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코로나 시대의 광장

글 입력 2020.11.16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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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의 다른 글

1. 청와대 국민청원은 광장이 될 수 있을까?

2. 부재의 형태로 존재하는 곳, 광장에 대하여

 

 

지난 10월 3일 개천절, 예고된 보수단체의 집회는 대규모 인원의 집합으로 인한 코로나 감염 확산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허가되지 않았다. 이에 불구하고 불법 집회가 열릴 것을 우려한 경찰은 광화문에 커다란 차벽을 세웠다. 공중보건을 위하고 국민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한 합헌적 결정이었으나 이를 바라보는 시민의 시선에는 심려가 가득하다. 권위주의적 국가 권력을 암시하는 차벽의 상징성 때문이다. 시위의 과격성으로 인한 위협을 제지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시위가 이뤄지지 못하게 하는 차벽 설치는 국가가 주도하는 집회‧결사의 자유의 침해가 과하다는 이유로 2011년 위헌 판정을 받은 바 있다. 그 이후, 2015년 세월호 1주기 추모 집회를 끝으로 종적을 감춘 차벽이 5년 만에 광장에 재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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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확산 방지를 이유로 시행된 집합금지 명령은 수많은 집회와 시위를 취소시켰다. 집회‧시위 금지 구역으로 설정된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 인근에는 일본군 성 노예제 공론화를 위한 집회가 열리지 못해 28년 만에 처음으로 기자회견으로 대체되었다. 마사회의 비리를 폭로하며 극단적 선택을 한 문중권 기수의 추모 농성장도, 코로나로 열악해진 재정 상황으로 인해 노동자들을 집단 해고한 아시아나케이오의 해고자들이 시위하던 농성장도 철거되었다. 공권력이 주도하는 방역은 집회와 시위로밖에 의견을 표출할 수 없는 약자들의 유일한 공간을 제거하였다.


차벽에 관한 우려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집회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든 차벽 설치는 곧 정부가 집회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공언한 것이며, 국가가 특정한 권력에 대항하는 시민의 목소리를 원천부터 말살시킬 수 있다는 협박에 다름없다. 코로나와 함께 등장한 ‘큰 정부’는 방역이라는 선의로 광장을 축소하고 시민의 목소리를 절제하는 데 서슴없다. 더 많은 사람이 규제 없이 모이는 다중이용시설은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보호되고,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억압받는 약자들은 그나마 지킬 수 있었던 최소한의 공간조차 보호받지 못한다.


집회와 시위의 제재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팬데믹 패닉」의 저자 슬라보예 지젝은 ‘큰 정부’보다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스며든 디지털 통제가 더욱 위험하다고 말한다. 이메일과 휴대폰을 통한 통제에 익숙해져 있으면서 코로나로 인해 통제가 심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시민의 삶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투명한 시스템의 공존을 방역의 요소로 강조하는 그는, 코로나로 인해 본격화되었을 뿐 이미 통제는 작동되고 있으며 집회와 시위의 제재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통제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광장에서도 사람들은 옆 사람을 바라본다. 옆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고, 그 사람이 자신만큼 뜨거운 마음이 아니면 실망하고, 그런 실망감을 전해 들으며 상처받는다. (중략)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바보 같을 정도로 연약하면서도 복잡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람인 것 같았다.
 

- 윤이형, 「광장」

 


그러나 현장에서의 집회와 시위는 기존의 디지털 통제 상황에도 위축되지 않고 발휘했던 고유의 힘을 갖는다. 디지털 통제가 더욱 강하게 작동하는 지금의 상황이 역설적으로 이를 드러내고 있다. 코로나 시대의 비대면 광장에서 사람들은 강하게 정제되고 재단된 메시지만을 가지고 소통한다. 단일한 목표를 갖는 사람들이 모여 복잡하지 않게 딱 떨어진 문장으로 대화한다. 윤이형이 소설 「광장」에서 그린 디스토피아적 미래처럼 광화문 광장은 폐쇄되었고 정부에 의해 개설된 깔끔한 분리형 시위 장소만이 남았다. 국민청원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동의합니다’라는 메시지만을 일률적으로 입력하며 조금씩 다른 얼굴과 감정을 가린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떤 쟁점에 대해서는 동일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또 그에 영향을 받는 각자의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피력함으로써 강해지는 현장에서의 ‘연약하면서도 복잡’한 연결은 사라진다.


이러한 변화는 집회와 시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장 보호되어야 할 광장 중 하나인 학교가 문을 닫자 교실에서 비언어‧반언어적 표현과 함께 오가던 역동적인 메시지는 반쪽짜리의 정세도(정보의 밀도)만을 가지고 온라인을 부유하게 되었다. 소통은 만남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닌 선택적인 것이 되어 축소된 통로로서 정돈되고 압축된 최소한의 메시지만을 매개한다. 이 과정에서 소통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기 어려워하고 발언의 강도가 약한 학생들은 낙오된다. 모든 학생이 ‘연약하면서도 복잡’한 연결 하에 각자의 모양대로 존재했던 교실이 비대면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일부 학생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광장은 대체될 수도, 사라질 수도 없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광장일수록 모난 돌과 같은 사람들은 탈락된다. 당연히 그곳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광장은 공동의 목표 아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타인과의 우연적이고도 필연적인 만남을 실현시킴으로써 강한 연대를 만들어내고 또 지속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소통을 단축시켜 통제를 원활히 하려는 권력의 개입이 최소화될 때 가능해진다. 그 어떤 대안적 공간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사라져서도 안 되는 광장이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정부에 의해 축소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하지만, 누군가에겐 집회와 시위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방역을 위해 광장을 차단한 정부의 결정이 아예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훗날 방역이라는 이유가 다른 것으로 치환되고, 설사 그 이유가 정부가 만들어낸 핑계에 불과할 때 시민으로서 이를 예리하게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반발할 수 있을지 자문해야 한다. 방역을 이유로 가해지는 통제가 당연시되고 있지만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인지 복잡하게 묻고 답하는 공간이 곧 광장이다. 불가피한 상황의 연속이지만 이러한 광장마저 폐쇄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 권력을 보는 시선은 다르지만 같은 위험을 인지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로 맺음말을 대신한다.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위험은 당신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느낄 때 닥쳐온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 읽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읽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통제받고 있는 것이다.”

 

 

참고 기사

곽아람, "우리가 알던 자본주의는 끝났다... 팬데믹 맞설 ‘새 공산주의’ 필요해", 조선일보, 2020.11.08.

전현우, "[취재후] ‘집회·시위의 자유’와 코로나19…공존은 가능할까?", KBS 뉴스, 2020.07.10.

"미술관 한복판에 들어선 ‘광장’ 그곳에서 열린 축제", 국립현대미술관, 2019.10.15.

 

 

[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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