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격리된 감정들이 폭로되는 순간 – 도서 '윤곽'

순전히 사적인 목소리들
글 입력 2020.10.0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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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고향 마들렌


 

 
나는, 오히려 받아들이는 태도의 미덕을, 자기 의지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그런 삶의 미덕을 점점 더 믿게 되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무슨 일이든 가능하겠지만, 그 노력이라는 게―내가 보기에는―거의 언제나 어떤 흐름을 거스르는 것 같다고, 일들이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 같다고 말이다. 자연에 어느 정도 맞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전망에 내포된 어떤 인위적인 면들, 그리고 그 결과들이 내게는―거칠게 말하자면―거의 저주처럼 느껴졌다. (201)
 

 

한 입 베어 문 마들렌에서 망고맛이 은은하게 맴돈다. 망고향이 첨가된 마들렌이랬나,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빵을 부연하는 글자들에 그런 의미가 더해져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망고향인지 맛인지, 둘을 섬세하게 구분하지 않아 결국 향이 맛으로, 맛이 향으로 동일시된 것인진 몰라도 지금 내 손에 쥐어진 마들렌은 순전히 망고와의 연관에 잠식된 지 오래다. 이색적인 조합인데도 꽤나 잘 팔리는 듯했다. 바나나맛 마들렌도 마찬가지였다. 모양만 바나나를 본뜬 게 아니라 바나나맛 크림까지 빵의 내부에 깊이 가미돼 있었다. 망고보다는 조금 더 대중적인 조합이었을 텐데도 어쩐지 내 입맛엔 망고보다 썩 들어맞질 않았다. ‘고작’ 이런 상념이나 전개하는 와중에 주변에서는 숫자로 점철된 온갖 세속의 이야기가 고막 안을 물리적으로 가득 채웠다. 주식이라느니, 갭 투자라느니, 투자, 아파트, 갖가지 종류의 자본이 들러붙은 이야기들. 그런 주변부의 소망들.

 

표정에 냉기가 서렸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실제로 나는 경계 바깥에 선 사람을 대할 때, 혹은 흥미가 일지 않은 일들을 직면할 때 상당히 냉소적인 태도로 임하곤 한다. 노력을 기울여 겉으로 그런 태도를 잘 드러나지 않으려고 애쓰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특유의 로봇 같은 반응과 무념무상한 표정 때문에 쟤는 뭐 저렇게 영혼이 없나, 왜 저리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 같나, 라는 인상 비평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얼마간에는 내 책임이 있을 터였다. 사람들이 거창하게 논하는 것들보다 마들렌에서 나는 망고향이 내게는 더 중요할 때가 많았다. 마들렌의 맛에서 시작해, 마들렌에 대한 연상으로 서사를 전개했던 마르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졸업 전까지는 읽어야 할텐데, 라며 지극히 문학‘병자’스러운 상념으로 나아가기까지 한다.

 

레이첼 커스크가 소설 속 아테네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어쩌면 그녀에게 이런 층위의 느낌을 줬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마들렌보다도 별다른 의미가 없을 사건들, 현상들, 물건들. 화자로 참여했던 작가 역시도, 그녀가 소설에 담아냈던 인물의 이야기들에 사실 인간적인 공감을 표하진 못했을 수 있다. 그녀 말마따나 아무리 무언가를 애써 일궈내려는 태도가 미덕으로 비치는 세상이라 한들,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난 타인들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제각기의 숨에 얼만큼의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겠는가. 특히 자기 자신의 삶에서 소모되는 숨들에도 그러기 어려운 현실에서 도대체 어떻게, 더욱이나 그럴 수 있겠는가.

 

그렇게나 나와 타인의 벽이 공고하고, 타인의 이야기가 내게 온전히 와닿을 수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이런 와중에 노력이라는 담론을 보편의 미덕으로 소개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다 같이 노력의 미덕이란 가치에만 매몰돼 너는 참 열심히 살아가는구나, 자산 증식은 중요한 일이지, 라며 표면적인 공감만 표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위에서 인용한 구절은 이처럼 단절이 일상화된 공간을 레이첼 본인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준다.

