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편한 얼굴을 마주할 용기 [문화 전반]

세상의 고통스러운 낯을 닮은 예술을 향유해야 할 이유
글 입력 2020.12.0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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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다소 보기 불편한 이미지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정말 필요한 장면만을 선정한 것이나, 주의바랍니다.

 

 

2020년은 우리가 전 지구적 재난상 황을 함께 견뎌야 했던 낯선 시간이었다. 내게 무엇보다 낯설었던 것은 수많은 이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생을 마감하는데, 각 사람의 세월이 담긴 삶이 그저 숫자 1로 치환되어 전광판에 떠 있는 장면이었다. 몰아치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 우리 각자의 생명은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일까.

 

 

 

존재에 대한 질문 - 전쟁이라는 촉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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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7월, 핵실험 직후의 뉴 멕시코 상공사진. / 사진 출처 - Los Angeles Times

 

 

70여 년 전에는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인해 이와 유사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인간이 만든 무기로 인간을 짓밟고, 무력의 거대함 앞에 한 생명의 가치는 종잇조각처럼 하찮아졌으며, 생명을 지닌 몸은 그저 도구로 이용되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일들이 계속되고, 파괴만이 파괴를 막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오랜 시간 믿어왔던 생명의 존엄성이 철저히 외면당한 상황 앞에 인간은 극도의 허무함과 무력함을 느꼈고, 이는 예술가들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그리도록 이끈 촉매가 되었다.


오늘은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떠오른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의문과 전후의 허무하고 비참한 상황을 담은 작품 중 내게 큰 충격을 안겼던 세 가지를 살펴보고, 시대의 어두운 얼굴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을 마주해야 하는 이유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방인 ; 존재의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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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분명 일인칭 시점의 소설이지만 주인공 뫼르소는 작품 내내 자신과 관련한 일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관찰자, 혹은 겉도는 이방인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

 

어머니의 관 앞에서 밀크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태우고, 직장에서 더 좋은 자리를 제안받아도 현재의 삶에 불만이 없다고 거절하며, 레몽이라는 자의 다소 비상식적인 부탁에도 별 거리낌 없이 도우는 모습은 무관심하긴 하나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낯설 뿐이었다.


그런 그의 무관심한 관찰자적 태도가 어처구니없게도 전혀 상관없는 살인사건의 재판에서 그를 살인자로 몰아가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그가 아랍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건 정말로 태양이 뜨거웠기 때문이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살인 사실보다도 그가 어머니의 장례 이후에 행한 ‘부적절한’ 행동에 경악했고, 결국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뫼르소는 작품 말미에 이르러 자신을 감화하기 위해 찾아온 신부에게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격한 반응을 보인다.


“당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살고 있으니 마치 죽은 사람 같으며, 삶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없는 것과 같다. 당신의 눈에는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나 자신과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고, 그것은 당신보다 강하다. 또 나는 내 삶과 나를 가까이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에 대해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다. 그것이 나에겐 전부다.”


자신의 재판에서조차 이방인처럼 소외되었던 그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둘러싸인 때보다 죽음을 마주한 때에 존재로서의 인간 그 자체, 생명의 강렬함을 분출한 것이다.


이 작품을 읽고 그저 범상하다고 여겼던 통념에 찌릿한 반발을 느꼈다. 내가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던 기준이 과연 정말 인간적이었는지, 나아가 ‘인간다운’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할수록 내가 알고 있던 모습에서 멀어졌다.


예의와 배려, 인내와 친절이 걷힌 자리엔 충동과 무관심, 게으름과 쾌락을 추구하는 ‘나’라는 생명체의 본 모습이 드러났다. 태어난 것부터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이 삶에서 나라는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지 않고 ‘으레 그렇듯’ 살아온 시간이 떠오르고, 마음속 반발심은 커졌다.

