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청와대 국민청원은 광장이 될 수 있을까?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02.12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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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은 실현될 수 있을까? 최인훈의 「광장」이 발표된 지 올해로 60년, 변화하는 시대와 무수한 이데올로기들로 인해 광장은 다양한 모습으로 꿈꾸어지며 민주주의적 유토피아의 상징이 되었다. 6·25전쟁은 끝났고 ‘빨갱이’라는 혐의로 지하실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는 시대도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장은 어디 있는가. 밀실이 부정되는 세상에서 광장은 허락되지 않고 사랑 없는 이데올로기만이 요동친다. 소설 속 주인공이 찾던 진정한 광장은 여전히 푸른 바닷속에 침잠하는 환각에 불과한 듯하다.


광장은 완성된 유토피아라기보다 유토피아를 향하는 치열한 발돋움 자체에 가깝다. 광장을 이루기 위한 움직임으로 인해 광장은 존재한다. 광장의 미래를 꿈꾸는 것은 부재하는 것의 실재를 위한 무모한 뜀박질이고 그럼에도 모두에게 필요하다. 광장의 현재를 성찰하는 것 또한 더 나은 광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탐색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광장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동시대 광장에 대한 고민이었다. 완성된 광장은 없다. 무에서 유로 나아가는 벅찬 시도들만이 약동할 뿐이다.

 

드넓은 세상에서 역설적으로 더욱 절실해진 광장의 실재를 두 편의 오피니언을 통해 모색하며 하나의 시도를 더해 보고자 한다. 먼저 기존하는 사회학적 담론을 토대로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표상되는 광장의 현재를 살피고, 이어서 국립현대미술관 《광장》 3부 전시와 연계 도서인 「광장」을 통해 미학적으로 표상된 광장의 경험과 모습을 기반으로 광장의 미래와 그 가능성을 그려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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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 사회에서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매일같이 무수한 공간에서 공적 논의의 의도를 가진 견해가 오가며 광장 혹은 광장을 향한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반짝이며 점멸한다. 그러나 오로지 공적 의도만으로 만들어지고 지속되며 광장의 역할을 선명히 목표한 공간은 많지 않다. 그러던 중 청와대 국민청원 플랫폼이 광장의 공허함에 지친 민중의 갈증을 해소할 목적으로 새로운 정부의 출범과 함께 등장했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라는 모토로 시작된 청와대 국민청원은 국정 현안에 대한 문제라면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일정 기간 내에 20만 명을 넘는 인원이 참여한 경우 정부가 답변해야 한다는 규정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이전에 청원 시스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제군주시대 왕에게 상소하던 관행을 국가기관에 대한 것으로 제도화한 청원권은 현재 헌법이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보장하고 있으며, 청와대 국민청원 역시 미국의 전자청원 사이트 ‘위 더 피플’이라는 원본을 벤치마킹 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민원 위주로 운영되는 ‘국민신문고’나 국회 청원 등 국가기관을 대상으로 한 청원 시스템은 이전에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가기관에서 비교적 자세한 답변과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책임을 지는 방식이 정착된 것은 청와대 국민청원이 사실상 처음이다. 세분된 청원 분야와 복잡하지 않은 프로세스로 쉽게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국민청원은 온라인에서 파편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의식을 결집하고 공론화하여 제도에 편입시키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간이 되었다. 새로운 모습의 공론장이다.

 

그러나 도입된 지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국민청원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나날이 더해져 가고 있다. 청원을 해서 별반 달라지는 게 없다는 소위 ‘청원 무용론’이다. 실제로 청원에 의해 즉각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경우는 많지 않다. SBS 데이터 저널리즘 팀 ‘마부작침’이 청원 게시판이 만들어진 2017년 8월부터 2018년 12월까지의 청원을 전수 조사한 결과, 게시판에 올라온 약 35만 건의 청원 중 답변이 완료된 청원은 71건이었으며 그중에 해결된 경우는 일부 해결을 포함하여 9건에 불과했다. 많은 양의 청원이 사실상 즉각적인 해결이 어렵거나 해결에 필요한 업무가 국회나 법원 등 정부와 분리된 국가 기관의 소관에 한정되기 때문에 2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해도 청와대 측의 명쾌한 답변을 받은 확률은 매우 낮다는 분석이다. 해당 조사에서도 청원과 관련된 정책의 추진 방향을 알리는 데 그치는 답변이 47%로 거의 반절에 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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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청원의 실효성을 위한 청와대 측의 가이드라인은 존재한다. 입법부나 사법부, 지자체의 고유 업무를 필요로 하거나 허위사실이나 폭력·혐오의 내용이 포함된 청원은 삭제·숨김 처리되거나 답변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청와대가 참고한 ‘위 더 피플’이나 영국의 전자청원이 보다 까다로운 가입 절차와 게시 조건을 통해 청원의 실효성을 높이고 조건에 맞지 않은 청원은 아예 미공개 처리함으로써 답변이 필요한 청원을 효율적으로 가려내는 것에 비해 청와대 국민청원의 게시 조건과 절차는 과도하게 헐겁다. 미국과 영국의 경우엔 별도의 절차를 거쳐 1인당 하나의 계정만을 개설할 수 있지만, 청와대 국민청원은 가입 없이 1인당 최대 4개의 계정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인터넷 방문 기록을 삭제하면 중복 참여가 가능하게 되는 기술적 허점이 청원 수 조작으로 이어진 사례 또한 밝혀진 바 있다.


