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이와의 키스 [도서]

글 입력 2020.11.0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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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본 적이 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는 본부가 있고, 그 속에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라는 다섯 감정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주인공 라일리의 감정 본부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감정은 ‘기쁨이(Joy)’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실제 우리의 삶은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만으로 이루어져있지 않다. 서로를 증오하지만 사랑하기도 하고, 한없이 소심하다가도 누군가에겐 소리 지르곤 한다. 배수연의 시집 『조이와의 키스』를 단순히 기쁨을 다룬 시라고 답할 수 없는 것도 이 지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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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에서는 ‘조이’가 종종 등장한다. 조이는 자주 물구나무를 서고 홍차를 매일 쏟고 (「조이와의 키스」) 조이라고 말하기도 하고(「조이라고 말하면 조이라고」), 당근 밭에서 조이의 개와 웃고(「조이의 당근 밭」), 부엌에서 조이를 만난다.(「휴일」) 그러나 시집에서 조이를 만날수록 우리는 조이를 알아가기는커녕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시 속의 ‘조이’는 사람인가? 감정인가? 아니면 때에 따라 바뀌기도 하는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삶에서 복잡한 조이를 만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누군가를 잃기도 한다. 『조이와의 키스』에서도 우리의 일상과 비슷한 상황에 화자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소한 상황에서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다. 우리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해 새로운 담임을 만난다. 「오렌지빛 줄무니 교복」에서도 마찬가지로 화자는 새로 배정된 담임을 처음 만난다.

 

그러나 그 선생은 어딘가 다르다. 화자는 정육점 집 딸이고, 선생은 채식주의자이다. 선생님은 오렌지 향 핸드크림을 바른다. 화자는 오렌지 향 핸드크림을 바라보며 정육점에서 사용하는 칼로 오렌지를 잘라주던 어머니를 떠올린다. 선생의 향과는 달리 화자가 먹는 오렌지는 씁쓸하고 비린 쇠 맛이 난다. 화자는 커서 엄마처럼 자랄지 선생처럼 될지 아무도 모른다. 고기의 비린내가 나는 정육점 집 딸인 학생과 채식주의자 선생은 일상적인 삶에서 미묘한 균열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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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참 좋은 토스트였습니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종종 이별을 겪는다. 사라진 존재에 우리는 비통함을 느낀다. 그러나 배수연의 시에서는 그 추모의 대상이 ‘토스트’가 되었다. 토스트를 애도하며 ‘핫도그’가 엄숙하게 추도문을 읽었다. ‘솜사탕’은 슬픈 나머지 아랫도리를 적셔 버렸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도 그 토스트가 얼마나 좋은 토스트였는지 말한다. 여기서 토스트는 사람인가? 실제 토스트인가? 혹은 그 사이의 무엇인가?

 

시인은 시 속의 미묘한 상황을 최소한 축소하여 사소한 일상 속의 이상함을 키운다. “손목이 아픈 소녀들과 결혼하여” “새 민족의 시조가” 되는 일이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나(「방주」) 선생과의 곤란한 기분 속에서 온통 탁한 오렌지빛 줄무늬 교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오렌지빛 줄무니 교복」). 무언가 필요할 때 ‘한 캔’이나 ‘한 잔’이 아닌, ‘한 모금’을 줄 수 없다.(「한모금 씨 이야기」) 또한 토스트의 사인을 추측한다.(「그는 참 좋은 토스트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일상 속의 이상함을 축소한 상황을 통해 흥미롭게 만든다. 가령 호수에 빠져 죽은 토스트가 얼마나 바삭했는지, 얼마나 좋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하면서 그 이상함을 그럴듯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일상 속의 이상함을 보았다면, 「저, 수지」와 「물과 방과 울음」, 「우리의 시가」에서는 말장난으로 일어나는 상황이 돋보인다. “안녕하세요 저, 수지예요”로 시작되는 「저, 수지」의 화자는 젖은 동네에서 잠을 잔다. 언제나 젖은 머리로 자는 화자는 덜 마른 베개가 쌓이고 머리카락이 빠져있다. 젖은 동네에 있는 남자는 화자에게 물속에 핀 곰팡이 머리카락도 빠지는지 묻는다. 화자는 아마 저수지 근처에 사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저, 수지예요”라고 말하는 화자를 보며 우리는 잠시 착각하게 된다. ‘정말 화자가 저수지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각자의 감상에 빠진다.

