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부재의 형태로 존재하는 곳, 광장에 대하여 [문화 전반]

국립현대미술관 《광장》 3부 전시와 소설집 「광장」
글 입력 2020.02.22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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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떠날 수 있어도 광장을 떨쳐낼 수 있을까. 광장에 걸었던 유토피아적 기대가 하나씩 무너질수록 광장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회의는 커졌고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광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안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개인들이 서로 분열을 거듭해서,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든 연결되고 연대 되어서, 그러나 하나로 묶여 범주화되지도 않아서, 그렇다고 쉽게 존재할 수도 없어서, 그렇기에 광장은 존재한다.

광장이 쉽고 간편하게 완성되길 바랐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고된 발걸음을 디디기로 한다. 멀리 돌아가는 만큼 더 많은 풍경을 가지고 와 광장을 꾸밀 수 있으리라. 이번 시도는 같은 시대의 바람을 스치면서도 미세하게 다른 결을 읽어내는 동시대 예술가들의 도움을 받는다. 총 3부의 전시를 통해 광장을 다룬 국립현대미술관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의 마지막 챕터인 서울관 전시, 그리고 해당 전시를 위해 집필된 소설집 『광장』에서 서술되고 표현되는 광장의 모습들을 통해 광장에 대해 폭넓게 고민하고 상상하며 또 하나의 광장을 이룰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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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아,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소설집의 시작을 장식하는 윤이형의 「광장」은 정부에 의해 광화문 광장이 폐쇄되고 분리형 시위 장소가 생긴다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고 이에 맞서는 이들의 연대 과정을 그린다. 느슨한 연대에 대한 의심과 거듭되는 분열에도 등장인물이 연대를 지속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이 ‘타인’으로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자신과 한 몸처럼 느껴지는 이들을 어떻게든 한곳으로 모으려고 했던 그의 노력은 결국 실패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며 서로를 지지하는 느슨한 연대로써 이전보다 한 발짝 나아가는 데는 성공한다. 타인은 타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느슨한 연대를 의심하던 이들마저 무사히 광장에 자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연대는 성취된다.

공교롭게도 전시의 시작에 놓인 작품의 제목이 <타인(Stranger)>이다. 낯선 이에게 정해진 시간에 창문에 서 있기를 요청하고 그가 나오면 작가가 그의 사진을 찍어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진 요코미조 시즈카의 작업은 처음 대면한 두 사람이 서로 타인으로만 남으나 일시적으로나마 동등하게 연결되고 소통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당연한 다름에서 비롯된 낯섦을 인정하고 공동의 목적 안에서 잠시라도 힘 있게 반짝이는 순간을 담은 두 작품이 광장을 이야기하는 각각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추구하는 연대의 형태가 다른 이들이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도 자유롭게 관계 맺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오늘날 광장의 존재를 위해 성립되어야 할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제마저도 성립되기 어려운 게 광장이다. 그 어느 때보다 광장이 이뤄지기 쉬워 보였던 환경은 단지 밀실이 파괴된 장소에 불과할 뿐이었다. 전시에서 김의천과 함양아는 밀실이 파괴된 상황을 영상 작업으로 풀어낸다. 김의천의 <썰매>는 광화문 일대가 맵으로 펼쳐지는 레이싱 게임 영상과 ‘신종 자살 클럽’ 취재 영상을 교차하여 보여주는데, 한국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영상 작업에서 모든 등장인물의 얼굴은 한 사람의 것으로 합성된다.

신종 자살 클럽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나’로 만들어 서로를 죽이면 자살이 되는 VR 자살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끝나는 영상물은 죽음을 다뤄서가 아니라 죽음의 모양이 너무나 친숙해서 섬뜩하다. 세계 여기저기에 잔재처럼 남아 있는 개인의 파편들이 나도 모르는 곳에서 불시에 나를 공격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됐다. 개인이 밀실을 잃고 조각난 채 세상에 부유하게 되는 것은 광장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작업에서 다뤄지는 두 개의 죽음은 중첩된 채 관객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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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천, 《썰매》
 
 
함양아는 재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체육관에서 자는 모습을 불안하고 불편한 앵글로 응시하며 밀실을 잃은 상황에서의 무방비함과 그에 따른 공포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상황 자체가 하나의 재난처럼 느껴진다. 더 나아가 함양아의 작업은 똑같은 장소와 상황을 점유하면서도 사람에 따라 다른(혹은 심층적인) 종류의 공포감을 느끼게 하면서, 밀실이 파괴되어 모든 이에 똑같은 공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모두가 똑같은 안전을 공유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진정한 광장이란 동등한 장소를 넘어 동등한 안전이 보장되는, 모두의 밀실이 밀실일 수 있게 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밀도 있게 전달한다.

누군가가 똑같은 조건에서 유독 쉽게 밀실을 잃는다면 밀실을 잃는 사람이 아닌 밀실을 파괴하는 행위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차별, 혹은 폭력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소설집에서 유일하게 SF 장르로 주제를 다룬 김초엽의 「광장」은 시지각 이상증을 갖고 있는 ‘모그’라는 가상의 존재를 통해 사회에서 돌연변이 취급을 받는 소통 방식이 기존의 그것을 전복하는 과정을 담는다. 모그들은 신체에 내재되어 있는 통신망에 떠오르는 소리로 동등하게 소통하며 사회로부터 배제된 공터를 위계가 없는 광장으로 전환한다. ‘기존과 다른 사람’으로 쉽게 대상화되고 판정되어 분리되는 그들은 전혀 다른 소통방식으로 배운 전혀 다른 춤을 추며 모그가 아닌 이들을 역으로 대상화하고 평등이라는 광장의 전제를 파괴하는 이들로부터 벗어나 밀실을 획득한다.

