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글을 쓰는 건 자기 자신을 위해서인가 독자를 위해서인가? -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그래서 자유롭고 솔직할 수 있었던 글
글 입력 2020.06.0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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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마지막이고 가장 덜 중요한 글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자유로움이 있다.


 

이 리뷰를 누군가가 읽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1 <결정자가 된다는 것 : 2007년 미국 최고 에세이 특별 보고서> 인용하고 변주)

(*2 이렇게 인용을 하게 된 계기는 이 책의 옮긴이도 인용을 한 걸 보고 영감을 얻어 하게 되었다. 2번 각주는 티엠아이일 것이다. 그런데 왜 달았냐면, 월리스도 각주를 남발했는데 나도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는가 생각 때문이다.)

 

그래도 이 리뷰가 마지막이고 가장 덜 중요한 글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자유로움도 있을 것이다.

(*3 <결정자가 된다는 것 : 2007년 미국 최고 에세이 특별 보고서> 이것도 옮긴이가 옮긴이의 말을 쓸 때 인용한 문장이다.)

(*4 그리고 저 문장이 이 리뷰엔 딱 맞다. 그래, 이 글은 마지막이고 가장 덜 중요한 글이다. 비루한 내가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책 리뷰를 기한 안에 올리지 못했다. 그러니 이 글은 때를 놓친 글이고 덜 중요한 글이며 그래서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을 –그래야만 하는!- 글일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당황스러울 것이다. 너무 많은 티엠아이와 각주의 남발에 벌써 지치지 않는가? 두 문장을 전달하는데 각주가 네 개나-그것도 중요한 정보인지 모르겠는- 달렸다. 그렇다. 나는 이런 긴 각주(티엠아이)가 많고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것 같은 책을 읽고서 뭔가를 ‘느꼈다’라기 보다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리뷰에서는 내가 책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을 읽고 하게 된 고민과 그 과정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5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서, 이렇게 각주를 다는 것도 이제 그만하고 말이다.) 그래도 앞에서 말했듯이 마지막이고 가장 덜 중요한 글이기 때문에 내가 솔직하게 쓴느 자유로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에는 부정할 수 없다.

 

 

 

글 쓰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


 

글 쓰는 나에게 가장 큰 공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 않고 이렇게 답할 것이다.

 

 

열심히 쓴 글을 아무도 읽지 않는 것.

 

 

읽어주는 이가 없는 글을 글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종이 위에 활자가 있으니, 글이라고 할 수 있기야 하겠지만. 공개적인 글과 일기의 다른 점은 결국 누군가 읽어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일 테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다양한 감정의 결을(공감, 비동의, 과거회상, 또는 상상 등등) 느껴주길 바라며 쓰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나는 본래 글을 읽을 때는 집중해서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글쓴이가 문장 하나하나를 쓸 때, 독자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를 읽으면서는 이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작가는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쓴 것일까, 아니면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쓴 것일까?

 

 

나는 원래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것을 즐긴다. 그런데 이 책은 지하철에서 읽다가, 덮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 같은 부족한 독자는 책에서 길을 자주 잃었다. 티엠아이의 남발에 긴 문장들에서 나는 집중력을 잃고 이미 읽었던 부분을 기계적으로 읽고 있었다.

 


‘랜틀 팀의 아내들 중 둘은 뚱뚱하지만 다리가 멋지다. 이런 식의 춤을 추려면 굉장한 연습이 필요할 텐데 그러고도 뚱뚱할 수 있는 걸까? 중서부 시골 여자들은 그냥 유전적으로 덩치가 큰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부분을 보면 얼마나 내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정보도 저자에 의해 알게 되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문장들만 봐도 정말 의식의 흐름이다, 싶어지지 않는가?-적어도 나는 그랬다.- 티엠아이를 듣는 것이 괴로워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바로 그 티엠아이를 말하는 주체에게 애정이 있을 때다. 티엠아이를 말하는 이가 나에게 소중하고 애정하는 대상이라면 사실 그 사람의 티엠아이는 더는 나에게 티엠아이가 아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나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초면이고 그에게 애정을 품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글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독자를 위한 것일까?


