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멈추지 않는 가능성으로, 멈추지 않는 이에게 -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글 입력 2020.09.2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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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적 목표의 실현이 절실한 요즘이다. 집단 성폭행과 불법촬영을 상습 범행했던 ‘버닝썬 게이트’의 주동자들이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을 받은 것처럼 제도적인 부분부터 만화가들의 여성혐오 콘텐츠 양산과 이를 비호하는 공동체의 지속처럼 사적 영역으로 보이는 공간에서까지,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페미니즘의 필요를 드러낸다. 견고히 뿌리박힌 불의를 드러내기를, 그것에 저항하고 싸우기를 요청한다. 제동과 반동을 위해 구른 발로 결국엔 전진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매 순간 페미니즘 앞에 서 있기를 요구받는다.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는 페미니즘의 지난한 역사와 축적된 방법론을 밀도 있게 응축한다. 저자가 페미니즘에 관해 가지고 있는 관점은 명쾌하다. 페미니즘은 단일하고 불변적으로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고 실천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연장으로서의 정치적 입장이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먼저 설명한 후, 그것의 원인인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다룬 다음 페미니즘의 실현을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는 책의 구성은 페미니즘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도, 더욱 심도 있는 고찰을 원하는 이들에도 유익한 앎의 기회를 제공한다. ‘좋은 이론은 좋은 실천이다’라는 명제를 강조하며 페미니즘의 이론적 완성도와 연구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이 책은, 독자들에 수많은 질문을 던지면서도 외로운 고민에 함몰하지 않게끔 이론적 보충을 탄탄하게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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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페미니즘 인식은 ‘나는 나 자신과 혼자가 아니다’라는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서 출발한다. 그에 따르면 ‘나’는 외딴 섬에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나’에게 수많은 영향을 미치고 ‘나’의 영향을 받는 세상 속에 위치함으로써 존재한다. 페미니즘을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위계와 권력이 실존하는 세상에서의 ‘나’를 검토하게 하는 기초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기에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을 더한다. 파편적인 개인들이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에서 ‘사유 주체로서의 나’는 더욱 중요해지고, 이는 ‘발화 주체로서의 나’와 만날 때 의미를 지닌다. 즉, 자크 데리다의 인식론에 근거했을 때 억압되는 남성중심주의적 사회에서의 여성의 주체적 사유와 발화는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론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두 가지 인식론의 접점에서 촉발되는 가능성은 수없이 흘러가고 요동치는 시대에서 페미니즘이 적극 실천되어야 할 필요성을 시사한다.

 

페미니즘은 권력으로 인해 모르기를 강요받는 세상에서 ‘용감하게 아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구조적으로, 또한 사적 공간에서도 무지의 강요가 부지런히 이뤄지는 세상에서 이론의 앎은 또한 결정적인 실천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에 관한 총 일곱 가지 질문을 제시하며 독자의 무지를 점검하게 하는 동시에 앎을 경험하게 한다. 페미니즘과 그 원인에 대한 설명 후 페미니즘이 지향해야 할 가치, 페미니즘과의 관계 맺음, 페미니즘의 도구적 가능성과 페미니스트가 체현해야 할 주체의 역할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소실되지 않고 가치를 발하는 페미니즘의 동력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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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전반에서 강조되는 페미니즘이 자명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사실 페미니즘을 가장 위협한다는 주장이 인상적이다. 페미니즘은 분명하게 절대화된 개념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맥락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를테면, 저자가 언급한 예시처럼 초기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의 구분에 큰 의미를 두었으나 현재의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을 파괴하는 다층적인 젠더 개념을 아울러 다룬다. 물론 젠더를 기반으로 한 억압과 차별의 타파라는 궁극적인 목적은 다양하게 분화되는 관점들 사이에서도 공통적으로 지향된다. 그러나 저마다 장단점을 가지며 완벽하지 않은 다양한 페미니즘은, 그렇기에 공존의 필요와 가치를 지니며 서로 보완하고 상승한다.

 

그리하여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표지-너머의 페미니즘’이다. 이는 각자 주된 표지(marker)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동시에 그 너머의 궁극적인 지평을 견지하는 페미니즘이다. 이는 강조점이 다양한 페미니즘을 이으면서도 각자의 약점을 보완한다. 저자가 든 예시처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 계급에 초점을 두느라 젠더에 따른 차별에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계급과 젠더 구조 모두에 관심을 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개념을 가져올 수 있다. 두 페미니즘은 서로 여성 해방에 대한 해석부터 그 방법론까지 완전히 다른 표지와 함께 존재하지만, 최종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지점은 같은 맥락에 있기에 서로 보충하고 마찰하며 좌절 없이 함께 나아갈 수 있다.

 

저자에게 있어 페미니즘은 무엇보다 ‘세상에서의 나를 아는 것’이다. 따라서, 결코 단일한 기준과 범주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변화무쌍한 세상에 위치하는 ‘나’의 혼성성과 교차성을 직시하는 것 또한 중요한 페미니즘 실천이 된다. 교차되고 복잡한 맥락을 무시하고 단순한 이분법으로 위계를 나누어 권력을 분배하는 기존의 젠더 개념에 균열을 가하는 트랜스젠더리즘은 그러므로 페미니즘과 맥을 같이 한다. 페미니스트를 표방하는 이들이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약자 혐오를 가할 때 페미니스트라면 ‘(생물학적)여성만을 위해 힘써도 충분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합리화하는 것이 위험한 것은 그래서다. 페미니즘 자체가 복잡한 ‘나’를 평면화하는 세상의 정체를 드러내는 움직임이며 혼성성과 교차성을 인식하는 실천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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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주장처럼 페미니스트는 자기 정체성이 아니라 책임성과 과제가 되어야 한다. 저자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강조되는 지점은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보다 그것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 그 자체다. 그것은 ‘진짜 페미니스트’를 추적하며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좁히고 타자에 의해 규정된 순수성에 부합하는 페미니즘만을 남긴 채 다양성을 소거하는 움직임이 아니다. 자신이 위치한 세상이 작동시키고 있는 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 진정으로 어떤 실천이 필요한지 모색하는 과정이다. 저자가 넓은 폭으로 제안했듯이 페미니즘의 ‘진정성’은 타자에 의해 단일하게 규정되지 않고 다양한 맥락과 관점에 의해 주체적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페미니즘을 불변하는 정체성이 아닌 무언가가 ‘되기 위한’ 과제로 접근해야 한다.

 

지배에 대한 저항적 움직임인 페미니즘은 필연적으로 편안하고 안락할 수 없다. 끊임없이 세상을 인식하는 동시에 세상의 모순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순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나 자신 하나에도 수없이 많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나에게 필요한 유일한 해방구가 아니다. 다른 모순에서도 해방되어야 할 것이고, 또 다른 모순에서는 도리어 타인을 억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분법을 타파하고 해방과 평등을 목표하는 페미니즘 인식론과 실천이 다른 모순을 타파하는 데 같은 맥락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페미니즘 안으로 들어가 완벽히 그 내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으나,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그래서 또한 무한한 갈래로 뻗어 나가는 길이 예정되어 있는 이유다. 멈추지 않는 가능성으로 존재하며 멈추지 않는 이에게 가닿을 페미니즘의 가능성은 아직 너무도 큰 희망이다.

 

 

[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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