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저는 오늘 하루 고독하게 보내야겠군요 - 윤곽

글 입력 2020.09.2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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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커크스는 영국의 소설가다. 1967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커스크는 26세에 첫 소설 <아그네스 구하기>로 휘트브레드 상을 수상했다. 그 후 <후유증>등의 소설, 논픽션, 극작 등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커크스가 결혼 생활과 이혼의 경험을 솔직하게 담은 회고록 <후유증>은 영국 문단에서 큰 파장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작품이 여성을 짐승으로 비유해 모성을 무자비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후유증> 이후 커크스는 긴 공백 기간을 가진다.

 

공백 기간 후 그녀가 시작한 새로운 형식의 소설이 바로 이 책, <윤곽>이다. <윤곽>은 '윤곽 3부작으로 불리는' 커스크의 <윤곽>, <환승>, <영광> 세 작품 중 하나이다. 기존의 서사 양식에서 벗어나 '지극히 개인적인' 글쓰기 기법을 시도한 커스크는 <윤곽>에서 자전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진실성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사람들을 알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 뿐입니다. 저는 그런 만남에 집중했습니다. 다른 틀이나 맥락이 더 이상 제게는 없었으니까요."


- 작가 인터뷰 중

 

 

소설은 낯선 만남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파예는 여름 학기 글쓰기 강의를 하러 아테네로 향한다.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에서 그녀는 옆자리에 앉은 남자와 말문을 튼다. 그는 지루함을 달래려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파예에게 들려준다.

 

남자는 첫 번째 아내와 아이 둘을 낳고 재산을 늘려가며 풍족한 생활을 했다. 그의 첫 번째 결혼은 삶에서 가장 행복하고 조화로운 시절이었지만 한 번의 말다툼으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남자는 다시 한 번 결혼하지만, 두 번째 아내는 사치스러웠고 그는 평온했던 과거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두 번째 아내와도 이혼하고 다시 세 번째 아내와 결혼한다. 그녀는 순수하고 검소했지만 이젠 남자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혼한다. 결국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으로 남은 삶의 내력.

 

파예는 경청하면서도 의심하며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무슨 일이 있었어도, 자신을 사랑을 믿는다는 말 이면에 그가 했을 실수나 흠결 같은 게 숨어 있는 게 않을까 하고.

 

이 소설에는 줄거리라고 할 게 크게 없다. 파예가 아테네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이 각자 하는 이야기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게 전부다. 등장인물들은 파예를 알지만, 서로를 알지는 못하고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다른 인물들에게 자리를 내 준다. 파예는 글쓰기 선생으로서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다. 이야기는 연속되지 않고, 인물들은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수신자가 있는 기나긴 독백처럼 말한다.

 

 

"두 아들이 무엇보다 원했던 것은 자신이 옳고, 상대가 틀렸다는 판정을 받는 일이었지만,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싸움은 절대 해결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사실을 밝히는 게 목표인 이상 해결은 불가능했는데,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진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요점이었다. 이제 둘은 꿈을 공유하지 않았고, 심지어 현실도 공유하지 않았다. 두 아들은 각각 자신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았다. 있는 것은 관점뿐이었다."

 

- 100p

 

 

회고록 <후유증>에 대한 거센 논란은 커크스가 '윤곽 3부작'이라는 새로운 작품 세계를 탐구하게 만들었다. 그 세계는 정해진 플롯도, 인물도 없으며 모든 기교가 생략된 자리에는 중첩되는 여러 개의 목소리가 있다. 작가는 그 목소리를 기록하지만, 그녀의 말은 작중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라고 말했다'라는 식의 간접적 묘사가 있을 뿐이다.

 

여러 명의 목소리와 여러 개의 관점. 다양한 연령대와 내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털어놓는다. "제가 느낀 바로는...", 혹은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엔..." 이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의 진실은 없다. 대신 목소리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겹치고 교차되어 공명한다. 어제 전화에서 들었던 사촌의 이야기, 오늘 지나가며 보았던 죽은 개, 떠난 첫 번째 아내와 비행기 옆자리에서 만난 남자. 대수롭지 않게 스쳐갈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나하나 삶의 진실을 품고 있다. 작가의 페르소나 파예가 몰두하는 건 바로 그 진실이다.

 

 

"어쨌든 진실은 남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진실을 마주하세요"

 

- 156p

 

 

그러면 파예가 겸손하게, 혹은 치밀하게 공명하고자 한 진실은 무엇일까. 그건 약간의 미끄러짐, 어긋남이다. 결혼 후에 오는 이혼, 재혼 후에 오는 그리움, 독립심 뒤에 오는 수치심 같은 것들. 우리가 완벽히 그 순간만을 살지 못하게 만드는. 실체감으로 가득한 우리 존재에 빈 공기를 불어넣는 어떤 순간들. 레이첼 커크스는 그 순간이야말로 삶의 진실이라고 보았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해주는 건 기나긴 고독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조우, 대화, 그 이야기에 감화되어 내 존재를 되돌아보는 것만이 우리의 좌표를 알게 해준다. 책의 마지막에서 파예의 작가 친구가 말한 것처럼.

 

 

"옆자리 남자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라는 하나의 형태, 윤곽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 윤곽을 둘러싼 바깥의 세부적인 며늘은 모두 채워졌는데, 정작 윤곽 자체는 텅 비어 있었다. 그 형태 덕분에, 비록 그 내용물은 알지 못했지만, 사고 이후 처음으로 그녀 자신의 현재 모습을 인지할 수 있었다."

 

- 281p

 

 

아테네에서 파예와 보트 여행을 갔던 옆자리의 남자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전화한다. 오늘 저랑 함께 보트를 타고 나가지 않겠습니까? 파예는, 인생에 관해 너무나 많은 진실을 들어버린 그녀는 거절한다. 아쉽지만 저는 다른 관광을 할 거랍니다. 그는 말한다. '그렇다면 저는 오늘 고독적으로 보내야겠네요.' 파예는 그의 문법을 지적한다. '고독적'이 아니라, '고독하게'. 그래요, 우연으로 시작해 어긋남으로 끝나는 인생. 이 역시 삶이 우리에게 남기는 진실이겠지요.

 

 
*
 
윤곽
- 삶의 윤곽을 그려나가는 이야기 -
 

지은이 : 레이첼 커스크
 
옮긴이 : 김현우

출판사 : 한길사

분야
영미소설

규격
128*188

쪽 수 : 304쪽

발행일
2020년 08월 10일

정가 : 15,500원

ISBN
978-89-356-6854-0 (03840)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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