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그날의 지하철

그날의 지하철_승은
글 입력 2020.10.1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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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그랬어”

 

 

 

1


 

‘왕십리행 열차가 들어옵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안전거리를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늦은 저녁, 지친 뒷모습의 지하철이 승객들을 이끌고 오늘 밤의 휴식으로 마중 나간다. 칸마다 한 명에서 두 명, 서로의 영역을 지켜주듯 이 밤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서로에게서 술에 눅진한 냄새가 뿜어져 경계선을 이룬 그들이지만, 사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긴장된 하루를 보낸 수많은 별 중 하나였다.

 

 

 

2


 

“‘너는 인복이 많아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거라고.’ 시장 안쪽에서 방앗간을 하시던 할머니가 나를 볼 때마다 하시던 말씀이야. 나중에 어른들 말씀을 몰래 들었는데 할머니가 그런 사주를 잘 본데, 무당이었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신기가 있었나 봐. 어쨌든 지금 들었으면 무시하고 넘겼을 것 같아. 그런 미신을 걱정을 하기엔 현실에 더 급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으니까. 그런데 어렸을 땐 그게 안 되잖아. 그 시절엔 작고 사소한 말 한마디가 나에겐 우주가 되기도 하니깐, 할머니의 진한 인상에 움츠러들었을지도 몰라. 그런데도 그땐 할머니의 흐린 눈을 꽤 오래 응시하고 있었어. 할머니 표정 곳곳에 자리 잡은 깊고 얕은 모든 주름의 감촉이 느껴질 만큼이나. 그때의 나에겐 인상적이었어. 그날의 분위기나 내 감정,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말이야.”

 

일기를 쓴다는 것은 그날의 나를 기록하는 일,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별거 아닌 평범한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 그리고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며 쓰는 한 편의 시나리오. 어떤 영화처럼 주인공의 일생을 기록하는, 무엇보다 소중한 그 행위.

 

취중진담이라는 노래가 있다. 노래엔 이런 구절이 있다.

‘어설픈 나의 말이 촌스럽고 못 미더워도

그냥 하는 말이 아냐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

 

오늘 밤 승은의 일기는 취중진담이다. 슬프고, 지치고, 이유 없이 우울한 감정들이 갑작스럽게 새어 나오는 그런 날이었다. 외로운 지하철 안에서 그는 재킷 안의 펜을 꺼낸다. 그리곤 몽롱한 기분에 힘입어 잠시 숨죽여 본다.

이 지하철의 종착역까지.

   

지친 몸을 이끌고 자리 잡은 그녀의 자리엔 달빛이 고개를 내민다. 5-2칸에 들어온 노란 달빛에 흩날리는 감정이 조금씩 묻어간다. 그녀에게 투영된 빛은 조각난 그의 마음에 찬란한 오색 빛을 뿜어낸다. 빛의 색을 감히 엿볼 수 없지만 그 빛이 일기장에 차분히 내려앉는 것만큼은 선명하다.

지친 그녀는 지하철 의자에 기대어있다.

 

 

 

3


 

재능이랄 것까진 아니지만 어린 나이의 낭만을 키우기에는 적절한 정도. 그 정도의 가능성이 나에겐 있었다. 교내대회가 있으면 전날 밤, 책장과 연결된 나무 책상에 기대어 쓴 글로 장려상을 받곤 했다. 매번 주제는 진부했다. 꽃들이 만개하는 5월이 다가오면 사랑하는 가족들이나 은사님을 위한 글, 하늘이 땅에 비쳐 붉고 노란 색이 물들어가는 10월이 오면 범국가적인 글을 쓰곤 했다. 12월이면 이별을 위한 편지를 썼고 몇 달이 지나면 다시 첫 인사를 고민하곤 했다. 그 시절의 글은 대부분이 형식적이었음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심이란 것이 여백에 녹아있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글 쓰는 것을 사랑하나 보다. 내 삶의 일부는 이 작은 일기장에 담겨있지만, 교무실에서 빌린 a4 종이 몇 장에 내 전부를 담던 적도 있었다.

 

스무 살 봄은, 대학의 교정에서 맞이했다. 모두가 내일의 낭만을 기다리는 이곳에서 나는 매일을 꿈꿨다.

 

 

 

4


 

글을 사랑하던 아이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글을 쓰는 삶을 꿈꿨다. 자신의 삶이 특별하거나 위대하지 않더라도 쓰는 행위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지적호기심이라는 영리한 변명의 결과물은 순수 학문이었다. 왜인지 이를 두고 주변에 사랑하는 이들은 나를 질책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단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차선책을 고려해야 한다고, 녹록지 않을 거라고. 짧은 삶을 살아오며 그동안 가장 많은 조언이란 것들을 들은 시기였지만 그 범위는 한정적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가능성의 크기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던 그 덩어리가 사람들의 입김을 통해 기분 나쁜 습함으로 만져졌다.

