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전쟁이 끝나도 상처는 남기에 - '체리' [도서]

글 입력 2020.08.25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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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성을 띤 소설이나 영화에서, 우리는 결말이 주는 일말의 희망이나 교훈을 기대하며 기꺼이 눈물을 감내하는 경우가 많다. 기-승-전-결의 서사적 문법은 독자에게 권태로움과 따분함을 주기도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기도 한다.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눈물의 이별을 하거나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싸우는 장면을 보더라도 우리는 이들이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안다.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쌓이고 쌓인 갈등이 결국 속 시원히 풀어지고 행복하게 재조립될 것을 알기에 우리는 마음 놓고 서사 속 갈등과 주인공의 고난에 몰입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비극은 다르다. 현실은 소설과 다르게 해피엔딩을 담보하지 않기에, 극적인 갈등의 해결을 전제하지 않기에 비극은 말 그대로 비극일 뿐이다. 그렇기에 소설이 현실과 한 발 가까워질수록 작품이 가진 비극성은 더욱 아프게 도드라진다. 눈앞에 펼쳐진 낭떠러지보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칠흑이 더 막막할 때가 있는 것처럼.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리얼리즘을 좇을 때 막막한 비극성이 더욱 강화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응원하던 인물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보다 인물을 둘러싼 주변이 전멸하는 과정을 인물 홀로 맞서야 하는 전개에서 우리는 더 큰 무력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리고 전장에서 살아남은 군인들 대다수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경험과 함께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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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체리’는 저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과 마약 중독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를 그린 소설이다. 저자는 이라크 전에 파병된 후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해 헤로인에 중독되었는데, 이 책은 저자가 복역 중이던 때 집필을 시작해 완성한 그의 자전적 소설이다. 전쟁 이후 헤로인에 찌든 채 파멸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저자의 진솔한 고백이자 담담한 폭로와 같은 책이다.


책의 제목만 들으면 상큼하고 달콤한 과일 체리가 생각난다. 하지만 ‘체리’는 미국에서 전쟁에 처음 참가한 군인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책을 읽기 전에는 나 역시 제목을 보고 과일 체리를 먼저 떠올렸다. 표지 역시 자그마한 별이 한가득 지면을 채우고 있어 ‘예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책을 완독한 후에는 총으로 사람을 죽여본 적도, 수많은 사체를 수습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탄환이 쏟아지는 전장에 내던져질 때 겪는 패닉이 먼저 떠오른다. 표지에서도 작은 별이 모여 만들어낸 커다란 해골이 먼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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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하나씩 둘씩. 영웅도 없고 전투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냥 보조이고 허울만 좋은 허수아비였다. 도로를 오가고 바쁜 척을 하면서 돈만 펑펑 쓰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다.

 

- 235p

 


나는 전쟁소설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이상하게 전투 장면에서는 몰입감이 확 떨어져 흥미를 잃기 마련이라, 애초에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은 잘 읽지 않는다.

 

‘체리’에서도 전장을 묘사한 장면이 지면의 꽤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전개를 좇는 것이 다소 힘들었지만,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전개보다는 토막토막의 사건들이다. 주인공이 어떻게 망가져 가는지, 어째서 주인공은 헤로인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작품의 핵이다.


작품은 더없이 현실적이다. 영웅 없는 전쟁의 말로를 누구보다 진실되게 그린다.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전장에서 주인공 ‘나’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치지 않는 것밖엔 없다. 이 과정에 과장이나 극적 각색이 들어가지 않아 현실 그대로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 ‘체리’의 매력이다.


그리고 이 책은 전쟁 이전과 전쟁 이후를 함께 다룬다는 점이 독특했다. 종전 후에도 전쟁이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는 듯했다. 전쟁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해 사랑하는 연인 에밀리와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헤로인에 중독되어 은행털이범으로 전락해버리는 주인공의 인생을 따라가며 나 역시 무력감을 느꼈다. 아마도 책 속 모든 문장들이 현실과 끈끈한 고리를 얽고 있는 터라 비극의 무게가 더욱 묵중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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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잠만 들면 폭력의 현장이 펼쳐졌다. 이라크의 모습이었다. 예전에 본 영화를 꿈에서 볼 때도 있었다. 꿈에서 죽어 깨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한 번 죽고 또다시 몇 번이고 죽는 통에 겨우 눈을 뜨고 나서도 온몸이 녹초가 되곤 했다. 그 외의 모든 것으로 인해 나는 무척이나 불행했다.

 

- 350쪽

 


책을 읽으며 최근 종영한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베트남 참전 이후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려, 공사장의 소음만으로도 전장에 내던져진 것 같은 환청과 환시에 시름하는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였다.

 

살아있는 것이 죄인 것 같다던 대사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나이가 비슷했던 전우들은 모두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었는데, 자신은 사지가 멀쩡하게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느냐는 죄책감에 50년 세월을 앓았던 것이다.


전쟁과 마약 모두 우리의 일상과 교집합을 이루는 소재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인생이 파멸을 향해 갈 때 진한 안타까움과 무력감을 느꼈다. 아마도 ‘나’의 파멸이 전쟁 탓이기 때문인 듯했다. 얼마나 많은 개인들이 이념과 정치 아래 파멸을 겪어야 했는지를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고, ‘체리’는 그 개인들 중 한 명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에밀리를 만난 건 2003년, 클리블랜드의 대학에 들어갔을 때다. 좀처럼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 그녀를 본 순간 단번에 이끌렸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아프게 할 운명으로 엮인다. 나는 마약에 취해 에밀리와 사랑을 나누며 현실에서 도피하다 의료 특기병으로 군대에 입대한다. 하지만 나와 에밀리 그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결정이었다. 에밀리와 결혼하고 이라크에 파병되어 갔지만 의료 특기병으로서 준비되지 않았고, 하나씩 둘씩 죽어 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영웅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에밀리와 함께 헤로인에 중독된 채 서서히 삶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나날이 이어지는데…….

 


지은이

니코 워커(Nico Walker)

 

옮긴이 : 정윤희


출판사 : 도서출판 잔


분야

영미소설


규격

130×195(mm) / 페이퍼백


쪽 수 : 432쪽


발행일

2020년 07월 27일


정가 : 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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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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