이 만드는 몸짓이자 파장으로 본 로렌스의 관점은 현대의 역사관에 비추어도 매우 뛰어난 통찰력이라 할 것이다.

 

- 옮긴이의 말

 

 


『D. H. 로렌스 유럽사 이야기』

- 인간 충동이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격동을 그려내다! -

 

 

표지(입체)_D. H. 로렌스 유럽사 이야기(그림자X).jpg

 

 

저자

D. H. 로렌스

 

옮긴이

채희석

 

면 수

520면

 

가격

22,000원

 

발행

2021년 3월 19일

 

분야

역사/유럽사

 

출판사

페이퍼로드

 

 

 

오예찬_PRESS.jpg

 

 

[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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