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8호실 환자 보호자인데요

글 입력 2020.11.02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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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실 ○○○환자 보호자인데요”


 

코로나로 입원환자에게는 상주 보호자가 한 명만 허락되었다. 간병인을 쓰는 경우나 간호병동에 입원한 경우에는 보호자가 상주할 수 없다고 했다. 딱히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너스스테이션에 들려서 “8호실 ○○○환자 보호자인데요”라고 말하고 체온을 재고 문진표를 작성했야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암환자의 가족이란 게 어떤 기분인지 알지 못했다.


엄마는 예민한 성격이 아니지만, 남들은 모르고 지나갈 일을 기민하게 눈치 채는 일이 많았다. 첫 번째 암이 그랬고, 이번 암이 그랬다. 두통약과 활명수를 제외하고는 평소 약을 잘 먹지 않던 엄마였는데, 속이 안 좋다며 계속 약국에 들르자 약국직원이 병원 가서 검사해보라고 해서 알게 되었던 첫 번째 암,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몇 개월 간격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다가 알게 된 두 번째 암. 늦지 않게 발견한 건 다행이지만, 암 발병은 어떻게 생각해도 다행인 일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 입에서 나온 다행이란 말의 앞뒤에는 속상한 마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두 번째 암의 존재를 알 게 된 건 추석을 얼마 남기지 않은 토요일 낮이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엄마가 가족단톡방에 검사 결과가 암이라고 나왔다며, 큰 병원을 예약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암이래.”라고 가족들에게 말할 때까지는 실감나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터넷 예약이 되지 않아 병원마다 전화를 걸어 “대리예약 하려는데요, 엄마가 암 진단을 받아서요.”라는 말을 입으로 내뱉게 되자 가슴 먹먹한 서러움이 밀려왔다. 조직검사했다고, 조기 위암 소견이 나왔다고 말하려니 서러움 뒤로 억울함이 차올랐다.


추석 전후로 유명하다는 교수님들의 진료를 잡았다. 이렇게 좋은 분들이니까 수술이 잘 될거라고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했다. 밤새 알지도 못하는 의학용어가 가득한 검사결과지를 쥐고 인터넷으로 검색하면서 안 좋은 얘기는 좋게 해석하고 나쁘지 않은 얘기는 그대로 전했다. 그때 나는 조기 암과 점막에만 암세포가 있다는 걸 동아줄처럼 쥐고 있었다. 어디도 전이되지 않았고 수술을 하면 나아질 거라고, 분화도가 나쁜 암세포라는 사실을 잊기 위해 애를 썼다.


정확한 상태를 알지 못하고 추석연휴를 보내면서 엄마는 많이 지쳐있었다. 짧은 시간동안 눈에 띄게 살이 내렸고, 줄어든 체중만큼 기력도 빠져있었다. 진료본 의사마다 수술이 빠르게 잡혀 어느 의사에게 수술을 받을지 고민했는데, 엄마의 고려 사항에는 ‘집에서 가까운 곳’이 있었다. 첫 번째 암을 수술한 곳이 가깝지 않아서 힘들었나 생각했는데, 수술 후 치료까지 생각하면 가족들이 오가기 쉬운 곳이 낫겠다고 했다. 일주일 뒤에 수술이 가능한 것과 친절한 의사인 것도 선택에 작용했겠지만 엄마는 결정을 내릴 때도 가족을 생각했다. 원래 엄마들은 그런 걸까. 그 순간에도 온전히 본인만 생각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까.


수술이 결정되고 수술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겼다. 열이 날 수 있으니까 얇은 이불과 손선풍기, 추울 수 있으니까 두꺼운 있는 이불과 핫팩. 일어나서 물 마시기 힘들 수 있으니까 꺾이는 빨대, 마시는 물 양을 확인할 수 있는 눈금이 있는 물병. 병실이 건조하니까 미니 가습기, 가볍게 두르고 있을 담요, 혹시 몰라 챙기는 멀티탭과 긴 충전 케이블, 세면도구와 샤워용품, 화장품, 종이컵과 갑 티슈. 여행갈 때 썼던 캐리어에 병원에서 쓸 물건들을 넣었다. 여행용 소분 공병, 여행용 파우치가 병원용으로 탈바꿈했다. 캐리어를 싸는 일이 안 좋은 의미로 정신없었다. 완연한 가을이 찾아오고 날이 선선해지면 호캉스를 가려고 했는데 우리가 짐을 싸서 갈 곳은 병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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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에서 퇴원까지 9일. 코로나로 여행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연차가 10일 남은 내가 주말 앞뒤로 2일씩 총 4일의 연차를 쓰기로 했다. 내가 엄마를 본 건 수술 이틑 날 오후, 아빠의 말에 따르면 제법 상태가 좋아진 엄마였다. 수술을 마친 엄마를 보면 세상 속상할 줄 알았는데, 눈물부터 날까봐 걱정했는데 막상 암수술을 마친 엄마를 보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어색했다. 엄마를 대하는 건 편한데 환자를 대하는 건 낯설어서.


