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가 왜 다투어야 하나요 - 연극 '와이바이'

글 입력 2021.02.14 11:5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상처의 서사시



우리의 삶은 상처의 연속이다. 좋든 싫든,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사람을 마주하게 된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하고, 더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된다. ‘새롭다’라는 긍정적인 어조의 형용사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두려움이 숨겨져 있다.

 

우리의 삶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의 연속이다. 모른다는 것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대개 가능성에 기대를 품곤 한다. 기대의 다른 의미는 상처이다.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를 받을 일도 없다.

 

어떤 상처는 한 사람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처는 죽지는 않을 정도의 고통을 가져다준다. 니체의 말처럼 그런 고통은 우리를 더 강하게 한다. 새로움이 가져오는 기대, 그리고 그 기대가 소개하는 상처는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크기변환]재공연 동이문 - 2.jpg

 

 

연극 ‘와이바이’는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중 인물은 모두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 모두 한층 더 단단해져 간다.


다만, 단단함의 표면은 날카로울 수도, 부드러울 수도, 까끌까끌할 수도 있다. 날카롭게 흉이 진 상처는 누군가에게 새로운 상처를 가져다준다. 곱게 아문 상처는 다른 이의 상처도 잘 아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딱지가 져 간지러운 상처는, 새로운 상처를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다.


연극 ‘와이바이’는 세대 갈등, 외국인 노동자 차별, 기성세대의 뿌리 깊은 성 차별적 인식 등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며, 감상자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하지만 간간이 따뜻한 희망이 등장하며 감상자의 마음을 녹이기도 한다. 등장하는 비극과 희망 모두 너무나 현실적이기에, 감상자에게 더 와닿게 된다.

 

대화를 통해 충분히 서로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픔이 ‘가장 아픔’이라고 생각하기에 등을 돌려야만 했던 이들의 이야기. 현대 사회에서 ‘단절’의 상징으로 여겨지곤 하는 ‘(무선)인터넷’이 상처 받은 이들을 연결해주는 이야기.

 

연극 ‘와이바이’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상처의 서사를 풀어내는 연극이다.

 

 

 

강자가 된 약자여, 당신은 왜 외로워야만 합니까.



본 연극에는 각양각색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주인공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그들은 ‘약자’를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약자의 단계를 거쳐 강자가 되었거나, 약자의 단계를 거쳤으나 여전히 약자이거나, 강자의 위치에 올라서기 위해 노력하는 약자가 주인공이다. 연극 ‘와이바이’는 그러한 ‘약자’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크기변환]와이바이1.jpg

 

 

‘용일’은 약자가 아니다. 하지만 한때는 약자였다. 가난했던 그는 젊은 시절 하루종일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논밭을 일구고 양계장을 운영한다. 이제 그는 강자이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운용’하여 돈을 벌며,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부린’다.


용일은 현대 사회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인물상이다. 젊을 적 ‘뼈빠지게’ 일을 하고, 돈을 모았으며, 모은 돈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오로지 ‘그가 열심히 하였기에’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덜 열심히' 산 사람들로 여긴다.


하지만 그는 인정받지 못한다. 아니 적어도,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만큼의 인정을 받지는 못한다. 거기에다가 ‘요즘 것들’은 제대로 일하지도 않고 성과를 바라는 것만 같아 보인다. 그래서 마음껏 심술을 부리며, 마음껏 무시를 한다.


그들은 ‘나의 덕’을 받고 있고, 그들은 ‘게으르기’ 때문에, 무시당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심술을 부리고 사람들을 무시할수록 마주하게 되는 것은 외로움뿐이다. 원했던 인정 대신 ‘쫌생이’라는 말이 돌아온다.


용일은 아팠다. 그가 약자였을 때에 그는 충분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아프다. 치료가 필요한데, 너무 오래된 상처는 이미 날카롭게 흉이 졌다. 그는 아프지만 치료받을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나는 아프다. 너도 아프다. 우리는 모두 아프다. 우리는 우리가 모두 아프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아프다’는 것이다. 용일은 ‘내가 아픈 것’이 ‘가장 아픈 것’이라고 판단하며, 다른 이들의 아픔은 도외시하는 것이다.


단순히 용일을 변호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상처를 근거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게다가 용일의 언행에는 구시대의 비윤리적인 성차별적/국가차별주의적 가치관이 담겨 있기도 하다.

 

상처가 새로운 상처를 만드는 악순환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처받은 이는 아직 상처받지 않은 이가 자신과 같은 상처를 받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상처를 피한 이는, 자신에 앞서 상처받은 이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는 아팠으니까, 당신은 아프지 않을 수 있기를.



‘용일’의 이야기 외에도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인도에서 온 ‘마리아’와 ‘나일’ 부부, 몽골에서 온 ‘칸’과 ‘이리띤’과 같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서사가 주를 이룬다. 예술가를 꿈꾸며 도시로 향했지만, 실패를 경험하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용일 부부의 딸 '베이비'의 이야기도 연주된다.

 

 

[크기변환]와이바이3.jpg

 

 

극에 등장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일을 하러 한국에 왔다는 것, 그리고 분명 한국인 사장 밑에서 ‘일’을 하고 있음에도 ‘취업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와 칸은 아직 기대를 품고 있다. 이번 사장은 ‘좋은 사람’인 것 같다며, 그들은 우리가 취업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게끔 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이리띤은 이미 단념한지 오래이다. 그의 친구 칸에게 그저 불법 체류자 단속반에 걸리지 않게끔 조심하기나 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상처받지만, 따뜻함에 보호받기도 한다.


상처가 더 큰 상처가 되지는 않도록, 그들의 상처가 새로운 상처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타인의 상처를 관용하자.


뼈가 부러졌다. 피부도 찢어졌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가 찾아와 자신의 피부가 찢어졌다며 아프다고 한다.

 

그 때에, “피부가 찢어진 것은 뼈가 부러진 것보다 불편하지도, 아프지도 않아.” 혹은 “나도 피부 다 찢어져 봤어, 그게 뭐가 아프다고 엄살이야.”라고 말하기 보다는,

 

“피부가 찢어졌니? 그것 참 아프고 불편하겠구나, 나도 다쳤을 때 정말 아프고 불편했거든” 또는 “나도 예전에 피부가 찢어진 적이 있었는데, 피부가 찢어진 것은 연고를 바르면 잘 낫더라, 여기 연고 있으니까 발라보는 게 어때?”라고 말해줄 수 있는 따뜻함이 우리의 마음에 있길.

 

우리의 마음에 상처가 아니라 관용이 남아있길. 그럼 그때에는 ‘꼰대’라는 따가운 꼬집음 대신, 더욱 따뜻한 ‘감사’가 돌아올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해석한 연극 '와이바이'가 전하고자하는 바였다.

 

 

[최호용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11825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1.09.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부일로205번길 54 824호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1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