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몸에 갇힌 사내, 훨훨 날아오르다 - 잠수종과 나비 [영화]

수십만 번의 '눈 깜빡임'으로 책을 집필한 남자
글 입력 2021.03.08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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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말 미포함)


 

장도미니크 보비는 유명 패션 매거진 '엘르'의 편집장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다가 갑작스럽게 쓰러진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니 온몸이 마비되고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 의식은 있으나 말을 할 수 없고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한쪽 눈꺼풀뿐이다. 중년의 나이에 갑자기 희귀병 진단을 받은 보비는 크게 절망한다. 하지만 언어 치료사 뒤랑을 만나 특별한 의사소통 방식을 터득하게 되고, 대필을 돕는 클로드와 함께 한쪽 눈 깜빡임만으로 책을 출판하기에 이른다.

 

상상력과 기억에 날개를 달아 힘차게 날아오른 한 남자의 이야기. <잠수종과 나비>는 2007년 60회 칸영화제 감독상, 2008년 6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 감독상을 받은 실화 바탕의 작품이다.

 

 

 

한 번의 깜빡임이 단어로, 문장으로


 

영화는 보비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카메라 앵글은 그의 눈을 대신해 흐릿한 시야에 보이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비춘다. 보비는 드라이브 중 갑자기 쓰러지고 3주 만에 눈을 뜨니 병원에 와있다.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도 전달되지 않는 것을 의아해하며 그의 독백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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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의사로부터 자신이 전신마비에 말을 하지 못하게 됐다는 얘기를 듣는다. 병명은 '감금 증후군(locked-in syndrome)'.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왼쪽 눈꺼풀 하나다. 침대 밖으로 몸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셈이다. 그는 음식물을 씹어 넘기지 못하고 스스로 씻을 수도 없으며 TV 채널조차 마음대로 고르지 못한다. 보비는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돌연변이 괴물 같다고 여긴다. 그의 영혼은 잠수종이 끌어당기듯 어둡고 깊은 곳으로 침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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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비가 자신에게 닥친 일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때, 그의 곁을 지킨 사람들이 있다. 그중 언어 치료사 '뒤랑'과 보비의 책 출판을 도운 '클로드'의 역할이 단연 돋보인다. 뒤랑은 보비에게 눈 깜빡임으로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사용 빈도가 높은 순서대로 배열한 알파벳을 읊으면 말하고 싶은 단어 알파벳에서 눈을 깜빡이는 식이다. 그걸 하나하나 기록해서 단어로, 문장으로 완성한다.


'하기 싫어, 못 하겠어, 날 좀 내버려 둬'


뒤랑은 괴로워하는 보비에게 당신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며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함께 노력하자고 간절히 부탁한다.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타인이 내민 손은 묵직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보비는 동요한다. 이내 따뜻한 마음에 화답하듯 눈을 깜빡인다.


"메르시 merci(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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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의사소통 방법을 익히고 이전에 출판사와 계약했던 책 집필을 진행하기로 한다. 대필이 가능한 적임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면서 클로드와의 첫 만남이 시작된다. 둘은 차근차근 호흡을 맞추며 중년 남자가 병마와 싸우는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바로 보비 자신의 회고록이다. 때때로 몸은 물먹은 듯 가라앉고 머리는 천근만근이지만, 그의 일상은 조금 달라진다. 낡아 해어진 커튼 뒤로 들어오는 빛과 병원 테라스 너머의 풍경은 평범했던 하루를 아름답게 물들인다.


'이번 책을 다 끝내면 장거리 달리기 선수 얘길 써야겠다. 혹시 알아? 그러다 달릴 수 있을지'

 

 

 

잔인한 아이러니


 

보비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피에르 루생. 보비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과거에 보비가 비행기에서 그에게 자리를 양도했는데, 비행기가 납치되는 바람에 그가 베이루트에서 4년간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둡고 컴컴한 지하 감방이 지옥과 같았고 기약 없는 기다림이 가장 고통스러웠다는 이야기를 한다. 간혹 자살 충동을 느낄 때마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단다. 자신은 와인 매니아여서 와인 이름을 외우며 버텨냈다고. 당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행동을 하면서 꼭 이겨내라는 얘기를 전한다.