 

‘저수지’가 ‘저, 수지’로 되었다면, 「물과 방과 울음」에서 ‘물방울’은 ‘물과 방과 우울’이 된다. 화자는 물방울을 하나 기른다. “가끔은 덮어도 괜찮고 / 가끔은 매달아도 괜찮은” 물방울 하나를 기른다. 물방울 하나에 관상어 한 마리를 길렀으나, 창으로 관상어가 빠져나가고는 물방울 하나만 남았다. 방에는 물방울 두 개를 기르기는 비좁다. 방에 있는 물방울 하나로 우리는 다시 분절된 단어로 새로운 뜻을 만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이상함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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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가」에서는 ‘시가’라는 말로 무수한 의미를 탄생하게 한다. “아, 나의 엄지와 검지와 중지 – 그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몸통”에서처럼 담배(시가)가 되기도 하고, “도시 전광판엔 언제나 시가(市價) 백지수표”가 되고, “입을 맞춰 외치는 후렴”이 되어 시(詩)가 된다. 이처럼 하나의 말로 여러 의미를 만들거나, ‘비숍’과 ‘비숑’, ‘트럼펫 트램펄린’으로 비슷한 발음의 단어로 재미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이상함을 이끌어내는 것이 『조이와의 키스』에서는 복잡한 기쁨(Joy)이다.

 

본문에서는 ‘조이’를 ‘엔조이(enjoy)’로 설명하였지만, 나는 『조이와의 키스』를 단순히 엔조이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다시, 영화 <인사이드 아웃>으로 돌아가 보자. 주인공의 기쁨과 슬픔이 본부를 이탈하게 되고, 기쁨과 슬픔은 다시 본부로 돌아가야만 한다. 기쁨은 슬픔과 함께 본부를 이탈하게 되었을 때도 라일리가 슬퍼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슬픔을 버려두고 혼자서만 본부로 귀환하려 하는 독단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배수연의 시에서도 기쁨만의 천진난만함이 보이기도 한다. 「격자무늬 풍경」에서는 조이가 “창 안쪽에서 유리처럼” 웃고 있다. 조이의 방에는 이 층 침대가 들어온다. 조이는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가르셨다는데 / 곱하기가 아니라 나누기라니,”라고 감탄하며 다행이라고 말한다. 조이는 자주 물구나무를 서고 조이의 유년기는 거꾸로 물구나무를 섰던 것처럼 구름처럼 흘러갈 뿐이다.(「조이와의 키스」) 졸리면 홍차를 쏟아버리던 조이처럼 조이의 마당에는 강아지가 있고(「조이의 당근 밭), 조이의 고양이는 나체로 걸어 다닌다.(「휴일」) 조이의 공간은 천진난만하다.

 

그러나 항상 기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슬픔이 라일리를 정신적으로 성장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내어 힘든 상황을 극복하게 도와주고, 이는 곧 기쁨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자 슬픔 또한 중요한 감정임을 알게 되며 그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우리의 삶도 단순히 기쁨이 온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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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KHOLE」에서 열일곱 살 페드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페드로는 브라질 비닐촌에 산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거리에서 엽서와 카드를 팔았다. 그는 마치 재미난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자신의 상황을 서술한다. “나타우에 월드컵 경기장이 하나 더 생겼다고,” 말하고 한국에서 온 화자에게 인터뷰하듯이 말한다. 페드로는 마지막으로 “제 입은 아주 깊은 곳에 내려앉았는데……. 제 말이 들리세요?”라고 말한다.