엄마는 그날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간호사가 들어와 혈압과 열을 잴 때마다 화들짝 놀라 일어났고 혈압과 체온을 적어두며 엄마의 상태를 확인했다. 나중에서야 수술 후 폐가 쪼그라든 상태로 잠이 들면 호흡이 더 줄어들어 밤에 열이 오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걸 몰랐던 첫날밤엔 왜 열이 안 떨어지는 건지, 무슨 일 생길까봐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다. 다음 날 오전, 열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정상 체온이 되어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고도 밤이되면 다시 긴장이 자리를 잡았다. 뒤척이기만 해도 놀라면서 일어났고 의사와 간호사가 하는 말은 최대한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아니,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수술 후 3-4일이 지나고 미음을 시작하면서 상태가 나아지는 것 같았는데 그건 수액과 마약성 진통제 덕이었다. 수술 직후보다야 상태가 나아지지만, 몸이 며칠 사이에 괜찮아지는 일은 없었다. 진통제를 끊고 수액을 맞지 않게 되자 엄마는 쉽게 지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통증도 느껴서 약을 더 요청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도 왔다. 세상에 간단한 암수술은 없었다. 환자에게 회복은 조금씩 더디게 찾아온다.

 

 

 

환자의 퇴원은 수술이 끝났다는 알림


 

나는 퇴원이 회복의 신호인줄 알았다. 병원에 더 이상 있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일상에 적응하기 위한 과정을 시작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입원 목적이었던 수술이 끝났고 진통제와 수액이 없어도 되니 퇴원할 뿐이었다.

 

퇴원 후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주식인 죽과 간식을 섞어서 하루 6끼 식사를 계속하고 있다. 여전히 간이 센 음식은 피해서,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은 식사를 이어가고 있다.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저기서 유기농, 무농약, 오가닉을 검색하며 온갖 것들을 사들이고 있다.


수술 전에 최대한 아쉬움이 남지 않게 열심히 먹었으면 했지만, 진료에서 수술까지 텀이 짧았고 엄마의 상태가 좋지 않아 많이 먹지 못했다. 나중에 아쉬울 거라며 엄마한테 정말 먹고 싶은 게 없냐고 여러 차례 물어봤지만 엄마는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찾았다. 그래도 그때가 나았다. 지금은 죽과 죽 사이에 과일과 요거트, 카스테라 같은 걸 채워 넣는 정도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죄 하얗고 멀겋다.


수술 받고 파스타가 먹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아직 그정도를 먹을 순 없어서 아쉬운 대로 일주일에 한 번씩 토마토 스튜를 끓였다. 어떻게든 고기를 먹이고 싶어서 분쇄육을 사다 토마토 스튜를 끓였지만 고기가 내키지 않는다는 말에 토마토 스프로 방향을 돌렸다. 유기농 베이크드 빈, 유기농 토마토 페이스트, 유기농 파스타 소스와 채소가 들어간 토마토 스프. 가스렌지 앞에서 나무주걱을 들고 작게 잘린 채소들이 눌러붙지 않게 휘휘 젓는다. 이거라도 할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싶다가도, 언제쯤 제대로 된 걸 먹을 수 있을까 인터넷에서 본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엄마가 수술한지 이제 보름 좀 넘었다. 우린 아직 멀었다.


위가 반절밖에 남지 않아서 소화기능이 많이 떨어진다. 이정도도 많이 살린 거라지만, 먹을 수 있는 양을 얼마 되지 않고, 먹고 나서 한동안 앉아있어야 하고, 장운동을 위해 움직여줘야 한다. 엄마와 식후 산책을 몇 번 같이 했는데, 문득 이런 평범한 일상이 어느 날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암은 그래도 가벼웠고 금방 회복되었는데, 위암은 수술 전과 후가 너무나도 달랐다. 항암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때는 그저 다행이다 싶었는데, 이젠 정말 뭐가 다행인지 모르겠다.


엄마가 처음 암에 걸렸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부모님 울타리 안에서 지냈지만, 이제 서서히 내 울타리를 직접 관리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그때는 울타리라는 게 뭔지, 뭘 어떻게 세워야 나를 보호할 수 있는 건지 막막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안다. 그때 바닥에 한 뼘만한 말뚝이라도 박았으면 나는 한 뼘이라도 안전해진다는 걸. 말뚝이 없으면 뭐라도 끌어다 빙 둘렀으면 되는 거였다. 뭐라도 했으면 그만큼이라도 나아지는 거였다. 용기가 안 나서, 책임져야 한다는 상황에 부담을 느껴서, 지금 이대로도 괜찮지 않냐며 현실과 타협하면서 나는 내 울타리를 방치했다. 그리고 남은 건 후회다. 가족이 아프다고 할 때 든든히 지지해주지 못할 나약함만 온몸에 두르고 있다.


나는 내가 나쁜 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엄마와 친한 딸이니 이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되돌아보니 남는 건 후회뿐.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는데 하지 않았고, 해야하지 않아도 될 건 많이했다. 우리 둘 사이의 시간은 무한한 것만 같아서. 나는 겨울이 되면 시린 손발을 엄마한테 맡기고 춥다춥다 투정부리면서 평생을 살아도 되는 줄만 알았다. 엄마와 팔짱을 끼고 매달리듯 걸으며 어디든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수술이 잘 되었으니 5년 뒤면 당연히 완치 판정을 받겠지만, 이미 우리에겐 예정에 없던 전과 후가 생기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젠 먼 미래를 약속하는 농담이 더이상 가볍지 않기 때문에. 유한한 시간을 잘 보내는 방법을, 후회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엄마에게 내가 있어서 행복하단 말을 들을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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