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의무적 취미 만들기 [문화 전반]

취미를 만드는 건 의무적이어야 한다
글 입력 2020.10.0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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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 계획했던 휴학 생활이 이제 점점 끝을 보인다. 올해 계획했던 일의 반 이상은 취소되었고,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조차 어려운 한 해였다고 생각한다. 팬데믹이 지속화되며 이제는 점차 이 일상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지만, 막 휴학생 타이틀을 달고 다녔던 3월 초에는 대체 뭘 해야 할 지 몰라서 허무하게 하루를 보냈던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이 있다. 바로 내가 가진 취미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것.


누구나 자기소개서를 써봤을 것이다. 자기소개서에 들어가는 문항에 '취미'는 늘 고정 사항이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써 내려간 취미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 기껏해야 노래 듣기, 영화 보기, 책 읽기, 그림 그리기 정도. 가끔 내가 쓴 취미가 너무 평범해 보인다면 콘서트 관람하기, 정도로 수정해서 제출한 적도 있다. 전공생의 취미라고 하기엔 상투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말하자면 취미를 가질 여유가 없었다. 학교 다닐 땐 시간이 없기도 했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따라서 뭘 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고. 결국,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이 셋 중에서 하나씩 하는데, 언젠가부터 그것도 돌려막기 하는 기분이라 별로 신나진 않았던 것 같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게 눈치 보이는 상황까지 이른 요즘. 집에만 있으면서 코로나 블루가 이렇게 찾아오는구나 싶었다. 콘서트 보는 걸 좋아하지만 올해는 단 하나도 관람하지 못했고, 구름 없이 높은 하늘을 바라보기만 한다는 게 여간 아쉬울 따름이었다. 특히나 나는 집에서 종일 공부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던 터라 뜻하지 않게 계속해서 처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취미를 만들었다. 우울감은 종잡을 수 없이 몸집이 커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막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올해 초에 서울재즈페스티벌 티켓을 예매했으나 결국 취소가 되며 환급돼서 의도치 않게 재정 상황이 여유로워졌는데, 이 돈으로 뭘 할까... 하다가 옷이나 화장품을 사려니 밖에 나갈 일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맛있는 걸 사 먹자니 더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기도 하고.

 

그러다가 내 머리에 번뜩 스쳐 지나간 것이 바로 턴테이블이었다. 내 오랜 로망이기도 했던 턴테이블과 LP 수집하기. 음악 듣는 것을 유독 좋아하기도 하고, 특히 턴테이블을 사용하기 위해 저 멀리 서울까지 직접 가야 했던 번거로운 과거들을 생각하자마자 과감하게 구매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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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매한 LP들

 

 

그리고 아주 신기하게도 상태가 호전되었다. 특히 무언가에 힘을 다 쏟고 방전이 됐을 즘 LP를 재생하면 충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아주 작은 바늘이 레코드판에 얽힌 음들을 읽어내는 광경을 볼 때마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아주 정교한 음들이 출력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을 종종 느끼곤 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이제껏 아티스트의 신보가 나오면 끌리는 제목만 찾아서 골라서 듣거나 어쩌다 스쳐 들은 음악이 취향에 맞을 때 그 음악만 주야장천 들었던 악습관(?)이 있었는데, LP를 수집하게 되면서 그런 습관을 개선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뿌듯하다. 아티스트가 한 앨범을 만들면서 얼마나 전력을 다했는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됐고, 더 많은 음악을 더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LP를 수집하고 향유하는 취미를 기르는 것은 듣는 즐거움과 구매의 즐거움을 동시에 충족한다. 요즘엔 바이닐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픽쳐디스크, 스플래터 바이닐, 컬러바이닐 등 심미적인 만족까지 충족할 수 있는 LP들이 다수 제작되어 수집의 즐거움을 배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LP 수집이라는 취미가 그저 부유한 자들의 취미라고만 생각했었으나, 해외 레코드 샵에서 대거 세일하는 LP들을 운 좋게 사면 한 장에 만 원에 구매할 수도 있고, 디스콕스같은 LP 거래 앱을 활용하면 전 세계에서 원하는 LP를 안전하게 구매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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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취미가 하나 생기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의무적으로라도 취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방송을 보다가 연예인들이 기를 쓰고 취미를 만든다는 말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어떤 의미로 오갔던 말인지 알 수 있게 됐다. 부정적인 흐름을 타는 무의식의 시간이 눈에 띄게 들었고, 실패 없이,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오히려 더 열중하게 된다.

 

솔직히 우리는 너무 빠른 세상에서 산다. '너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하루마다 새로운 사건 사고가 터지고, 사람들은 매일 다른 표정을 하고, 들려오는 이야기는 매일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여긴 어느 곳에서도 편히 쉴 수 없는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다. 매일 걷고, 걷다 못해 뛰고 있는 사람들 틈에 뒤처지지 않게 뛰어가다가 발목을 접질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다친 그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것 같아 불안했었던 시기가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마음을 달리 먹었다. 이때 아니면 언제 쉬나, 하는 씁쓸한 안도감을 거쳐 지금 회복되면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뛸 방법을 배울지도 모른다고.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정확하게 뛰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방법엔 충전의 시간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리라 믿는다.

 

지금만큼 취미가 필요한 때가 또 없다. 이전의 취미가 다수와 얽히는 것이었던 나는 그 길이 막히고 나서는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무력감에 빠질 때도 종종 있었으나 의외로 새로운 취미를 갖는 건 아주 간단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취미는 이미 한 차례 당신의 곁에 머물렀을 수도 있다. 그걸 잊고 바쁘게 살다 보니 자연스레 잊혔던 것이지. 조금만 더 자신에게 포커스를 맞춘다면 새로운,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그 길이 열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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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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