 

페드로는 싱크홀 속에 있는 것일까? 그날 빈민촌의 얼굴에도 구덩이가 생겼다는 게, 사람들에게 실제 구멍이 생긴 것인지, 실제 싱크홀 속에서 페드로가 말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페드로의 인터뷰는 은근히 유쾌하면서 그 속에는 절망적인 ‘싱크홀’의 상황이 있다는 점이다. 이를 알기에 우리는 『조이와의 키스』를 단지 유쾌하게만 읽을 수 없다.

 

 

원숭이들은

밤하늘을 보고 아름다움을 알까

원숭이들은 서로의 목덜미에

불을 가져다 대는 놀라움과 슬픔을 알까

 

 

「여름의 집」처럼 분명 이 시집에서는 조이뿐만 아니라 다른 감정을 녹여내고 있다. 원숭이들은 놀라움과 슬픔을 알까. 화자는 밤새 장마를 받아 적지만, ‘너’는 빗소리밖에 듣질 못한다. 그러나 화자는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온연히 비워 ‘너’에게 준다. 혹은 우리는 서커스를 하면서 즐거운 서커스 아래의 슬픔을 말하기도 한다.(「우리들의 서커스」)

 

서커스단원들은 “스스로 누군가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무거워서” 일부러 하품을 크게 했다. 하품으로 눈물을 가려보지만, 그들은 한 번도 서커스 단원들을 잊지 않았다. 대신 눈물을 쏟아 여물을 삶을 뿐이다. 그들을 대신해 별들이 “싸르락 싸르락” 반짝였다. 분명 슬픈 상황임에도 발랄한 분위기를 내뿜는 시가 독특하게 느껴진다. 기쁨처럼 보이는 감정 아래 놀라움과 슬픔의 감정을 아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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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노아의 방주 신화를 떠올려보자. 멸망 속에서 새로운 삶을 위해 노아의 방주에 몸을 맡긴 생명들. 새로운 세계를 위한 희망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주」에 있는 사람들은 희망보다 “그 전에 육지에 닿을 수 있을까” 걱정하고, “시체 위에 집을 짓고 새 민족의 시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방주」의 노아는 손목이 가는 여자 아이를 좋아하며, 그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선택받은 자들이며 그 외에는 모두 저주를 받은 불한당이라 한다. 노아는 무지개를 삼킨 채 소녀들과 자고 있을 것이다. 신화화된 노아는 「방주」에서는 폭력적인 존재가 되어 세계를 장악한다.

 

폭력은 「엉덩이가 많은 정원」에서도 보인다. 엉덩이가 많은 정원에는 정원사가 세 명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 세 명 모두 교대로 근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피아니스트처럼’ 움직였고 소리를 감추기 위해 발바닥에서 ‘목화솜’을 달았다. 환상적이고 “리시안셔스의 레이스”, “황혼의 무렵”에는 유려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은근한 폭력이 담겨 있다. 그들은 턱시도를 입고 “면장갑을 낀 채로” 정원을 독창적이게 만들어야만 하며 소리를 내어서도 안 된다. 교대 근무인 정원사 세 명에게는 분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엉덩이가 편안히 잠이 들고 꽃이 선명한 정원은 그 속의 폭력을 은근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게만 한다. 수많은 기쁨 아래에는 다양한 감정이 파묻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 기쁨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기쁨을 계속 찾기 위해 살아간다. 그 기쁨 속에 숨겨진 놀라움, 슬픔 등의 감정을 다시 겪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기쁨을 맞이할 때의 기쁨(Joy)과의 키스는 더욱 진하게 될 것이다. 조이는 “분명 키스를 아껴 두었을”테니 『조이와의 키스』는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배수연의 시집을 읽으며 우리는 기쁨 속의 다른 감정을 찾으며 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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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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