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보호자 일지

암환자 보호자의 이야기
글 입력 2020.12.0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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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환자 보호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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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8호실 환자 보호자인데요

[에세이] 위암수술, 그 후에 오는 것들



어쩌다보니 엄마는 암환자가 되었고, 어쩌다보니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엄마의 일만으로도 너무 커서 한동안 무슨 소란이 일어나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는데, 급격히 인생계획을 수정하게 되었다. ‘뭐 이런 일이 다 있어?’라고 어이없어했지만, 사람에게 아주 나쁜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일을 쉬게 되면서 엄마에 일상에 참견할 수 있게 되었다.

 



11월 18일의 일기: 영양주사


 

병원 보호자 침대에서 지내며 해야 할 일을 확인하다가, 퇴원하고 기력이 없어서 영양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갔다는 암 환자들의 이야기를 봤다. ‘엄마도 퇴원하고 맞으러 갈래?’라고 물었지만, 확실하게 간다는 이야기는 없었고 퇴원하고도 그럭저럭 지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지럽다는 얘기가 나왔다. 위를 절제한 사람들은 영양 섭취가 쉽지 않아 비타민B12가 결핍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고, 주사를 맞으면 된다는 얘기를 얼핏 들어서 병원을 찾아가기로 했다.


동네에서 주사로 유명한 병원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알아볼 것도 없었다. 비타민 주사가 목적이라 큰 기대 없이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는데 의사는 뜻밖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친절했다. 엄마의 병력과 지금 복용 중인 약을 확인하고, 수술 이후 증상을 차근차근 듣더니 몇 가지를 섞어서 맞으면 효과가 있을 거라고 했다. 자주 맞으러 오란 말을 예상했는데 한 달에 한 번, 많아도 2주에 한 번만 맞으면 된다고 했다. 수술하고 나면 잘 먹고 회복해야 하는데, 하필 부위가 위라서 제대로 못 먹어서 이렇게 되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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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과 아미노산과 이런저런 걸 섞은 주사는 15만 원 정도 했고, 병원은 익숙하게 보험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챙겨줬다. 엄마는 수액실로, 나는 서류를 챙겨 들고 옆 건물 카페에서 시간을 죽였다. 15만 원이나 하면 맞고 나서 바로 효과가 있을까, 이걸로도 아니면 어떡하지,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렀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주사 들어가는데 한 시간 반이면 된다고 했는데 꼬박 두 시간 걸렸다. 그 가격에 이 정도 시간이면 효과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엄마는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어지럽다고 하지 않는다. 천만 다행이다.

 

 


11월 23일의 일기: 장 보기


 

그간 식자재 구매 1순위는 유기농, 2순위는 국내산, 3순위는 수입 유기농이었다. 시장과 마트는 국내산만 충족시켰고, 인터넷은 드넓었지만 직접 보고 고르는 게 아니라서 뭘 사야 할지 바로바로 생각나지 않아서 유기농 매장을 찾게 되었다. 아직 엄마가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라서 사람 많은 백화점 식품관은 어려울 것 같았고, 멀지 않은 곳에 한살림 매장이 있어서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간식을 발견했다.

 

연근 칩, 현미 과자처럼 얼핏 들으면 맛없어 보이고 입맛에 따라 실제로 이런 걸 왜..? 할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우리에겐 좋은 발견이었다. 유기농+국내산으로 만든 디저트는 별로 없고, 있어도 입맛에 맞지 않아서 고민이었던 터라 차라리 간이 거의 안 된 깔끔한 게 필요했다.

 

음식의 순수한 맛을 왜 느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색다른 식감과 모르는 맛이 필요했다. 남들이라면 앉은자리에서 다 먹었을 수 있는 양을 여러 번 나눠서 먹어야 한다든가, 재료의 순수한 맛을 느껴야 하는 건 조금 서글픈 일이었지만 먹을 수 있는 게 늘어나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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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하나로마트를 발견했고, 한살림에 없던 식재료와 조금 다른 현미 과자를 발견해서 같이 사서 돌아왔다. 그날 이후로 우리의 또 다른 장보기 루트로 한살림-하나로마트가 생겼다. 그 어떤 자극적인 것도 없는 식재료들이 장바구니에 담겼지만, 이정도면 제법 괜찮다.

 

 

 

11월 24일의 일기: 미역국 없는 생일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미역국이 없고 케이크가 없을 뻔한 엄마의 생일이었다. 미역을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였고 엄마도 소화할 자신이 없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목록에서 미역국이 내려갔다. 그래도 생일 분위기는 내야할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오빠가 비건 케이크를 사오기로 했다. 홀케이크는 미리 주문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서 비건 케이크와 글루텐&밀가루 프리의 조각 케이크로 구색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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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설탕 당근 케이크와 아보카도가 들어간 초코케이크가 제일 부담이 없었고, 유자케이크는 산뜻한 맛으로 입맛을 당기게 했다. 복숭아 케이크가 그중 그나마 케이크스러운 단맛이었지만 기존 케이크의 묵직한 맛은 없었다. 글루텐이 없어 부스러지고 흐트러지는 식감에 디저트답지 않은 깔끔하고 가벼운 맛이라 건강을 생각하지 않았으면 선택지에 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젠 음식의 맛보다 재료를 따질 때라서 이런 선택지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11월 29일의 일기: 알 수 없는 통증


 

다른 건 다 예상 범위 내에서 발생했는데 몸의 통증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동안 덤핑증후군 한 번 겪지 않았는데 난데없이 갈비뼈 아래 통증이라니. 검색해보니 남들도 겪었지만 몸에 이상이 없다는 말에 하루이틀 지켜보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

 

절제 부위가 왼쪽 가슴 아래 갈비뼈쪽이다, 위가 없어져서 근육이 당길 수 있다, 수술을 했다는 건 몸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일이다 등 환자의 마음을 달랠 이야기가 있었지만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계속 신경쓰인다. 남들 다 그렇다니 그러구나 하고 넘길 일인지, 병원에 전화해서 이게 위암 수술 후 부작용이라고 하는 가슴통증에 해당하는 건지 확인해봐야 하는 건지, 아무 병원이라도 가서 검사해볼 일인지... 들은 바가 없어 당황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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