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트라우마 사전'으로 양석형 이해하기

글 입력 2020.06.1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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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트라우마의 총체다”


제목부터 어마어마한 트라우마 사전은 말 그대로 유형별 트라우마를 모아놓은 사전이다. 사전이라는 컨셉 답게 책 구성도 카테고리마다 가나다 순 정렬이 되어있다. 구성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 이 책은 한 마디로 '트라우마의 총체’다. 배신, 범죄 피해, 사회적 부정의와 개인적 고난, 실패와 실수, 어린 시절의 특정한 상처, 예기치 못한 불상사, 장애와 미관 손상이라는 7가지 소제목만 봐도 어느 하나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대목이 없었다.

 

 

“허구의 세계 가정하기 or 실제 삶에 적용해보기”


이 책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허구의 세계를 가정하는 방식이다. 이 책의 주된 목적이 가상 인물의 과거와 트라우마를 통해 캐릭터에 생동감과 입체감을 불어넣는 걸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라우마 사전>은 캐릭터의 트라우마가 캐릭터의 내외면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관해 다양한 소스들을 던져준다. 창작자는 아니지만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도 이 책은 하나의 연장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토리 속 캐릭터를 속속들이 이해하기 위한 도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실제 삶에 적용해보는 것이다. 모든 스토리는 현실의 반영이자, 과장이자, 일부다. 저자가 말했듯 창작자는 한 캐릭터의 삶을 실제보다 더 파괴적으로 만들 수 있지만, 반대로 허구의 세상 속에서 캐릭터가 겪는 불행은 실제 인간에게 적용했을 때 훨씬 가혹할 수도 있다. 축소하는 쪽이든 확대하는 쪽이든 <트라우마 사전>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창작자뿐만 아니라 심리학자들도 책장에 <트라우마 사전>을 꽂아두고 가끔가다 꺼내보는 것이다. 필자는 스토리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최근 푹 빠져있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양석형(김대명 분)에 <트라우마 사전>을 적용해보려 한다.

 

 

“<트라우마 사전> 으로 <슬기로운 의사생활> 속 양석형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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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석형(산부인과 조교수 / 40세)

 

 

<슬기로운 의사생활> 은 의대 99학번 동기 다섯 명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양석형인데, 그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표현은 ‘최소한의 인간관계 속 최소한의 커뮤니케이션’‘마마보이’다.

 

양석형이라는 캐릭터의 이러한 행동 패턴은 아버지의 바람으로 콩가루집안이 된 가정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사랑하는 동생의 실족사 역시 석형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의 죽음은, 그 당시 아버지가 내연녀와 여행 중이었음을 석형이 알게 됨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석형의 분노, 경멸을 증폭시키려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양석형이라는 인물이 가진 트라우마와 가장 근접한 챕터는 <트라우마 사전> 137p 에서 소개하고 있는 ‘부모가 두 집 살림하다’ 편이다.

 

“최소한의 인간관계, 최소한의 커뮤니케이션”

 

해당 챕터에서 저자는 부모의 외도를 겪은 사람은 애정과 소속감, 존중과 인정이라는 욕구를 훼손당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이 인물은

 

사람을 잘 믿지 못한다.

마음의 문을 닫는다. 사람들과 진심을 나누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도록 자립하려 노력한다.

감정을 억누르고 표현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양석형은 은둔형 외톨이, 자발적 아싸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된다. 그는 혼자 예능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걸 가장 편하게 생각하고, 누가 인사를 하면 울리지도 않은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는 척 피하기 급하다. 이처럼 ‘최소한의 인간관계 속 최소한의 커뮤니케이션’은 그의 삶에서 중요한 모토다. 그래서 자신에게 좋은 감정으로 다가오는 사람에게,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는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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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보이” 

 

자식에게 용서를 구해도 모자를 판에, 아예 내연녀와 보란 듯이 살림을 차린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결혼이라는 동아줄로 꽁꽁 묶어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머니.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석형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경멸감과 증오를, 어머니에 대해서는 마음이 미어지는 애틋함, 보호본능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트라우마 사전>에 따르면 당연한 결과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피해를 본 어머니를 보호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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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만 애교쟁이인 석형 "엄마~나 와쪄~"

 


그래서 석형은 음식점만 가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포장해 가냐고 물어보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엄마와 쇼핑을 하거나 네일샵을 찾는다. 주변 사람들이 나이 마흔의 마마보이 곰돌이라며 놀리고 장난을 쳐도 끄떡도 없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자, 자신과 같은 사건을 똑같이, 어쩌면 두 배는 처절하게 겪어낸 엄마니까.


 


 

 

양석형이란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굳이 사전이 필요할까 싶을 수도 있다.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트라우마로 스스로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마마보이가 된 한 남자. 드라마 속 몇 가지 장면만 봐도 약간의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만한 일이니까.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캐릭터를 쪼개보는 것과, 조물주가 되어 사람을 하나 창조해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수용자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려면 겪어보지도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의 과거를 디테일하게 상상해야 한다. 창작자는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이 캐릭터를 접하는 누군가는 비슷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만약 필자가 창작자라면, 트라우마틱한 과거를 가진 인물을 그려나갈 때 <트라우마 사전>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개인적으로 필자는 절실하게 이해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이 책을 선택했다. 사생활이라 구체적으로 밝히기 어려워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했지만 말이다. 물론 <트라우마 사전>은 사전이다. 그래서 책 한 권으로 다루어도 모자른 트라우마 하나를 이 책에서는 1장 -1장 반 남짓으로 다룬다.

 

조심스레 상상해보건대, 어떤 트라우마를 직접 겪어본 입장에서 이 사전은 아마 잔인하리만치 함축적일 수도 있겠다. 학창시절 따돌림을 당해본 누군가에게, 따돌림이 희화화되거나 그저 해프닝으로 간략하게 제시되는 스토리는 불쾌할 수도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의미를 꾹꾹 눌러 담은 짤막한 문장들을 곱씹으며, 누군가를 상세하게 그리며 개인적인 목적도 나름 달성할 수 있었다. 여러 모로 쓰임새가 많아, 책장에 꽂아두고 틈틈이 꺼내보기 좋은 책이다.

 

 

트라우마 사전_표지 입체.jpg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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