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선악과의 대가를 잊은 이들에게 - 무용극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

글 입력 2021.02.24 11:4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쇼케이스 사진1 2020 ArkoCreate  ⓒSang Hoon Ok.jpg

쇼케이스 사진 2020 ArkoCreate ⓒSang Hoon Ok

 

 

선악과 서사의 중심은 추방이 아니다. 선악과는 금기를 깬 인간-신이라는 관계에 생긴 첫번째 균열이었다. 인간은 신과 소통하기 위해 탐욕스럽게 과실을 깨물었고, 그 순간 신의 영역이었던 선악의 가치판단이 가능하게 되었다. 원죄로 인해 인류가 획득한 유한성은 신의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 인간이 지불해야했던 대가이자, 가장 가치 있는 은총이었다.

 

<그래서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는 선악과 서사를 중심으로 무용을 전개해나간다.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된 선악과는 물리학 법칙을 발견하는 사과, 스티브 잡스의 혁신적 아이콘인 사과로 이어진다. 각 사건은 인류의 인식체계를 확장시키고 행동을 변화시킨 사건들이다.

 

 

 

너와 나, 하나의 나무가 빚어낸 존재의 과실


 

<그래서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에서 중심 소재로 삼고 있는 '선악과'는 무용극이 나눈 섹션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어 표현된다. 편의상 본 글 에서는 '아담과 하와' 섹션, '현대'섹션으로 표현한다. '아담과 하와' 섹션에서는 인간의 야생적 소통 욕구, 투박하지만 진실한 소통방식이 드러난다. 아담은 하와는 서로의 몸을 지탱하면서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네가 나무라면, 무슨 나무가 되고 싶어?" "네가 색이라면, 무슨 색이 되고 싶어?" 아담은 질문을 던지는 하와를 온몸으로 지탱하며 고심하여 답변한다.

 

여기서 개인적인 감상을 좀 더 덧붙이자면, 이 '아담과 하와' 부분은 근래에 본 가장 아름다운 표현 중 하나였다. 몸을 써본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지지하고 맞부딪치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알 것이다. 질문과 답으로 이어지는 아담과 하와의 회화에서 둘은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마주한다. 하와가 아담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 자신의 개성이나 본질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몸이라는 매체와 몇 마디 대사가 어우러져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이 장면이 무어라 할 수 없는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용수들이 구현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잃어버린 것'은 '현대' 섹션에서 더 자세히 표현하도록 한다. 선악과를 중심 소재로 다루는 작품의 맥락을 생각할 때, 이 장면은 선악과를 먹지 않은, 신-혹은 불변의 진리로 대표되는 세계-과의 해체되지 않은 순결한 인간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아담과 하와'장면을 '선악과 이전'의 인간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추상적으로 표현된 무용극의 메시지를 축소하는 것 같다. 작품에서 무엇을 구현하려 했든 둘이 하나로 보이는 아담과 하와의 몸짓은 현대사회에서 이미 사라져버렸거나, 회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쇼케이스 사진2 2020 ArkoCreate  ⓒSang Hoon Ok.jpg

쇼케이스 사진 2020 ArkoCreate ⓒSang Hoon Ok

 

 

 

'내'가 아닌 '우리'로 존재하는 현대 사회


 

서로 얽혀있던 아담과 하와는 둘로 쪼개진다. 이어 여성 무용수 셋이 등장해 그로테스크한 몸짓으로 바닥을 굴러다니며 움직인다. 가장 인상 깊었던 표현은 긴 머리 사이로 깍지낀 손의 손가락만 보이게 연출한 부분이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솟아난 네 개의 하얀 손가락은 선악과를 삼킨 이빨을 표현한 것으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꿈꾸던 아담과 하와의 나무가 무너졌음을 암시한다. 어두운 조명과 세 무용수가 구겨지듯 몸을 접은 모습은 따뜻한 조명 아래에 서로를 지탱하던 장면과 놀라운 대조를 보인다.

 

이어 AI가 등장한다. AI를 연기한 무용수(이하 AI)는 세련된 음악 아래에서 인간 무용수보다는 정형화된 패턴으로 움직인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AI가 타고 다니는 전동 휠이다. 본 작품에서 등장한 전동휠이 세그웨이가 새로 개발한 타고다니는 인공지능 로봇인지는 알 수 없지만, AI는 전동 휠을 통해 움직인다.

 

AI의 등장으로 앞서 언급한 '현대'시기에 관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AI는 등장하면서 자신에 관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수많은 사람은 AI에게 말을 건다. 수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AI는 버벅임 없이 능숙하게 이야기하지만, 윤리적 문제에 관해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그는 그가 어떤 존재냐 질문에 "클라우드 세계에서 존재론적 질문은 의미가 없다"라고 답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라고 답한 부분은 AI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환상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클라우드 세계에서 존재론적 질문은 의미가 없다"라고 답한 부분에서 우리가 살아있다고 믿는 AI가 소통의 대상이 아닌 공허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 관해 끊임없이 묻고 답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어 스마트폰 플래시를 킨 상태로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현대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점차 AI의 움직임에 따라 하나의 군체처럼 움직인다. 처음에는 AI의 모습을 흉내 낸 것 같이 움직이다, 마지막에는 AI가 움직이지 않아도 정확한 군무로 움직이게 된다. 작품의 이러한 연출은 빅데이터가 가져온 초개인화라는 환각, 개인의 취향이라는 미명 아래에 보던 것만 보게 되는 현대사회를 풍자한 것이다.