 

 

 

2. 텅 비어버린 윤곽


 

 
“저는 세계가 다시 순수해지는 걸 보고 싶어요. 개인적인 의미가 없는 그런 공간이오. 하지만 전혀 모르는 곳, 아무도 저를 모르고 제가 아는 사람도 없는 그런 곳으로 가는 방법 말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관계나 책임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 것들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은데,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한 것 같아요.” (185)
 

 

소설 전반에 서려 있는 그녀의 체념 어린, 혹은 타인을 지극히 타인으로 대하는 어조가 오히려 주변부의 인물들을 가장 그 인물답게 그려냈던 방식으로 드러났을지 모르는 일이다. 비행기에서 자신의 옆에 앉았던 남자를 비롯해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는 강의실 안에서 그녀에게 닿았던 수강생들의 숱한 목소리들. 그녀는 단지 ‘들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단지 자신의 시선으로 비춰봤던 자기 자신의 주변인과 사건의 단상들을 토로한다. 그녀는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들을 따옴표를 활용해 날것 그대로 풀어낸다.

 

윤곽 안과 밖의 내용물은 선명한 와중에, 그것들을 둘러싼 윤곽이 정작 불분명했다는 설명이 등장한다. 단절이 일상화된 현실 세계를 묘사하기에 퍽 적절한 핵심 단어와 말들이 아니었을까. 작가라는 정체성을 형성한 상태에서 그녀의 세계는 무서울 정도로 공고했다. 인물에게 조금이라도 이입하려는, 인물을 조금이라도 통제하려는 시각 없이 그녀는 단지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떤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캐릭터’가 아니다. 말 그대로 각자의 인격체를 가지고 있는 실존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 점이 플롯의 개연성을 의도적으로 망가뜨리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단지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뿐인 사람들과 함께하는 상황에서, 개연성 있는 ‘스토리’가 가능할 리 없다.

 

누군가에게는 이 점이 작품에 혹평을 내리게 되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그만큼 불친절한 작품이다. 소설이라는 형식만 빌려와, 서사와 메시지를 결여한 채 소설인 ‘척’ 독자에게 실존들의 속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 다른 독자에게는 이 점이 작품에 고평가를 내리도록 할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테다. 작품에서 특정한 메시지를 취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 역시 인물을 제멋대로 뜯어보기만 해도 작품의 가치를 충분히 탐색할 수 있어서다.

 

내 경우, 작품을 읽는 내내 골똘히 인물의 말에 눈길을 주다가도 일상적으로 타인들에게 그랬듯, 금방 흘려보내고 내게 문제가 되는 것들을 곧장 떠올리곤 했다. 강의실에서 내 옆에 있는 다른 학생이 자신의 경험담과 결부시켜 수업 내용에서 의문이 생긴 지점들을 질문하는 순간.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해 잘 집중하지 않거나, 무심하게 들어보다가 이내 노트북으로 다른 일을 하곤 했던 평소의 내 습관이 여실히 발휘된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레이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작가로서 자신이 전지적으로 인물을 재단하기보다, 인물의 캐릭터성을 창조하기보다, 인물에게서 한 발 벗어나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상당히 무정한 존재임을, 타인에게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임을 담담하게 보여줬다.

   

 
옆자리 남자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라는 하나의 형태, 윤곽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 윤곽을 둘러싼 바깥의 세부적인 면들은 모두 채워졌는데, 정작 윤곽 자체는 텅 비어 있었다. 그 형태 덕분에, 비록 그 내용물은 알지 못했지만, 사고 이후 처음으로 그녀 자신의 현재 모습을 인지할 수 있었다. (281)
 

   

술을 사러 나가고자 마음먹었지만, 곧장 가족에게 저지를 당했다. 늦은 시간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확실히 새벽 한 시를 기점으로, 어두운 아파트 골목 근처는 성인 여성이 혼자 돌아다니기에 다소 위험한 장소로 변모하곤 한다. 그런데도 술을 꼭 마시고 싶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유효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공감해야만 했던 온갖 이야기들에 나는 통 마음이 동하질 않았다. 그 모든 게 나에게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과일 맛이 나는 맥주를 마실지, 쓴맛이 강한 라거 맥주를 마실지 고민하는 일보다 더욱이도 경계 바깥에 위치한 소리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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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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