 

가끔은 어렵다. 목적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가 너무 사전적인 것이. 사전적인 그 정의가 너무 원망스럽다. 누군가는 수단과 과정에서 이미 그 목적이라는 것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은가. 그놈의 사전은, 사람들이 모두가 다 알고 읽은 그 사전이 원망스러웠다.

 

그 무렵의 해는 속절없이 흘러갔다. 의지만 있다고 어떤 행위가 가능한 것이 아닌, 생각해보면 모래알을 한 움큼 손에 쥐었을 때 손 틈 사이로 사라져버리는 기분이었다. 그 시절 지나간 4번의 여름과 겨울은 서로를 의식하며 도망가기 바빴다. 애매했던 난 재능과 함께 작아지곤 했다. 친구들에겐 열등감을 후배들에겐 두려움을 느끼며 어떤 계절에도 옷을 벗지 못한 채 달렸다. 혼자만의 경주가 끝나겠지라는 희망과 함께.

 

여전히 글은 좋아했다. 주말엔 소설을, 늦은 저녁엔 에세이를 읽었고 매일 아침엔 시를 읽었던 것 같다. 재밌었던 점은 종이에 남겨진 지난 시간의 흔적들을 읽다 보면 시간여행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 나라에도 예부터 뛰어난 문인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그들의 말이 정답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특정 누군가를 지칭하는 건 아니다. 그냥 난 매번 지난 시간의 존재감에 항상 웅크려 왔다. 그래서인지 전해져 내려오는 속담을 싫어한다. 차갑게, 구차한 설명 없이 탁 내뱉는 그 마디들이 매번 시리게 다가왔다. 모두가 부정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왜인지 그런 따스한 온도의 것들은 눈에 밟히지 않았다. 우물 안의 개구리를 생각할 때마다 내 피부의 점도가 높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어두운 지하를 비추던 지하철 창문은 딱딱한 돌무더기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안에서 맴돌았다. 조금씩 차오르는 수면에 적응하며 하늘에 닿고자 노력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5


 

4년이라는 시간은 우물에 올라 드넓은 지평선을 마주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자유라는 허울은 지는 노을과 함께 사라졌고 그녀는 해가 저문 후 찾아오는 한기를 느꼈다.

 

“결국 난 억울하단 생각이 들어. 악착같이 살았다는 믿음이 있었거든. 미약한 재능을 깨닫곤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찾아 하곤 했어. 취직하려고 스펙 챙기고, 누구 한 명이라도 더 만나면 뭐라도 얻을 수 있을까 막연한 생각에 만난 사람만 수십 수백이야. 물론 다 기억이 나진 않아. 스쳐 지나갔을 뿐이니깐. 인복이 많다는 사주가 이런 거라면 진작 다른 사람한테 내 인생을 팔았을 거야. 매일 같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게 되었는데 왜 외로울까. 혼자 있지 않다는 게 외롭지 않다는 것과 동의어가 아닌가 봐. 갑자기 어른이 되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어. 꿈을 좇으면 망상이라 하고 꿈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체로 허상이 되어버리잖아. 현실을 마주한 게 내가 처음으로 선택해본 거라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하겠어.”

 

 

 

6


 

종착역에 도착했다. 넋두리 같았던 오늘의 지하철에서 그녀는 지난 과거를 걸어왔다. 언젠가 그녀는 오늘을 회상하며 그리워할 것이다.  그녀는 조금 지친 밤하늘의 별이었다. 빛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구름 위에 떠 있는 그런 존재였다. 오늘 밤 그녀는 피곤함에 몸을 맡길 것이다. 모두가 그렇듯, 내일이 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날을 살아갈 것이다.

 

“잠에 들기 전엔 일기장에 항상 내일 할 일을 정해 놓곤 했어. 이른 시간에 일어나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회사에서 간단하게 할 일들, 그리고 늦게나마 집에 들어와서 해야 할 일을 적어놨지. 내 유일한 행복이라면 이것들을 완벽하게 수행했을 때야. 큰 사건이나 중요한 일정이 써있진 않지만 그래도 내 짧은 일상의 증거라 미련을 없애진 못하겠어. 그냥 난 내일도 지하철에 앉아서 출근을 했으면 좋겠어. 조금 이른 시간에 퇴근까지 할 수 있다면 완벽하고.”

 

 

[정용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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