가이드라인 역시 지양 사항에 불과할 뿐이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연예인의 팬클럽을 해체해달라거나 구설에 오른 운동선수를 파면하라는 청원 등 국정 현안이 아닌 데다가 청와대가 답변할 수도 없는 청원이 여과 없이 게시되는가 하면, ‘중국인 입국 금지’나 ‘퀴어 퍼레이드 개최 반대’처럼 혐오적인 내용을 포함한 청원이 조건 인원을 상회하는 동안에도 삭제·숨김 처리되지 않거나 메인 차트에 랭크되기도 한다. 이러한 청원들은 부실한 관리 속에서 정작 청와대의 책임 범위를 정확히 향하는 청원들과 무분별하게 뒤섞여 건강한 논의를 방해하고 청원의 가치와 문제 해결의 기대를 저하시킨다. 자연히, 국가 기관을 향한 신뢰도 역시 떨어질 위험이 막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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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청원은 쉽다. 그 쉬움은 건강한 광장의 조성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절차가 생략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용이성을 위해 체계성을 포기한 청원 구조는 정부의 피드백이 절차에 맞게 합당하게 이뤄지는지보다 청원인 수가 얼마나 많은지, 20만 명을 넘었는지에 역점을 두게 한다. 199,999명이 동의한 청원은 20만 명이 동의한 청원보다 중요하지 않은 의제가 된다. 그렇게 국민청원은 민심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측정이 끝나면 답변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답변이 늦어도, 해결되는 게 없어도, 묵묵부답인 입법부와 사법부의 소관으로 한없이 미뤄져 의제가 증발해도, 아무런 반발이 일어나지 않는다. 청원의 전도된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평소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정치에 관련된 정보를 습득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다수 시민의 제한적인 참정을 방조한다. 청원이 ‘합리적 무지’의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로 보인다. 합리적 무지란 정보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 정보를 통해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수익보다 클 경우 정보를 습득하지 않고 무지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이르는 경제학 용어인데, 선거에서 투표의 결과가 가져다줄 이득보다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비용이 더 크게 느껴질 경우 투표를 하지 않는 경우와 같은 상황에 빗대어지기도 한다.


촛불시위가 정권을 바꾸고 다양하게 분화된 플랫폼으로 정치가 대중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하면서 민주사회의 구성원임은 하나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이 되었고, 클릭 하나로도 정치적 견해를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세상에서 정치적 무관심은 이전보다 더 큰 무게의 과실이 되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합리적 무지 경향에 있으면서도 이에 심리적 부담을 느끼는 이들에게 하나의 창구를 내어주며 참정하기 쉬운 세상에서 참정하지 않는 이들을 끌어안는 광장을 조성한다. 클릭 한 번이면 참정할 수 있다. 시위하지 않아도, 투표하지 않아도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런 믿음을 준다. 물론 청와대의 답변 외에 실질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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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복 청원 가능성, 허술한 게시 조건 및 절차, 원론적 답변 등 개선되어야 할 부분에 대한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정부가 국민청원에 대해 견지하고 있는 관점의 변화다. 정부에서 일관되게 기치로 삼고 있는 ‘자유로운 소통’이라는 유토피아적 목표 아래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의 경계가 계속해서 흐려진다면 가능해야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어도 아무도 눈치챌 수 없게 된다. 무분별하게 게시되는 청원들은 일평균 850여 건에 달하고 추진·진행 중이라는 답변이 반절인 청와대의 피드백에 반드시 따라와야 할 국민의 지속적인 감시는 범람하는 요구 속에서 효력도 그 의지도 잃게 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 점차 자연스러워진다. 자칫 우민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낮지 않다.


광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광장을 개선하면 된다. 기술적 문제는 고치면 되고, 게시 절차는 재정비하면 되며, 답변의 부실함은 답변에 포함되어야 할 내용의 명시를 의무화하는 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국민청원이 작동하지 못한 기능이 청원 주체와 대상의 분할이라는 것이다. 광장의 약화보다 우려되는 것은 광장의 일원화다. 하필이면 그 광장이 정부 소속이다. 하나의 광장이 너무도 큰 몸집으로 실재해서 다른 부재하는 것의 실재를 꿈꾸지 않아도 된다. 꿈꾸지 않는 세상에서 광장은 스러진다. 국민청원은 밀실을 파괴했을 뿐 광장을 이루지 못했다. 청원을 바라보는 다른 시점을 견지하여 광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부재하는 것의 실재를 부지런히 상상해야 한다. 나무와 산성으로 가로막힌 광장에서만 꿈꿀 수 있는 세상은 과거로 족하다.

 

 

참고자료


김병록, 「청와대 국민청원의 개선방안에 대한 연구」, 법학논총

이성복, 「행정에의 시민참여 활성화를 위한 연구 - 청와대 국민청원을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대학원

박정호, '의식주 경제학', 네이버 캐스트

신은별, '청와대 국민청원, 하루 평균 851건 올라왔다', 한국일보

심영구, '국민청원, 1만 개당 2개꼴로 답변했다', SBS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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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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