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스트레칭하러 미술관에 갑시다 [문화 공간]

코로나 시대에 전시를 보러 가는 나의 몸
글 입력 2020.11.1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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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뻐근하다.

 

필라테스와 요가로 몸을 풀어주던 때가 있었는데, 코로나가 심각해진 이후 운동시설을 찾아가지 않게 된 것도 이번 달로 두 달이 넘었다. 이래저래 바빴던 탓도 있지만, 운동시설에 가지 않으니 혼자 운동을 챙겨서 할 정도의 의지가 생기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코로나 시대가 도래한 후, 많은 물리적 운동이 온라인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그런 이동을 기회로 삼아 온라인의 영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게 된 것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몸은 여전히 ‘이곳’에 머물고 있다.

 

내 몸이 해내던 물리적 운동은 온라인으로 넘어가 그 안에서 다른 형태로 운동하고 확장되었지만, 동시에 나의 몸은 점점 정지하고, 굳어갔다. 남겨진 굳어진 몸은 앞으로 어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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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가는 길에 있는 돌담길

 

 

사람이 많은 곳은 자제하려는 조금의 마음과 웬만한 건 이제 방 안에서 처리할 수 있는 생활이 더해진 일상이 적응될 때쯤, 정말이지 오랜만에 미술관에 다녀왔다.

 

11월도 벌써 보름이 지나가는데 여태 5000원도 쓰지 않았다는 교통비 내역을 보았다. 그렇게 아침 9시부터 오랜만에 지하철을 이용해 시청역에 내려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10분을 걸었을까. 도착한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1, 2층부터 3층까지 여러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끌리는 전시부터 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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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인스타그램, 윤지영 X 스티븐콱 작품 전시 전경

 

 

도록과 작품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다가, <하나의 사건>전에서 윤지영 X 스티븐콱의 <온 힘을 다해> 외 다수의 작품을 보았다. 서울과 뉴욕, 지구 반대편에 사는 두 작가는 조각의 물질성을 공유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소통한다. 가상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형태가 없고 촉각적인 ‘불’을 조각으로 빚고, 또 다른 조각을 빚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 둘의 물리적으로 먼 거리와 심리적 관계가 전시장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세라믹 조각들은 아래에 놓여 있었고, 불의 조각은 천장에 붙어있었다. 붙어있는 불의 조각들 중 하나는 공중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도르래는 저 먼 벽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또 어느 지점의 바닥엔 스마트폰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엔 뉴욕의 스티븐콱이 있었다. 그야말로 온갖 것이 이곳저곳, 여기저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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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나는 몸을 쭈그려 세라믹 조각을 살폈다. 천장의 조각들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목을 뒤로 젖히고 발꿈치를 세우고, 스마트폰 액정 안의 스티븐을 보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벽으로 걸어가 도르래의 손잡이를 쥐고 천천히 돌렸다. 그랬더니 공중의 불 조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그 조각을 지켜보기 위해 목을 틀었다.

 

내가 요즘 이렇게 나의 몸을 열심히 쓴 적이 있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의, 낯선 경험이었다. 몸을 열심히 움직이는 공간. 혹시 내가 찾아온 곳은 미술관이 아니라 운동시설이었던 걸까.

 

*

 

짧고 길게 경험해보았던 많은 운동 중, 나는 특히 요가를 좋아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던 어려운 동작들이 시간의 흐름을 타며 묵묵히 유연하게 해내질 때, 그날의 몸의 감각은 잊히지 않는다. 어떻게 이 신체 부위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지? 그건 내 신체의 감각을 재정비하는 일이기도 했다.

 

평소에 오른쪽에서만 일하던 오른쪽 팔이 왼쪽 등이나 종아리를 만나는 낯선 일. 한 시간 정도 내 몸이 그렇게 요리조리 꺾이고 휘둘려지고 나면 각 신체 부위에 쌓여있던 일상의 몸짓이 탈탈 털려 나가고 새로운 감각으로 다음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술관에서 느꼈던 몸의 꺾임과 비틀림이 요가의 그런 몸짓과 겹쳐졌다. 바닥에서부터 내 몸의 꼭대기까지, 가장 위에 있을 줄만 알던 평소의 머리가 바닥의 어떤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기꺼이 몇 분을 땅과 붙어있는 행위. 그런 몸짓의 범위를 넓히는 일은 곧 감각의 재정비로 이어진다. 그렇게 몸에 더덕더덕 붙어있던 일상의 감각이 조금이나마 떨어져 나간 상태로, 나의 몸은 미술관을 빠져나와 다시 일상 안에 섞인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미술관에 들어오기 전의 내 몸의 감각과 같지 않다. 혹시 이것이 바로 예술적 감각을 느끼는 순간일까. 어쩌면 미술관에 오는 일은 이러한 예술적 스트레칭을 통해 감각의 범위를 넓히고, 많은 이야기를 더욱 섬세하게 듣기 위해 몸을 정비하는 시간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이 멈추지 않아야 할 이유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마스크를 끼고 다음의 미술관을 향한다. 작품의 지시에 따라 몸을 비틀고, 구부리며 그렇게 스트레칭을 할 것이다.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을 우리의 몸이 더 이상은 굳지 못하도록.

 

 

[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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