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에서 발견한 미투운동 [공연예술]

글 입력 2020.08.08 15:0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포스터.jpg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

 

작, 연출 - 박근형

출연진 - 방은희, 강지은, 성노진, 서동갑, 오순태

이호열, 이지혜, 김은우, 한충은, 이상숙

 

 

작품은 지독한 더위와 긴 가뭄이 있던 며칠 동안의 이야기다. 동생은 어린 시절 고향을 등지고 도회지로 나왔지만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평생 변방을 떠돌다 노인이 되었다. 형은 오롯이 땅을 일구고 살아왔지만 그의 삶 역시 녹록지 않다. 그래도 땅에 대한 믿음 하나로 오늘도 밭으로 나간다. 어느 날 동생은 형이 살고 있는 고향을 찾아간다.

 

그러던 중 서울서 잘나가는 직장에 다니던 형의 아들이 고향으로 내려온다. 아들은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되고 아내와 이혼 소송 중이며 어떤 사건으로 법원의 출두 명령서를 받고 괴로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형과 동생이 부모의 성묘를 다녀온 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

 

재철과 창식은 야망과 꿈을 안고 세상 밖으로 나갔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인물이다. 재철은 한때 권력과 인기를 모두 쥐었지만 성 관련 사건이 터진 후, 도망치듯 사람들 눈을 피해 늙은 부모의 시골집으로 들어왔다. 염치없이 돌아올 수 있는 곳은 오직 부모의 곁뿐이었다.

 

한편, 평생 한탕을 위해 떠돌다 감옥까지 갔다 온 창식을 반겨주는 이는 오랜 친구 하나밖에 없다. 자신과 똑닮아 사기만 치고 다니는 아들 재호는 대책 없이 임신시킨 아내 경애와 그렇게 낳은 아이를 아버지에게 떠넘긴다. 경애는 언제 돌아올지 모를 남편을 갓난아이와 함께 기다리고 있다. 창식이 '아직 젊으니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냐'라며 며느리 경애를 두고 떠나려 하자, 그녀가 이렇게 되받아친다.

 

"그래서 제 인생에 비전이 있나요?"

 

장사를 해서 힘들게 번 어머니의 돈을 빌려 간 후 돌아오지 않는 창호, 그런 남편 없이 홀로 갓난아이를 키우는 경애.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경애는 "저 그 사람 좋아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저 더 좋아해요"라고 말하며 낙천적인, 혹은 그저 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초점이 빗나간 듯한 시선과 허공을 떠도는 듯하지만 가슴에 꽂히는 대사가 맞물릴 때마다, 그녀가 순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지 마세요.. 저 혼자 어떻게 하라고요"

 

다듬어지지 않은 경애의 말은 창식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그는 며느리와 손자를 모두 데리고 형 창호의 집으로 향한다.

 

 

2.jpg

 

 

재철과 재호, 두 아들이 저지른 일들을 안고 가야 하는 사람은 어쨌든 남은 가족들이었다. 창식은 졸지에 며느리와 아기를 떠맡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재호가 아내에게 큰돈을 빌렸다는 것을 발견하고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노력한다. 재철의 어머니는 도망 온 아들을 집에 숨겨주고, 며느리를 껴안고 사죄하고, 남편의 돈을 들고 도망갔다가 돌아온 시동생과 그가 데리고 온 조카며느리를 모두 품어준다.

 


15629232791219.jpg

 

 

극의 배경은 충청도이다. 극 중 인물들이 사용하는 익살스러운 충청도 사투리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관객들의 크고 작은 웃음을 유발한다. 충청도 사투리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느리고, 톤의 변화가 적고, 돌려 말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아들을 지키려 하는 재철의 어머니는 억척스럽고 맹목적인 어머니의 전형을 보여준다. 느린 충청도 사투리는 어머니의 원통한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우리는 그 말속에 담긴 한을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창호의 집 강아지인 메롱이 역을 맡아 처음부터 끝까지 강아지의 울음소리 말고는 대사가 없다. 이로써 발생하는 익살스러운 장면은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이후 결정적인 상징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임신을 한 메롱이가 출산을 하는 날, 사건은 일어난다. 떠난 만큼 탄생하는 생명, 계절의 순환처럼 이 상처도 지나간 일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찢어지는 듯한 가뭄이 끝나고 이제 장마가 올 것 같다.

 

*

 

한 사람의 죄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절대 지워지지 않을 주변 사람들의 상처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재철의 가족들은 일종의 연좌제로써 똑같은 죄의식을 가진 채 사회적 비난을 감수한다. 재철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빠의 욕이 적힌 화장실을 써야 했고 아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부모는 그를 낳고 사랑했다는 죄로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한다.

 

이들을 이도록 아프게 한 재철이 너무나도 원망스럽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어떠한 반성도 느끼지 못했다. 부모님의 집에 숨어 법원에 출석하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한 절망과 수치심에 잠겨 삶을 회피하는 듯했다. 우리가 현실에서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극 중 가해자에 대한 어떠한 동정심도 느낄 수 없도록 장치해놓은 것 같다. 이 작품은 가해자나 피해자, 어느 한 사람의 입장을 대변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투'는 지난 몇 년간 대한민국 사회의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운동으로서 이때까지 이루어졌던 권력형 성범죄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뜨거운 사회적 관심 속에서 미투의 가해자가 된다는 것은 마치 사형선고와 같다. 극적으로 대립되는 의견들 앞에서 입을 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현재, 우리는 어떤 애도조차 할 수 없다. 나는 '미투'가 또 다른 폭력이자 비난을 위한 가벼운 수단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행위에 대한 죄와 주변 이들에게 평생 안고 가야 할 짐을 안겨준 어리석음에 대해 진심으로 분노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가치를 지닌 용기와 주장에 조롱이 필요할까?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는 모두에게 상처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가해자 가족의 서사를 들여다봄으로써 이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해 피해자를 소외시키는 방식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잘못된 행위에 대한 책임과 그 죄를 더 무겁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죄를 받았으면 죗값을 치러야지.." 아들을 향한 상호의 마지막 대사이다. 피해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상처 입힌 것에 대한 가슴 찢어지는 반성이 필요하다.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현실, 주변의 시선.. 그것 이전에 자책하고 진정으로 사죄하고 죗값을 치러야 한다.

 

현재 이 상황을 불평하는 이들에게 앞으로 다시 돌아갈 길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이제 해왔던 대로란 없다. 전혀 문제가 아니었던 것들이 시대가 변해 문제가 되었을 때, 그것을 불평할 자격은 어디 있는가? 누군가에게 닿지 않은 자기 괴로움은 어떠한 용서도 받을 수 없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

찢어지게 아프고, 그 상처는 아물기 힘들다.


 



[정다경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30993
 
 
 
 

등록번호 : 경기, 아52475   |   E-Mail : artinsight@naver.com
발행인/기사배열책임자 : 박형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형주
Copyright ⓒ 2013-2020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