김초엽의 작품이 SF적 공간을 활용해 지극히 일상적인 사회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면, 전시에 선보여진 에릭 보들레르의 작품은 반대로 현실의 규범에 균열을 내어 그 틈새에서 드라마를 자아낸다. 작가는 국제사회로부터 미승인되어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압하지야 공화국의 국민인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하다가 국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제 편지를 보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작가는 굴하지 않고 다른 수단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막스와 대화하는 데 성공한다. 작가가 막스에게 보낸 편지들과 압하지야의 모습을 기록한 영상물로 이루어져 있는 작품은 광장이라고 믿어지는 세상에서도 대화마저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동등한 소통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피력한다. 이들을 연결한 것은 국제사회의 승인이 아닌 그것을 관통하여 가닿은 친구의 인사 몇 마디였다. 존재를 인정하고 동등하게 대화하며 서로를 이름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것. 광장의 온기는 언제나 그 자그마한 불씨로부터 지펴졌다.

이제야 광장의 실현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김혜진의 「광장」은 광장을 다다를 수 없는 공간으로 정의하며 또다시 광장의 완성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는다. 이 소설에는 함께 살지만 어딘가는 꼭 어긋나서 일치하지 않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둘이 함께 거닐기를 꿈꿔왔던 팔복광장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둘은 헤어진다. 이후에 광장이 만들어지고 광장을 함께 누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이는 사람을 새로 만나지만, 그럼에도 광장에서의 경험은 완벽하지 않았고 결국 광장이란 다다를 수 없는 공간임을 깨닫는다. 이야기는 그것이 우리에게 생긴 가장 좋은 일이라는 문장으로 맺어진다. 일치하지 않고 어긋나는 것이 곧 광장의 본질이며 다다를 수 없음을 느낀다는 건 자신의 팔이 닿는 곳보다 훨씬 높은 곳에 시선을 둘 수 있다는 뜻이기에 당장 주어진 한계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다름으로써, 다다르지 않음으로써 더 드넓은 광장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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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떠날 수 있어도 광장을 떨쳐낼 수 있을까. 소설집에 등장하는 이 문장이 선뜻 이해되지 않아 여러 번 곱씹었다. 떠나는 것과 떨쳐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떠나는 것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는 뜻이고, 떨쳐낸다는 것은 세게 흔들어 떨어지게 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광장을 떠나는 것은 내가 광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고 광장을 떨쳐내는 것은 광장을 나로부터 벗겨내는 일이다. 후자의 불가능성에 조금 더 믿음을 기울이는 이 질문은 광장은 나한테 달라붙어 나의 결정에 의해 존재가 결정되는 수동적인 대상물이 아니라 언제나 어떻게든 존재할 수밖에 없는, 엄연히 나의 바깥에서 살아 숨 쉬는 유기체라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광장이 아닌 곳을 존재하게 하는 것도, 광장을 떠날 수 있게 하는 것도 광장이기에 아무래도 광장을 떨쳐내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광장의 부재를 지적하고 다다를 수 없는 실재를 고민하는 지금 이곳의 모든 움직임마저도 광장이라는 목표점을 분명히 향해 있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일렁임으로 요동치는 파도가 되어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루어진 바다는 어느 한 곳은 꼭 적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린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이곳에, 그리고 덥고 추워도 매일 모여 무언가를 말하고 또 듣는다. 의논하고 질문하고 정리한다. 가끔은 다투고 소리를 높이고 다시 안 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모인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광장을 이해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광장을 만든 사람이 될 것이다.

- 박솔뫼 「광장」


요원하고, 아득하고, 멀다. 어떤 것을 목표하고 있을 때 그 나아감의 방향에 배치되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줄곧 써왔던 수식어를 오늘은 다른 마음으로 써본다. 어떤 꿈은 요원하고, 아득하고, 멀어서 존재한다. 떨쳐낼 수 없는 꿈을 꾼다. 어딘가 꼭 일치하지 않고 어긋나는 시간과 밝기로 빛나는 별들로 어제보다 더 반짝이는 밤을 맞이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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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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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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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오늘
    • 광장이 하나의 유토피아처럼 느껴지네요. 절대 도달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항상 그곳에 닿으려고 애쓰게 되니까요. 어쩌면 모두가 서로 다른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몸부림이 각자의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고 느꼈습니다.

      글 중에 '광장이라고 믿어지는 세상에서도 대화마저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동등한 소통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피력한다.' 라는 부분이 많이 와닿았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광장이 모이는 이유도 서로에 대한 동등함과 존언함을 인정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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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j9711
    • 김오늘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광장에 모이는 이유에 대해 주신 의견에  또 한 번 광장의 필요성을 마음 깊이 느낍니다. 말씀해주신 하나의 몸부림, 하나의 과정에 동참하고 나아가야겠다는 다짐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소중한 의견 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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