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에밀리 파리에 가다(Emily in Paris) 'Sexy or Sexist?' - 여성재현이미지의 역사 [시각예술]

글 입력 2020.10.1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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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파리에 가다(Emily in Paris)>

 

 

 

"Sexy or Sexist"


지난 2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릴리 콜린스 주연작 <에밀리 파리에 가다(Emily in Paris)>는 현재 한국 콘텐츠 Top 4위에 오르면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미국 시카고에서 마케팅 회사를 다니는 에밀리가 상사 대신 프랑스 파리로 인사이동을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룬다.

 

총 10화로 이루어진 에피소드 중 세 번째 주제는 'Sexy or Sexist', 사회가 섹시와 성차별을 규정하는 모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에밀리는 회사의 VIP 고객사인 향수 브랜드 광고 촬영 현장에 방문하고 광고의 내용이 여성에 대해 성차별적인 시각을 담고 있음을 발견한다. '향수를 입었다'라고 설정이 된 여자 모델이 나체로 다리를 걸어가고 남자들은 선망의 대상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나체의 여자가 흰 새로 변해 날아가 버리는 걸로 광고는 끝이 나는데, 이 광고의 제목은 다름 아닌 'A Dream of Beauty(미인의 꿈)'이다.

 

에밀리는 "저게 대체 누구의 꿈인가요? 남자예요, 여자예요?"라고 물으며 현대 사회적 흐름에 부적절할 것 같다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프랑스 남자인 광고주 앙투안은 "모든 남자에게 선망하고 탐내는 대상이 되는 것, 그것이 여성의 꿈 아니냐"라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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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파리에 가다(Emily in Paris)>


 

"그것은 남성의 시선(the male gaze)이죠"

 

'여성은 대상이고 권력이 남자에게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에밀리에게 앙투안은 "권력을 쥔 건 여자예요. 아름다운 데다가 알몸이라면 더욱 막강해지죠."라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외적인 모습으로 남성에게 인정받는 것이 꿈이라면, 이는 철저하게 평가가 기반이 된 점수 매김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를 자초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여성의 주체성은 상실되게 된다.

 

에밀리와 같이 편협한 시각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여성에게 사회가 내놓는 대답은 "칭찬인데 왜 그래?", "왜 이렇게 예민해요?"이다. 한 마디로 사회적 관습을 부정하는 '프로 불편러'로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실제로 앙투안은 에밀리에게 "당신은 남성의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라고 되물으며,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식의 고정관념을 내비친다. 이 잘못된 사회적 구조에서 불합리함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아름다운 문화를 들쑤시는 꼬챙이처럼 느껴지나 보다.

 

'내가 널 좋게 봐준 건데 기분이 왜 나빠?' 그 자체가 권력자 중심의 시선이다. 게다가 '좋게 봐서'에서의 '좋음'도 고정관념을 기반한 판단이기 때문에 그 결과에 우리가 고마워해야할 필요는 없다. 언제나 '예쁘시네요'라는 칭찬 뒤에는 당연하게 '감사하다'가 따라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되게 기괴한 일이다. 당신의 잣대로 마음대로 나를 예쁘다고 평가해 주셔서 감사하다? 내가 당신에게 예뻐 보이는 게 감사할 일인가?

 

누군가를 인격을 가진 사람 이전에 성별에 의거해 판단하는 무례함. 이에 대한 어떠한 경각심 조차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웃어 넘기는 에밀리의 상사 '실비'는 쿨한 여자, 웃지 못하는 에밀리는 프로 불편러로 대우받는다. "난 여자지 페미니스트가 아니에요." 에밀리의 상사이자, 앙투안의 내연녀인 실비가 앙투안을 옹호하며 하는 말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지극히 왜곡된 인식이 한국에서만 현존하는 이슈가 아님을 보여준다.


*


여성에 대한 차별적 재현은 언제부터 존재했던 것일까? 미를 대표하는 여성의 몸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인식 변화를 가장 잘 반영하는 매체는 바로 미술이다. 미디어가 등장하기 이전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 사회적 요구를 잘 반영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아멜리아 존스(Amelia Jones)는 <어디에서 어떻게 아름다움이 즐거움을 주는지 모든 사람은 알고 있다. (Every Man Knows Where and How Beauty Gives Him Pleasure)>에서 임마누엘 칸트, 요한 요아힘 빙켈만, 러스킨이 주장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미학이라는 것은 남성 주체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나 사회적 접근이 주는 힘에 대한 공표와 관련해 작동하는 담론에 대한 전략적 모드라고 말하며 여성의 누드는 순수함을 상징하도록 백인종으로 설정되어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도 외설물도 아닌 '예술'로 인정받게 한다고 주장한다.

 

Emily in Paris의 광고 촬영 장면에서도 등장하는 여성의 누드는 서양 미술사의 하나의 양식으로 카테고리화 될 정도로 중요한 주제이며 동시대 미의 양식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여성 누드 이미지는 20세기 무렵까지 비현실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상을 고착화 시켜왔기에, 아무리 매력적인 자신을 주체적으로 뽐내는 듯 보여도 이는 남성의 응시를 기반으로 하는 'Sexist'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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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노예와 함께 있는 오달리스크>, 1842

 

 

프랑스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의 노년작인 <오달리스크와 노예>는 윤곽선을 강조해 평면적인 특성이 두드러지는 전형적인 앵그르의 화풍을 보여준다. 근동 아시아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발견할 수 있지만, 사실 앵그르는 근동에 가본 적이 없으며 이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굉장히 편협적이다.