 

 


부토 ; 존재의 허무함과 생명의 얼굴



카뮈의 작품이 자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존재 자체의 부조리함에 맞서는 내용을 담고 있다면, 생명을 도구화하며 파괴를 파괴로 덮는 전쟁 상황에서 죽음을 마주한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담은 예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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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카타 타츠미의 작품 호소탄 장면 중 일부

 

 

제2차 세계대전 말, 원자폭탄 투하로 두 도시가 쑥대밭이 된 일본이 마주해야 했던 극도의 허무주의는 ‘부토’라는 춤을 탄생시켰다. 온몸을 하얗게 칠하고, 폐허에서 신음하며 꿈틀대는 무용수의 움직임은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순수하고 깨끗한 것인가', '인간 본성의 가장 밑바닥은 어떤 모습인가’와 같은 실존적 질문에 대한 그들만의 대답이다.

 

사실 부토 춤을 처음 봤을 때 꽤 충격적이어서 그랬는지 ‘이런 장르도 예술이 될 수 있는 건가?’라는 부정적 의문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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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카타 타츠미의 작품 호소탄 장면 중 일부.

 

 

그런데, 보기에 그리 달갑지도 않고 꺼지기 직전인지 이제 막 움트는 것인지 모를 미약한 움직임과 고통스러운 얼굴을 견디며 바라보다 문득, 이 얼굴이야말로 생명의 민낯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관통했다.


그리고 동시에, 한 작곡가의 음악을 떠올렸다.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 ; 존재의 소리



작곡가 크지슈토프 펜데레츠키의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곡이다. -제목을 정하는 과정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나, 어찌 되었건 그들을 애도하기 위한 비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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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지슈토프 펜데레츠키의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 스코어 / 출처 - 유튜브 gerubach

 

 

이 곡엔 정상 화음이 아닌 음(온음 이내의 좁은 간격의 음)들이 동시에 소리를 내는 ‘톤클러스터’라는 기법이 사용되었다. 소음처럼 들리는 음악과 추상 회화 같은 악보 모두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인지 처음엔 그저 당황스러웠다. 이런 음악으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건지, 그것보다 이 곡을 음악이라 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음악이 끝나고 나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조화롭다’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단 한 군데도 없었고, 군용 수송기의 프로펠러 소리처럼 들리기도, 수많은 이들의 비명으로 느껴지기도 했던 곡은 이상하게 또다시 재생 버튼을 누르도록 이끌었다. 멍하니 세 번 정도 반복해서 들은 후, 명확한 이유를 대진 못하겠지만 음악이 보듬으려 한 것이 생명의 소리였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우리가 잊어선 안 될 소리다.


 

 

불편함을 촉발하다 - 생명을 감각하다



손쓸 수 없는 죽음 앞에 우리는 존재의 무력함을 느낀다. 이 무력함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던 것들을 무너뜨리기에 절망스럽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의지했던 정보, 기술, 자본, 권력의 허무한 껍데기를 깨뜨리고, 우리가 당연히 따르던 시스템이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 과정은 각자에게 진정 인간다운 것은 무엇인지 사유하도록 이끌어준다.


죽음을 마주하며, 비로소 생명을 감각하는 것이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임은 분명하지만,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 우리가 감각하는 세상의 어두운 낯까지 마주하는 일은 우리 존재를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불편함을 촉발하는 것이야말로 그 너머의 본질적 사유로 이끄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쥐어지는 삶의 열쇠


 

나도 위의 작품들을 감사하는 데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며 내게 ‘예술 작품이란 으레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규범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예술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 작동하는 이 규범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생명체로서의 모습은 어떤 것일지 겸허히 사유해볼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이 빛과 어둠 사이의 모호한 성분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마주해야 한다. 이제까지 ‘그래야 한다’고 여겼던 수많은 조각을 다시 돌아보고 사유하며, 사회 곳곳에 여전히 존재하는, 상흔을 지닌 풍경을 바라볼 용기를 내야 한다.

 

그 단면을 마주할 용기를 냈을 때, 예술은 불편함으로 마음을 두드리고, 비로소 우리에게 그 너머의 삶을 꿈꿀 열쇠를 쥐여줄 것이다.

 

 

“나는 나의 음악을 느끼고, 생각하고, 숨쉬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바친다.”

 

- 크지슈토프 펜데레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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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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