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잃어버린 낭만을 찾아서

글 입력 2021.03.0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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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스물세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다회용 필름 카메라와 향수와 작은 일기장이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입시를 마친 2016년 봄,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원하던 대학 입학에 자취까지 하게 된 나는 살면서 처음 맛보는 큰 자유에 들떠 있었다. 내 꿈은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이었고, 자유로워진 나는 그 꿈을 열심히 실천에 옮겼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며, 때로는 바쁘게 때로는 실없이, 꽤나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렇게 3년이 지나 2018년 겨울, 3학년 2학기 종강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갑자기 큰 돌덩이가 내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대학생활은 1년밖에 남지 않았고, 이제는 취업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돌덩이의 정체였다. 3년을 함께 배우고 놀던 동기들은 하나 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지금 생각하면 사실 그들도 하고 싶은 일은 찾지 못한 채 일단 했을 지도 모르겠다) 인턴을 하고 시험을 준비하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니까 뭘 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난 휴학을 하기로 했다.

 

나를 알고 나를 찾기 위해 나는 휴학을 했다. 앞으로 최소 몇 십 년을 하게 될 직업을 그냥 막 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그 당시 내가 좋아했던 공연계를 더 알아보기로 했다. 구직 사이트를 뒤져 공연 백스테이지와 관련된 아르바이트를 찾아 모두 지원했고, 그중 하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뒤에서 본 공연은 새로웠고, 나는 백스테이지에 있는 모든 순간이 신나고 즐거웠으며, 하루하루 역동적인 힘을 얻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남들 눈에는 그저 아르바이트를 전전긍긍하며 귀한 휴학 시기를 허비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이제 알바는 그만하고 인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러지 말고 얼른 졸업하고 취직해서 돈 버는 게 나아” “공연은 돈도 못 번다는데, 남들처럼 공채 준비하는 게 낫지 않겠어?” 걱정과 조언을 가장한 날카로운 말들이 나를 찔러댔다.

 

점차 나 스스로도 확신이 없어졌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내 꿈과 낭만은 사라지고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될까?’하는 의구심만 더 커졌다. 자존감은 추락했고, 현실의 모든 것이 괴로워졌다. 낭만은 사라졌고, 나는 그것을 다시 찾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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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돈을 탈탈 털어 무작정 유럽 왕복 항공권을 예약했다. 하지만 돈을 다 끌어모아 비행기 티켓은 샀다고 해도, 몸만 달랑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약 두 달 간의 여행경비와 준비물을 사기 위해 나는 열심히 돈을 벌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주위와 나 자신이 주는 압박을 견디고 사는 것은 여전했지만, 조금만 버티면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이전보다는 나은 정신 상태로 살아갈 수 있었다.

 

여행 계획을 열심히 짜지는 않았다. 6개의 나라를 골라 한 지역마다 열흘 정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큰 숙박과 교통만 미리 예약해 뒀다. 나는 촘촘한 여행 계획 대신 낭만을 찾아가지고 올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을 위해서는 기록하고 기억할 매개체가 필요했다.

 

나는 우선 작고 튼튼해 보이는 일기장을 샀다. 여행을 하는 매일매일의 느낌을 종이 위에 글로 기록하고 싶었다. (나중에 느낀 거지만 이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여행 순간순간의 이미지를 기록할 카메라도 필요했다. 물론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을 수 있지만, 스마트폰엔 낭만이 없다. 나는 아날로그적이면서도 초보자가 쓰기 쉬운 필름 카메라를 찾아 추가 필름 세 롤과 함께 구매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향수였다. 나는 향으로 순간을 기억하고 떠올린다. 가령 전 남자친구가 사용하던 향수 냄새를 맡으면 그 시절의 감정이 생생히 떠오른다든지, 라일락 꽃의 냄새를 맡으면 어린 시절 본가에서 엄마와 낮잠을 자던 순간이 떠오른다든지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 두 달 정도의 여행을 함께할, 그래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 향의 기억으로 여행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할 향수가 필요했다. 아무래도 향수는 유럽에 도착해서 그 지역의 리미티드 에디션을 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을이 다가오던 2019년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첫 목적지인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검색해 두었던 조 말론 매장으로 갔다. 사고 싶었던 런던 리미티드 에디션 향수를 사 바로 뿌리고,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의 모든 순간과 느낌을 필름 카메라와 일기장에 담았고, 매일 매일 같은 향수를 뿌렸다.

 

여행은 자유롭고 행복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내가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신경 쓰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나는 길의 모든 곳에서 여유를 만끽했고, 풀밭에서 낮잠을 잤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거리를 걷기도 했다.

 

아무런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 나의 하루를 가득 채우며 살았다. 행복했다. 나의 몸 구석구석이 낭만으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행 후 돌아와서 나는 다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도전했다. 친구들처럼 광고회사 인턴에 지원할까 조금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여전히 미래에 대한 불안이 이따금씩 나를 찾아온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불안이 나의 낭만을 집어삼키지 않는다. 필름과 향수와 일기장을 꺼내어 계속 낭만을 뿌리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스물다섯이다. 조금은 더 내 꿈과 낭만을 위해 도전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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