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차별하지 않는 첫걸음: "앎"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10.1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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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중구 벽화마을 (출처: 부산일보)

 

 

부산 산복 도로를 걷다 문득 작은 미술관의 관장님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달동네를 살리기 위한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벽화'와 관련된 한 에피소드를 듣게 된다.

 

달동네 실거주민들은 벽화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벽화 근처에 사는 것이 가난함을 가시적으로 인증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네에 벽화가 그려진다는 소식을 들은 한 아이는 "그럼 저희 동네 가난한 동네예요?"라고 질문을 했다고 한다. '골목 살리기'라는 명목으로 수도 없이 그려져온 벽화란 이제 어린이도 충분히 인지할 만한 '가난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명 '살리기' 정책의 대상인 사람들은 덕분에 삶이 얼마나 나아졌을까? 벽화가 지역 관광요소로 활용되곤 하지만 주민들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일상의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제도가 이토록 쉽게 한계를 드러내는 이유는 철저하게 타자화한 상태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남'의 사정은 고작 이 정도뿐이기 때문이다.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자신이 어디에서 서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쉽게 망각한다. 벽화가 빈부를 가시적으로 드러내어 거주민들에게 '가난'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상징이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도, 가려진 것들에 다가갈 생각따위 전혀 하지 않고 우리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풍경만 그림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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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는 너무 쉽고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_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저자 김지혜는 '모든 사람은 가진 조건이 다르기에, 각자의 위치에서 아무리 공정하게 판단하려 한들 편향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보지 못하는 차별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도 주지 않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장벽이 될 때 인지할 수 있다고 한다.

 

시외버스 좌석에 앉아서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경우 버스에는 휠체어 리프트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차표를 사도 버스를 탈 수가 없다. 특권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타인은 당연하게 갖지 못하고 나는 당연하게 가진 어떤 것, 여기서는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특권이다.

 


 

'당신은 차별이 보이는가?'


 

조선시대에는 노비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는 게 당연했던 시대도 있었으며 아이는 맞으며 자라야 하는 게 덕으로 여겨지던 시기도 있었다. 이처럼 상식이란 고정된 진리가 아닌, 인간이라는 불안한 대지 위에서 시대에 따라 모습을 바꾸긴 하나 이미 설정된 '당연함'을 나에게서 걷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변화란 어쩌면 지독한 반성에서부터 시작되는건지도 모른다. 무지가 차별을 방관하고 배제에 일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음을, 내가 선량한 차별주의자였음을 충분히 깨닫는 순간부터 한 걸음을 뗄 수 있는 것이다. 당연스러운 사회질서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고 차별에 가담하지 않기 위해 '선한 의도'라는 보기 좋은 핑계는 접어두고 이제 책임을 질 때이다.

 

"이 정도면 평등한 거 아닌가? 나의 특권을 굳이 파헤쳐서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거야?"

 

무감한 사람들의 문제점은 분명 존재하는 누군가의 희생을 '없음'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모르면 없는 셈 쳐버리는 거’, 그게 무슨 문제인가 하지만 흔히 거짓 뉴스와 같은 거 아닌가? 함부로 던지는 근거 없는 긍정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고 차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관종'과 '프로불편러'라는 이름 아래 둔감함을 쿨함으로 뒤덮는 경향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예민한 지적과 본질적인 의문을 은근히 따돌리는 분위기는 분명 건강하지 않다.

 

 

 

차별을 허무는 첫걸음은 앎이다.


 

합리적인 의심을 통해 이데올로기에 배제되어 '없음'으로 취급받은 가치를 찾아내는 것도, 이를 '있음'으로 전환해 보호하는 것도 모두 우리의 몫이다.

 

세상의 부조리함, 가난하고 권력 없는 자의 아픔, 소수자를 향한 차별, 내가 가진 특권, 외면하고 싶은 현실들을 지독하게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사회에서 권리란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인정했을 때야 비로소 행사할 수 있는 것이기에 차별은 개인의 잘못도, 단지 사회구조만의 문제도 아닌 우리 모두의 책임이 요구된다.

 

여기서 없음에서 '앎'으로 넘어오는 지점은 겨우 사전에 있는 몇 쪼가리 지식을 주입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자신을 차별의 서사 속으로 끌어들일 줄 아는 상상력이 있는지의 여부에 놓여있다. 공감과 배려가 숫자적 감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에겐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조금만 내려놓고 생각해보면 사실 뭐든 시간문제일 뿐이다.

 

 

 

공감과 배려의 크기는 삶의 크기와 같다.


 

사람들은 우리가 모두 같은 크기의 지구에서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 사실 들여다보면 누군가는 서울에, 누군가는 자기 가족만 오순도순 지낼 수 있는 37평 아파트에, 또 누군가는 자기 한 명 겨우 서있을 만한 정도의 공간에서 생각하고 숨 쉰다. 사람이 성장한다는 건 공감하고 배려할 수 있는 수용 범위를 점점 늘려간다는 것 아닐까?

 

'발명'과 '발견'이라는 두 개의 사건이 인간이 인식하기 전엔 똑같은 ‘무’인 것처럼, 당장 방문을 열고 나가지 않으면 애초부터 바람 한 점으로도 존재하지 못하는 게 남의 세상이겠지만 그 없음의 영역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게 사람이 사람과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표라고 생각한다.

 

 

[정다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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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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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틛틛
    • 성장하려면 공감하고 배려하는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말이 와닿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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