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르는 것이 힘이다 [문화 전반]

글 입력 2021.03.22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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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게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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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북스피어의 대표 김홍민 씨가 겪은 일화가 기억에 남았다. 그가 사무실로 출근하려 탔던 지하철에서 있던 일이었다.

 

사무실이 있는 학동역에서 내리려고 준비하는데 어느 여자가 조용히 말을 걸어오더랬다. 여자의 말과 시선을 따라가보니 정장을 입은 한 여성의 뒤에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남성 한 명이 바짝 달라붙어 있었고, 직접적으로 나서기 겁났던 여자는 내릴 채비를 하던 남성인 그에게 조심스레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그는 기민하게 위험을 감지한 여성에게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고요하게 급박한 상황이 이루어진 그 칸에 있던 남성들은 스마트폰을 붙잡고 제 할 일에 열중하는 반면에 그 안의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 둘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동역에 도착해 지하철 문이 열리고 김홍민 씨는 남자를 붙잡고 도를 믿으시냐는 하찮은 소리를 하며 여성이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고, 이 사건은 오래전 일임에도 그에게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서술했다.

 

여성들은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고 남성들은 몰랐다. 그럼에도 그 순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선뜻 호의를 베풀며 썰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여성을 통해 겨우 알아낸 남성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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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사례로 2020년 젊은 작가 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가 강화길 씨의 <음복>이라는 작품이 있다. 몇 십 년을 함께 살아온 가족사를 전혀 모르는 아들과 제사를 지내러 간 하루 만에 그 가족 간에 얽힌 히스토리를 전부 읽어낸 며느리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 속에서 여성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남성들은 몰랐다. 여성들은 그래야만 했고, 남성들은 그래도 됐던 것이었다. 소설에서는 주인공 부부가 즐겨보던 중국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안에서도 소위 막장이라고 할 만한 자극적으로 얽히고설킨 관계를 보여준다. 그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제 의도와 관계없이 모든 비밀의 중심이 되는 아이가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 아이가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그 한 문장이 주었던 울림은 꽤나 깊고 진했다. 짧은 단편 소설 하나가 오래전부터 전해지던 두 개의 명제를 완전히 부숴버렸다. 적어도 이 소설 안에서는 아는 것이 힘도, 모르는 게 약도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들은 힘을 가져야 할 이유도, 약을 발라야 할 상처도 없었다. 그저 맑고 투명한 이상 속에 사는 어여쁜 아들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무지의 힘을 쥐고 자랐다. 부조리와 불편, 불안을 몰라도 되는 사람. 그래도 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 타고난 힘은 여성인 우리가 감히 쥐기 힘든 무언가였다.

 

 

 

모르는 것이 힘이다


 

이렇듯 여성은 태어남과 동시에 매 순간순간 알아야 하고, 진작에 눈치채야 할 것들을 경계한다. 내 뒤를 좇아오는 발걸음 소리, 바짝 다가와서 달라붙는 몸짓의 의도, 그 누군가가 소지하고 있는 무언가, 저도 모르는 새에 음식에 섞인 위험한 물질 등.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를 불확실한 가능성을 경계한다.

 

그리고 감수한다. 빙 둘러오더라도 인적이 많은 곳으로 다니고, 귀찮음을 무릅쓰고 1층에 내려가 배달을 받고, 혼자 사는 집에 남성의 흔적을 남기고, 심지어는 입어야 하는 것, 행동하는 것, 말하는 것조차 검열 받고 교정하는 불필요한 불편함을 감수한다. 그것이 생존 방식이었고, 그런 삶을 배웠다.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예방법을 알아서 습득하고 실천한다.

 

그럼 이 철저한 자의적, 타의적 교육이 좋은 효과를 보는 것이라 묻는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을 지켜내는 가장 첫 번째의 단계일 뿐이다.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범죄를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가해자들이 생산되지 않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여성이 싫다는 의사를 확실히 내비칠 것을 교육하는 것보다 남성이 여성의 동의 없이는 무엇도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교육하는 것이 훨씬 이치에 맞다. 실제로 그것이 훨씬 더 좋은 효과를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배우지 않아도, 몰라도 되는 힘은 이런 것이다. 누군가는 범하고 누군가가 범해지는 위험의 순간들을 상상하고 해결하는 그 순간들에서 제 3자로 쏙 빠질 수 있는 그런 권리. 그것은 언제나 여성들의 것이 아니었다. 비단 위험의 순간들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소설 <음복>처럼 일상의 순간순간에서도 여성들은 기민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분위기를 읽는 능력이나 눈치가 월등하게 타고난 것이 아니다. 선천적 우월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후천적 노력인 것이다. 무지의 힘은 언제나 여성의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무지함이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위기가 된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서 그것을 예민함으로 치부하기엔 험악한 뉴스와 속보가 조심하라고 외친다. 왜 조심하지 않았냐는 손가락질이 여전한 세상에서 여성들이 자신에게 닥쳤던 불시의 위기를 모른다는 것인 죄가 되고, 원인이 된다.

 

이제는 한 쪽으로 기울어진 명제를 공평하게 나눠가져야 할 때다. 몰라도 되는 약, 앎의 힘을 여성들이 덜어가야 한다. 눈치 보지 않아도, 예민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이제는 여성들도 누릴 때가 되었다.

 

 

[오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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