'저 사람 풀려났을 때 왜 전화 안 했냐고? 죄책감 때문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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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을 돌아보면 누구에게나 또렷하게 각인된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보비에겐 비행기 안에서 피에르 루생과 대화를 나눴던 장면이 선명하게 남았다. 꿈속에서 그때의 이미지가 재현되는 날이면,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럽게 깨어난다. 보비는 자신이 겪은 일들이 운명 같아서 두렵다. 선의로 했던 행동이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가 자신을 괴롭힐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참 아이러니하다. 홍콩행 비행기를 기대하고 떠났던 피에르 루생이 베이루트에 가게 되고, 보비가 좋은 뜻으로 한 행동이 평생의 짐이 됐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둘의 처지가 바뀌어 마주하게 되는 상황을 그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테라스와 등대, 그리고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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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테라스, 우뚝 솟은 등대, 그리고 가족은 보비가 힘을 얻을 수 있는 존재다. 종일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자신을 만나러 온 방문객이 있을 때면 병원 테라스에서 맞이한다. 보비가 '치네치타'로 명명하며 애정을 두는 공간이다. 그곳은 호젓하면서 영화 세트장 같은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다.

 

가끔 그는 교외 구경을 하다가 등대로 시선을 돌린다. 등대는 뱃사람들에게 희망과 구조를 상징하기에 그 높고 튼튼한 모습에 유독 눈길이 간다. 나도 좀 지켜줬으면 하는,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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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비는 병상에 있는 동안 가족과의 추억을 돌이켜 보기도 한다. 자신이 아프기 전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나 뵈어 면도해 드렸던 것이 떠올라 퍽 만족스럽다. 마흔이 넘어도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건 어릴 때 칭찬받는 것처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

우리 둘 말이다 처지가 똑같지 뭐니

난 이 집에 처박혀서 계단도

오르내리지 못하는 신세잖니

92살 먹은 노인한테 4층은 너무 끔찍해

우린 둘 다 갇힌 신세라고

넌 네 몸에 난 이 집에"

 

 

보비와 아버지는 서로를 그리워하며 흐느낀다. 보비가 눈물을 글썽이니 화면도 뿌옇게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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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버지의 날에 보비의 전 아내 셀린과 자식들이 찾아왔다. 신나게 해변을 따라 뛰어노는 아이들을 손을 뻗어 안아 주고 싶지만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다. 소중한 그 순간을 눈에 가득 담아 기억하는 수밖에. 그는 일렁이는 파도에 알알이 부딪히는 물방울 소리와 탁 트인 바닷가 풍경을 감상하면서 해방감과 고독함을 동시에 느꼈을지 모른다.

 

 

 

절망을 털어내고 크게 도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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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신 나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

왼쪽 눈 말고 멀쩡한 게 두 가지 있잖아

내 상상력과 내 기억들

그게 내가 잠수종에서 벗어날 유일한 수단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보비의 관점을 그린다. 생전 처음 겪는 육체적 고통에 감정과 생각이 장악돼 무력감을 느끼는 날이 부지기수고, 몸이 잠수종에 속박된 것처럼 괴롭다. 심해를 부유하는 자신을 누구도 도울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스스로 상황을 변화시킨다. 타인이 건넨 손은 꼭 잡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찬찬히 해나간다.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그는 희망을 노래하며 20만 번 이상의 눈 깜빡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어쩌면 절망을 툭툭 털어낸 순간 간절히 바랐던 기적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사건을 수없이 많이 겪는다. 때때로 그 일이 자신을 집어삼킬 듯 위협해도 완전히 무너지지 말자. 당신과 나에겐 새로운 페이지의 삶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니까. 끝없이 가라앉는 잠수종에서 탈출해 나비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르길 바란다.

 

 

[김세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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