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카뮈의 시선으로 '1917'을 읽다 [영화]

필연적 부조리함에 맞서는 삶의 자세
글 입력 2020.10.2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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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 ‘1917’은 1차 세계대전 중 두 병사가 독일군의 함정에 빠져 고립된 영국군이 반격에 나서다 몰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줄거리만 보면 기존의 전쟁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급박한 상황에서 중대한 목표를 위해 역경을 헤치고 끝내 임무를 완수하는 주인공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임무를 성공시키는 데에서 오는 단순한 카타르시스만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관객들이 전쟁영화에 기대하는 긴박한 총격전과 정신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같은 요소는 ‘1917’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주인공 스코필드의 시선을 따라가며 우리는 그와 같이 끊임없이 질문하고 발버둥친다. 왜 하필 스코필드였을까? 그리고 스코필드는 왜 제 것도 아닌 사명을 기꺼이 이어갔을까? 이 글은 바로 그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영화는 두 명의 주인공, 블레이크와 스코필드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블레이크는 지도를 잘 본다는 이유로 직접 장군으로부터 명령을 전달받은 사람이자 고립된 영국군 데번셔 연대에 친형이 있는, 즉 임무에 대한 목적과 의미가 뚜렷한 사람이다.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의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얼떨결에 그의 여정에 함께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영화의 진 주인공이 스코필드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블레이크는 자신의 형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주저 없이 적진으로 향하는 데다 영화 내내 희망적이고 선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무너진 독일군 참호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후 그 여파로 충격을 받은 스코필드를 진정시키기 위해 농담을 건네고, 독일군이 모조리 베어버리고 떠난 체리나무를 보며 ‘죽은 게 아냐. 내년에 체리 썩으면 더 많은 나무가 자랄 거야.’라고 말하며, 추락한 독일군 파일럿을 구하려다 죽임을 당한다. 반면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에 비해 회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명령을 받자마자 바로 떠나려는 블레이크를 말리고, 독일군 참호에서 탈출한 뒤에는 ‘도대체 왜 나를 골랐냐’며 블레이크에게 짜증을 내기도 한다. 만약 블레이크가 주인공이었다면, 스코필드라는 캐릭터는 굳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블레이크는 임무를 수행할 능력도 있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를 성공시켜야할 이유가 있으며 선하고 낙관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블레이크는 스코필드와 대비되는 인물로 스코필드를 변화시키는 존재로서 기능한다.

 

이것은 블레이크의 죽음 이후에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죽음 이후 스코필드는 엄밀히 말하면 자신과는 상관도 없고, 그냥 포기해버리면 쉬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다. 스코필드는 블레이크가 죽은 뒤 근처를 지나던 영국군에게 발견되어 차를 얻어탄다. 그러나 이동하던 중 차가 진창에 빠지자 ‘난 가야만 해’라며 맨손으로 차를 밀어 움직이려고 한다. 에쿠스트를 나오면서 독일군을 피해 강물에 뛰어들고 급류에 휩쓸렸을 때, 포기하기 직전의 상태에서도 흩날리는 벚꽃을 보자마자 블레이크를 떠올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이전까지의 시큰둥한 모습, 체념한 듯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스코필드가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훈장을 와인과 바꿔먹을 정도로 전쟁과 그 승리가 가져다주는 영광에는 관심이 없고, 폐허가 된 민가나 참호에서 마주치는 누군가의 다정한 가족사진과 인형 따위를 볼 때마다 자신의 가족을 떠올리는 사람이다. 당연히 스코필드가 가장 원하는 것은 빨리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일일 것이다. 에쿠스트에서 만나는 여자와 아기는 그런 그의 소망과 그가 선택한 길이 충돌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저격수의 총에 머리를 빗맞고 기절한 스코필드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눈 앞에 보이는 에쿠스트의 모습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아군과 적군이 구분되지 않고, 빛과 어둠이 끊임없이 싸우며, 조명탄이 만드는 그림자는 계속 그 모양을 바꾸며 현실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에쿠스트는 그 자체로 스코필드가 겪는 혼란과 내면적 갈등을 보여준다. 그 곳에서 만나는 여자와 아기, 그리고 그들이 머무는 작은 지하실은 따스하고 포근하다. 스코필드가 바랐던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와 약속한 대로 명령을 전달하고 그의 형을 찾기 위해 그곳에 머물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누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스코필드가 이 임무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이유는 무엇일까? 위에서 살펴봤듯 스코필드가 바라는 것은 빨리 전쟁이 끝나 무사히 집에 돌아가는 것, 부인과 딸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러려면 일단 자기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당연히 블레이크가 죽고 혼자 남은 스코필드는 임무를 계속하는 것을 포기하고 아군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동안 그가 보여준 모습을 보면 오히려 그것이 더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을 ‘선택’한다. 왜일까? ‘1917’이 배경으로 삼은 1차 세계대전을 시시포스 신화에 대한 비유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영화에서 스코필드가 이전에 겪어온 삶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그의 단념적인 성격을 통해 그가 이유와 목적 없이 그저 군인으로서 주어진 명령에 순응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세이 ‘시시포스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시시포스가 아무리 돌을 굴려 정상에 올려놓아도 다시 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굴려 올라가는 것, 즉 부조리함에 대한 절망과 회의에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저항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스코필드가 다른 많은 병사들이 그랬듯,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시시포스의 무의미한 과업과 같다. 그러나 그가 블레이크와의 약속을 지키고 임무를 계속 이어가는 것을 자의적으로 ‘선택’하면서 그는 이 부조리한 굴레에서 벗어난다. 전쟁으로 인해 도구화 된 인간임을 스스로 탈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상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지만 이제 스코필드에게 이 임무는 단순한 명령이 아닌, 목적과 이유가 뚜렷한 주체적 의지가 담긴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삶이 허무하고 의미 없는 죽음으로의 여정일 뿐인들, 그것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시시포스의 형벌과 같은 무의미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의미를 찾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카뮈의 철학과 닮아있다.