 

작품 속에서 젊은 여자 노예인 오달리스크는 아프로디테 전통을 따른 진부한 자세를 취하며 에로틱하게 묘사되고 있는 반면, 동양 여성은 풀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고 흑인 여성은 배경 흡수되어 감춰지고 있다. 인종이 다른 인물들의 대비를 통해 오달리스크의 관능적인 순백의 순결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시 서양 남성이 가진 아시아에 대한 성적 환상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수단으로 오달리스크라는 주제를 선택하였고 이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문제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적 시각이 담겨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적 대상화(sexual objectification)'는 인격을 배제한 채, 오로지 성적 행위의 대상에 입각해서 사람을 바라보는 사고 체계로 정의된다. 여기서 '인격을 배제함'이 중요한 포인트인데, 앵그르의 오달리스크는 인격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관람자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소극적인 태도, 여성의 누드에서 음부에 대한 사실적 묘사를 금기시하며 이를 가리는 경향을 담고 있으며,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육체로 여성을 하나의 사물로 축소시켜 단지 전시되기 위한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다. 많은 미술사 연구가들은 이러한 여성의 누드화는 사람이 아닌 그저 '살 덩어리'를 그린 것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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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첼리오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우르비노 비너스,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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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Edouard Manet, 1832-1883),<올랭피아>, 1863

 

 

마네의 <올랭피아>는 그동안의 여성 누드 작품들, 대표적으로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Venus of Urbino)〉(위)와 고야의 〈마야(Maja)〉, 앞서 언급한 앵그르의 오달리스크(odalisque) 이미지를 고려하여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네의 작품은 이전의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과는 주제면에서도, 표현 면에서 구별되는 양상을 보인다. 신화 속 여신의 이상적인 신체나 수동적인 오달리스크 이미지처럼 여성의 '미'에 대한 관념적 묘사를 시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살던 시대의 창녀를 모델로 하여 구체적인 동시대의 인간상을 담고자 하였다.

 

마네는 투박하고 뚜렷한 윤곽선으로 인물을 그려 질긴 살가죽을 강조함으로써 전통적으로 인식되어 왔던 관능적인 누드 화풍을 거부하고 있다. 당시의 미의식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 방향을 선택하여 전통적 아름다움을 희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관람객을 향해 던지는 매우 건조하고 냉담한 올랭피아의 시선은 부르주아의 위선을 지적하는 것 같은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응시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기존 여성 누드와 달리, 응시의 주체로 거듭나 관람자와 동등한 권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와 같은 개성과 인격이 완전히 상실된 여성상을 극복하고 있다. 이는 당시 아카데믹한 전통을 따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방침을 무차별적으로 뒤집어 놓은 모독 행위였기에 <올랭피아>가 1865년 살롱전에서 전시되었을 때 대다수의 비평가들은 “노란 똥배가 나온 오달리스크”라고 비하하며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페미니즘 미술


 

60-70년대 제2세대 페미니즘 운동과 함께 전개된 페미니즘 미술은 성차별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여성미술가 ‘배제’와 남성 중심의 ‘재현’ 체계를 다루며, 단일한 이론적인 범주만이 아닌 인종, 계급, 제3문제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연계해 광범위한 담론으로 발전하였다. 페미니즘 미술은 미술사에서도 몇 챕터에 걸쳐 배울 정도로 미술사에서 커다란 이데올로기적 전환이었으며, 사회적 주체로서의 여성 존재를 확립시키기 위한 페미니즘 미술은 단순히 사회 운동만이 아니라 예술적 가치 판단을 새롭게 성립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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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 걸즈(Guerrilla Girls), 무제 (From Guerrilla Girls Talk Back)>, 1985

 

 

게릴라 걸즈는 1985년 뉴욕에서 결성된 익명의 여성 미술가 그룹으로 페미니즘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들이다. 이 작품은 위에서도 언급했던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속 여성의 얼굴에 고릴라 가면이 씌워져 있었고, '여자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옷을 벗어야 하나?'라는 글귀가 영어로 적혀있다. 당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전시에서 전체 작가 중 여성작가는 5%도 안되는 것에 반해,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 중 누드 화가 85%를 차지했던 사실을 통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여성이 미술계에서 배제되어온 현실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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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크루거 (Barbara Kruger), 무제 당신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 (Your Gaze Hits the Side of My Face)>, 1981

 

 

작년 12월 서울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기획전이 열렸던 미국의 개념주의 예술가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대표작 중 하나이며, 고전적인 여성 조각 이미지를 차용해 여성을 철저하게 응시의 대상으로서 여겼던 재현 전통에 반발하고 있다. 이처럼 Emily in Paris에서도 언급된 'The Male Gaze', 응시의 문제는 페미니즘 미술사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주제이며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는 오래된 관습임을 증명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근대적 의식이 태동하면서 오랜 사회적 관습으로 빛바랜 여성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던 과도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미술작품 속에서 재현되는 여성 이미지 또한 변화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다.

 

*

 

여러 분야에서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대한 논의가 자주 거론된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다. 이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를 한 콘텐츠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강력하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문제 제기를 할 때 비로소 눈에 보이기는 하나, 그것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만연하게 존재하던 불합리함을 이제서야 하나 둘 말할 용기를 얻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Emily in Paris에서 에밀리가 성차별의 문제를 꺼냈을 때, 이에 대해 피곤함을 느끼며 다 된 밥에 왜 문제를 일으키냐며 그녀를 비난할 자격은 누구도 없다.

 

 

“나는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어떤 것의 표현 속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오용을 찾아내기를 원한다.”

 

_데이브 히키, <보이지 않는 용>

 

 

[정다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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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강수경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인용해 주신 아멜리아 존스의 책 읽고싶군요.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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