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두가 한번은 지나온 그 길 [영화]

글 입력 2021.01.0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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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영화, 문학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일인지, 반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미디어는 그것을 더 부추긴다.

 

나는 언제나 이 감정의 존재를 부정하는 쪽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향해 확실한 성애를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내가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가족이나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과 어떻게 다른지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래서 내 사춘기는 엉망진창이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는 척하기도 했고, 지금까지도 밤이면 나를 괴롭히는 후회스러운 일을 하기도 했다. 이제라고 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때는 정말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내가 누군가의 애정을 갈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누구에게서 오는 것이든, 나는 관심과 애정에 늘 목말라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의심했던 것만큼이나, 그 미지의 감정을 원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좋다고들 하던데, 정말일까? 과연 이 세상에서 나를 그토록 아껴 줄 사람이 있을까? 내가 그토록 아낄 만한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내 사춘기가 이 영화의 주인공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 더 쉽게 몰입했는지도 모르겠다. “미니의 19금 일기”-이 한국판 제목을 정말 싫어한다. 원제는 “The Diary of a Teenage Girl”이다-의 주인공인 ‘미니’ 역시 혼란과 의문, 그리고 갈망으로 가득 찬 사춘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니’는 어쩌다가 엄마 ‘샬롯’의 남자친구인 ‘먼로’와 관계를 가진다.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아니 처음부터 엮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이가 계속 이어지면서, ‘미니’는 온갖 갈등과 고민에 휩싸이고, 상처를 받는다.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감독이든, 각본가든, 사회에서 통용되지 못할 성적 판타지를 이렇게 대놓고 가져와서 영화를 만들다니 생각이 있는 건가, 싶었다. 영화를 30분쯤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극적인 소재와 스토리를 이용했을 뿐, 그것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영화의 시선은 ‘미니’의 성적 호기심과 섹스 장면 등을 어떠한 대상화 없이 담아내면서 오로지 그 과정에서 ‘미니’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지를 그리는 데에만 집중한다. 거울을 통해 말없이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미니’, 나는 섹스가 좋다고 말하는 ‘미니’, 그리고 ‘먼로’를 사랑한다고 믿는 ‘미니’.

 

‘먼로’는 영화 내에서 가장 비정상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미니’의 주변 인물들이 전부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먼로’는 좀 더 ‘쓰레기’ 같다. ‘미니’에게 넌 아직 애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관계를 이어가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미니’의 엄마에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 그가 정말로 ‘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이미 차고도 넘치지만, ‘미니’는 사소한 것에서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이런 시답지 않은 얘기를 들어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들은 미성숙한 ‘미니’의 마음으로는 밀어내기 버거웠을 것이다.

 

영화 중반부에서 ‘미니’는 누군가의 사랑과 애정을 느끼기 위해 섹스를 하고 싶다고, 다른 사람이 나를 만져주고, 나를 원할 때만 비로소 사랑받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품었던 적이 있기에, ‘미니’의 솔직한 말을 재단하거나 비판할 수 없었다. 되려 그 말이 아프게만 느껴졌다. ‘미니’가 나눈 모든 섹스 중에서, 그가 그토록 원했던 사랑이 담긴 섹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할 수만 있다면 ‘미니’를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단순히 ‘미니’의 행동이 자기 파괴적이라서가 아니라, 그 모습이 정말 나 같았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나 역시 누군가의 사랑과 애정을 심하게 갈구했던 시기가 있었고, 지금도 내 자아의 일부는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니’의 이야기가 극단적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이 자극적인 서사를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우리가 모두 한 번씩 지나왔던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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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는 마지막 부분에서 결국 ‘먼로’와의 관계를 ‘샬롯’에게 들키고 집을 나오지만, 다시 ‘샬롯’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 이후로 소식이 없던 ‘먼로’를 우연히 길에서 만난 ‘미니’는 뻣뻣하고 어색한 ‘먼로’와 달리 자연스럽게 그에게 악수를 청한다. 아빠가 가르쳐줬듯, ‘난 너보다 나아, 이 망할 자식아’라고 생각하면서 ‘먼로’의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미니’의 모습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영화 엔딩 부분, ‘미니’의 독백이다. ‘미니’가 ‘엄마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아니다’, ‘어쩌면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 다는 아닐 것이다’고 말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엄마처럼 사는 게 꿈이었던 딸은 그렇게 한 뼘 더 자란다. 영화의 엔딩에서 존재하는 것은 남자도, 섹스도 아니다. 그저 서로에게 기대선 ‘샬롯’과 ‘미니’만이 있을 뿐이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이 영화가 더욱 감명깊게 다가왔다. 둘은 여전히 모녀로 남았으며, '샬롯'은 '미니'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젊음'을 질투하는 늙은 여성들을 우리는 미디어에서 너무나 쉽게 접한다. 성차별적 사회 규범 아래에서는 아무리 능력있고, 현명한 여성이라도 어린 여성의 '젊음'에 압도된다. 하지만 '샬롯'은 '미니'의 행동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미니'가 가진 젊음의 혈기는 미화되지 않는다.)

 

‘미니’는 언뜻 보기에 기괴하고 이해하기 힘든 그림들을 그린다. 여성의 신체, 성기 등을 표현한 그림들은 ‘미니’가 자신의 신체를 긍정하고, 사랑과 성에 대한 호기심을 타인에게서 자신에게로 돌리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확신을 바랐던 ‘미니’에게 ‘먼로’는 완벽한 상대로 보였지만, ‘먼로’는 ‘미니’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를, 다른 누군가가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끝없는 의심과 자기파괴로 이어졌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쾌락을 좇았던 ‘미니’를 두고 ‘걸레’라고 불렀던 학교 친구, ‘미니’의 그림을 두고 섹시하지 않다고 말했던 ‘먼로’의 모습을 보며 어쩐지 70년 대의 미국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미니’가 거리낌 없이 자기애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벅찬 기쁨을 느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 나에게 애정을 느낀다는 것은 물론 기쁜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행복은 거기에 달렸지 않다.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가 나의 존재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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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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