 

스코필드의 선택은 단순히 상부의 명령이라서, 혹은 블레이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연적인 허무와 덧없음을 직시하고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맥켄지 중령이 말하듯 아마 내일이 오면 또 다른 내용의 명령이 내려올 것이다. 스코필드가 그렇게 고생을 해서 전달한 메시지는 아마 시간이 지나면 또 번복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코필드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중간에 포기한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이며 그가 맞닥뜨린 부조리함에 굴복하는 것과 다름없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블레이크 죽음 이전의 스코필드는 그 목적을 찾지 못한, 즉 본질이 없는 텅 빈 실존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던져진 삶에서 그를 실존하게 만든 것은 블레이크를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블레이크를 위한 선택이 오히려 스코필드 자신을 위한 선택이 된 것이다.

 

스코필드는 결국 공격 중지 명령을 데번셔 연대에 전달하는 것에 성공한다. 에린무어 장군의 명령은 이것뿐이었으므로 그의 임무는 여기까지이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스코필드가 블레이크를 위해 하겠다고 약속한 일들, 즉 블레이크의 형을 찾고 그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겠다는 것을 전부 마치는 것까지가 스코필드가 선택한 자신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스코필드는 이를 모두 끝내고 나서야 영화 내내 등장하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 이것은 스코필드 ‘일병’으로만 존재했던 그가 ‘윌리엄’ 스코필드로서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보여준다. 임무를 마친 그는 영화 시작 부분과 같이 큰 나무에 기대 눈을 감는다. 그러나 카메라는 처음과 달리 떠오르는 햇살을 마주하는 스코필드의 얼굴을 정면으로 담는다. 그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체념과 절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영화 내내 보여주었던 그 어떤 표정보다 더 편안하고 확신에 찬 표정을 하고 있다.

 

‘1917’은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전쟁영화다. 상투적인 스토리를 독창적인 연출로 풀어내며, 그 과정에서 인간됨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순응하지 않는 것, 계속되는 일상 끝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 나아가 이런 삶에서 본질을 회복하는 것의 중요성을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역설하고 있다. 어떤 선택을 하던 인간은 죽음이라는 필연적 부조리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매 순간 내리는 선택과 결정이 이 부조리함에 대한 반항이 될 수 있고, 나아가 우리의 본질을 좌우한다. 그렇기에 스코필드가 보여준 것처럼 매 순간 자신만의 이유와 목적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유한한 존재로서 생동할 수 있는 의미있는 삶일 것이다.

 

 



[이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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