 

 

쇼케이스 사진3 2020 ArkoCreate  ⓒSang Hoon Ok.jpg

쇼케이스 사진 2020 ArkoCreate ⓒSang Hoon Ok

 

 

 

빠른 소통, 찰나의 인연


 

다음 장면, AI가 현대인으로부터 스마트폰을 거두어 간다. 스마트폰을 빼앗긴 현대인들은 관객석을 보는 상태로 차곡차곡 쌓인다.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이들은 아담과 하와가 했던 질문을 반복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들은 서로를 지탱한다기보다는 이불처럼 포개져 있고, 일대일 대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담과 하와의 대화가 인터넷 세계로 옮겨지면서, 무용극은 SNS 상에서 이루어지는 일대 다 커뮤니케이션을 구현한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은 두 가지 맥락으로 읽혔다. 첫 째, 아담과 하와와 비교해 지나치게 공유된 회화라는 점, 둘 째, 인간은 아담과 하와 시절과 마찬가지로 존재를 질문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 이 두 가지 맥락은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두드러진다.

 

일대 다 커뮤니케이션 이후로 무용수들이 각자의 삶에서 행복했던 순간을 몸과 말로서 표현한다.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시절이 비디오와 무용으로 표현된다. 이 장면 이후로는 다시 SNS 세계에서의 소통 방식이 표현된다. 각 인물은 빠르게 길을 걸어가며, 잠깐 함께 달리다가도 순식간에 다른 사람에게로 관심사가 옮겨간다. SNS 상에서 빠르게 서로를 모방하고 관계를 맺는 무용적 연출은 인상적이었다.

 

이 장면의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이토록 가벼워 보이는 관계조차도 어떤 면에서 아름다웠다는 점이다. 무용수들이 잠깐이나마 함께 달리고 같은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전동휠을 탄 AI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은 스쳐 가듯 관계를 맺는다. 그럼에도 때로 함께 달리는 이들의 소통이 마냥 가볍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때로 같이 달리는 과정이 가슴 아리게 아름다웠다. 선악과 이전 시대를 잃어버린 이들의 모습은 비극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을 장식한 AI와 인간의 달리기 장면은 인간들끼리의 빠른 달리기 장면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AI가 중간에서 홀로 돌아가고, 인간은 그 주변을 달린다. 인간과 달리 AI는 행동을 모방하거나 함께 달리지 않고, 인간은 AI의 속도조차 따라잡지 못한다.

 

 

쇼케이스 사진4 2020 ArkoCreate  ⓒSang Hoon Ok.jpg

쇼케이스 사진 2020 ArkoCreate ⓒSang Hoon Ok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


 

작품은 어린아이가 성인, 할머니가 되는 장면으로 마무리 짓는다. 선악과를 베어 문 아이가 성인이 되는 장면이 두드러진다. 어린아이의 쾌활한 움직임은 선악과 이후로 힘을 잃는다. 이러한 마지막 장면은 선악과가 가진 대가적 특성을 두드러지게 표현한다.

 

전체적으로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라는 질문은 기술적 혜택으로 우리가 모두 잊어버리고 있는 선악과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작품의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해 무용극은 원죄, 과학적 발견, 기술적 혁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짧은 비디오로 제작하여 연극의 도입부와 결말부에서 반복해서 표현한다.

 

도입부와 결말부에 제시된 '선악과 비디오'의 형식과 내용은 약간 다르다. 도입부의 비디오는 손이 나와 직접 그리는 식으로 표현되었고, 스티브 잡스가 사과를 들고 있는 모습에서 끝난다. 결말부의 비디오는 배우들의 얼굴을 잘라붙인 캐릭터 인형이 등장하고, 독 사과를 먹고 죽은 백설공주 캐리커처와 이미 베어문 사과의 몸을 한 캐리커처가 나온다.

 

썩은 사과 몸통을 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선 결말부의 비디오 전에 등장한 다른 두 비디오를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사과'라는 표상을 구현하기 위해 빅데이터의 소스로 제시된 데이터들, 즉 인터넷 세계에서 떠도는 수많은 사과 이미지 슬라이드이며, 다른 하나는 실온에서 천천히 썩어가는 사과의 모습을 연속촬영한 것이다. 두 비디오의 차이는 그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이다.

 

기술과학적 혁명은 인류의 지평을 놀라울 정도로 넓혀주었다. 인류는 선악과를 먹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연극에서 내미는 질문이 "그런데 사과는 왜 먹었습니까"가 아니라 "그래서 사과를 왜 까먹었습니까"인 것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나가며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우리의 육체는 사라졌다. 우리는 이전보다 덜 얼굴을 마주하고, 덜 손을 잡는다. 접촉이 사라진 시대에 인간의 몸을 매체로 한 본 작품은 독특한 여운을 남긴다.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는 AI가 제시하는 허무한 소통의 세계, 정형화된 인간의 삶이 우리의 삶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경고한다.


하지만 경고로 끝나는 이 작품은 현대사회를 꼬집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경고는 회복에 대한 희망과 열정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연극은 끊임없이 '사과를 까먹지 말라'라고 이야기한다. AI와 우리의 차이, 웹 속의 사과와 실제 사과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실존하는가이다. 웹속의 사과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표상일 뿐이고, 실제의 사과는 실제로 썩어가며, 실존한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를 지탱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시대는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 우리의 실존은 변하지 않았고, 사과를 잊지 않는다면 언제든 되돌릴 수 있다. 몸을 사용한 이 작품이 유독 감동적인 것은,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몸이라는 도구로 그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리라.



포스터.jpg

 

[손진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