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모니터 너머의 당신을 생각하며

글 입력 2020.10.2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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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너머의 당신


 

올해 초에 나는 꽤 깊은 무기력에 빠져있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그 무기력을 지나왔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는 정신없이 몰입할 일들이 없는 나름의 휴식기여서 그 무력감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지쳐있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선택한 선물같은 시간이었는데, 무기력에게도 충분한 시간을 줘버린 것 같다.


무력감에 젖을 때면 보통 일상을 찾아 움직이곤 했는데, 무력감이 일상이 되어버리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력교정수술(라섹)을 이유로 2주 넘게 방에 누워만 있었던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던 것 같다. 수술 후 2~3일, 길어도 일주일이면 일상생활로 복귀하는게 보통이지만, 원래 안구건조증이 심한데다 큰 안구 때문에 눈이 제대로 감기지 않아 종종 실눈을 뜨고 자는 나는 회복이 쉽게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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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쓴 1회용 인공눈물 용기로 산을 쌓아놓고 어두운 방에 가만히 누워있다 보면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우울하다는 것. 또 하나는 뭐라도 읽고, 쓰고 싶다는 것.


눈이 회복되고 나서도 해야 하는 건 많지만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느꼈다. 우울하고 무기력했던 나는 그 시간에 이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시도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신기한데, 우울하면 보통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영상이라도 켜서 봤을 내가 그때 선택한 것은 ‘랜덤 보이스 채팅 어플’이었다.


특정 어플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을 생각이다. 시중에 나와있는 거의 모든 어플을 사용해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랜덤 채팅, 보이스 채팅, 익명 채팅 어플, 소개팅 어플, 커뮤니티 어플 등 한 번씩 깔아보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중에서 과도한 과금유도를 하는 어플을 제외하고 꽤 사용자가 많은 어플 몇 개를 중점으로 사용해봤다.


첫 시작은 이랬다. 그 무렵 앱 서비스를 기획하는 수업을 앞두고 스토어에 올라와 있는 많고 많은 어플들을 하나씩 깔아서 실행해보고 비교한 후 지우는 일을 반복했었는데, 인스타에서 광고하는 각종 소개팅 어플을 사용해보다 비슷한 어플로 넘어간 거였다. 물론  UX&UI 디자인을 살피고, 수익모델을 분석하는 공부 목적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 컸다. 사람들은 이런걸 대체 왜 하는 걸까? 이런 어플은 안 좋은 방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위험한 건 아닐까. 호기심과 반감이 뒤섰인 마음으로 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뭐라고 표현하는게 가장 적절할까. 그래,

 

재미있었다.


나이도 성별도 다양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묘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익명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이 세상에 있는 이상하고 재미있는 사건 사고가 여기에 다 모인 느낌이랄까.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지. 나 역시 베란다에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기타를 꺼내들고 방에 와서 노래를 불렀다. 상대편에서 보기에 나도 꽤나 정신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신청곡이 있으면 코드와 가사를 찾아서 불러주기도 하고, 꽂히는 노래가 있으면 상대방의 인사는 듣지도 않고 내 멋대로 노래를 불렀다. 어떤 때는 미친 사람처럼 흥이 나서 춤을 추고, 어떤 사람 앞에서는 멋있는 척 기타를 쳤다.

 

내가 그렇게 평소에 하지 않을 행동들을 한 이유는,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핸드폰 너머, 목소리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릴 때 ‘심심이’에게 말을 걸면 자동으로 입력된 대답이 나오듯 내 일상, 내 현실과 유리된 어떤 공간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부끄럽고 이상한 행동들을 하거나, 감정에 휩싸여 말 못할 비밀까지도 자주 털어놔 버렸다.


물론 나만 이상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공간에서는 대부분 조금씩은 이상해지는 것 같다.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조직의 작은 형님 정도 되시는 분이 인생 조언을 해주기도 했고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거나, 내가 자신의 헤어진 전 애인이라도 되는 양 울음을 터뜨리며 집착해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의 대화에는 헤어스타일을 상담해주던 미용사 지망생과 무당이 있었고, 응급실의 간호사도 있었으며 강남의 타투이스트인데 코로나 때문에 일이 없어 노래방 도우미 일을 하는 분도 있었다. 소주 몇 병을 혼자 마시며 푸념하던 사람을 만나 진로 고민도 함께 했다, 졸업반 미대생이었는데 예술가의 길과 상업성이 높은 디자인 중에서 고민을 하고 있길래 그 사람의 지난 그림을 보며 예술에 관한 심도 깊은 토론을 했다.


또 어떤 날에는 현실의 관계보다 훨씬 밀도 있고, 솔직해질 수 있는 인연을 만났다.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일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져서 연락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겨우 그 밤뿐이었다. 처음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딱 그 정도의 관계니까. 얼굴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고 거짓말을 해도 알아차릴 수 없다. 현실의 누군가라는 의식도 잘 들지 않는 익명의 공간. 다시 만날 수 없는 관계.


그런데 어느 날, 그게 마음이 아팠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솔직한 마음을 듣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일상에서 남들에게 보이지 못할 용기를 내보기도 하다가 이 작은 핸드폰 너머의 누군가를 상상하게 되버린 걸까. 우리가 익명이라는 공간에 숨어 나눴던 작은 마음들 뒤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짧게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헤어지는 당신들은 누구일까. 나와 같이 외롭고 슬프고, 무력감에 젖어있었을까.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럴까.

 

여전히 나는 종종 외로움과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우연히 만나 마음을 나눴던 누군가가, 내 용기와 아픔과 말 못할 이야기를 간직한 이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 상상하면 조금은 견딜만해 진다. 길을 걷다 마주쳐도 모르겠지만,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나는 그 밤을 기억한다.


길지는 않았지만 짧지도 않은 내 랜덤채팅 탐방기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지금은 그 어플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핸드폰 너머의, 모니터 너머의 누군가를 상상하며 글을 쓴다. 이 모니터 너머의 당신이 내 새벽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 시간을 당신과 나누는듯한 기분이 든다.  동시에 나 역시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의 하루를 생각한다. 혹시 무력감에 빠져있다면,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모니터 너머에 앉아있을 나를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러면 적어도 나는, 당신으로 인해 조금 덜 외로워 질 테니까.

모니터 너머의 당신을 생각하며 나는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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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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