 

책 처음에 실려 있는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를 읽는 내내 앞으로 읽어야 할 분량이 얼마나 남았나 내내 남은 페이지를 체크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작가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독자가 자신의 글을 읽으며 ‘이 글을 언제까지 읽어야 하나’ 생각하게 된다면 그 저자는 얼마나 자괴감을 느낄까 생각에. 하지만 가끔은 화가 나기도 했다. 이토록 치열한 문장들의 나열을 정말 집중해서 다 읽은 독자가 있을까? 이 저자는 왜 이렇게 읽는 사람은 배려하지 않는 것 같은 글쓰기를 했을까. 이 양가적인 감정을 번갈아 느끼면서 나는 점점 이런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글이라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독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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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나름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내 가치관을 먼저 밝히자면, 나는 독자들과의 소통을 굉장히 우선시한다. 나는 읽히지 않는 글이라면 그건 일기지, 예술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나만을 위해서 썼다면 그 글은 나만의 글이 되지만, 독자들이 존재하고 특히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글은 ‘여러 사람’의 것이 되는 동시에, ‘읽은 이의 것’만으로 되어 다채로운 의미를 입을 수 있다. 내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될 수 있게 하고, 소통의 통로가 되는 것이 내가 생각했을 때 글의 가장 놀라운 지점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가치관에 대해서 조금 고민하게 된 건 옮긴이의 글을 읽고서였다.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에 대해 어쩌면 우리가 알고 싶은 수준 이상으로, 현기증이 날 만큼 속속들이 알게 된다. 적어도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로만 보면 월리스의 글들이 다루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월리스 자신이다.

 

그럼에도 상기시키고 싶은 사실은 월리스가 글 속에서, 글 뒤에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월리스의 글에는 성찰이 결여된, 때로는 병적인, 가끔은 비겁한 자기 중심적 남성으로서의 그의 모습이 숨김없이, 그대로, 반복해서 드러나있다.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서 ‘그러게……. 글이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언제 그렇게까지 솔직할 수 있겠어’ 싶어졌다. 나는 글쓰기가 자기 치유 효과도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데이비드 월리스가 독자들의 반응에 연연하기 보다는, 글의 에너지를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게 그에게는 더 갈급한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도 든 것이다. 또한, 이 글을 쓰기 전에 다른 아트인사이트 필진분들의 리뷰를 읽었는데 진심으로 그의 팬이신 분들도 많았다. 그분들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팬이 될 수 있는 건, 저자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그 자신으로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었나 생각도 들었다.


 

그가 글에서 드러내는 유아론적 자의식은 연기가 아니었고, 수사적 효과를 노린 위악도 아니었고 그 자신이었다.

 

 

나는 그래서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아직도 찾진 못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말하는 선호하는 에세이


 

내가 이렇게 글에 대해 고민할 걸 알았던지-사실 그럴 리 없지만!- 신기하게도 이 책의 마지막 글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글에 대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글이었다. <결정자가 된다는 것 : 2007년 미국 최고 에세이 특별 보고서>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최고의 에세이를 선정하는 과정에 편집자로 참여하게 되면서 쓴 글이다. 이 글에서는 월리스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에세이, 가치 있는 에세이란 무엇인지 솔직하게 서술되어 있다. 내내 그의 글에 집중을 잘 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이 글에서만큼은 눈을 빛내며 읽을 수 있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생각하는 최고의 에세이는 이런 글이었다.

 

 

...선호하는 에세이는 바로 반사적인 도그마를 약화시키는, 성실하고 전폭적으로 스스로 ‘결정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작품들이다.(중략) 좁은 구멍에 맞지 않는 현실을 죄다 삭제해버리는 행위를 피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것은 자신의 오류 혹은 우둔함을 알아볼 수 있는 지성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흡수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는, 그래서 용감하게 그다음의 밝혀진 오류로 갈 수 있는 겸손이 있는 삶이다. 독자 여러분의 ‘결정자’가 생각하는 최고를 가장 솔직하고 편파적으로 정의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이 글들은 내 눈에 보이는 대로의 이 세상에서 내가 사유하고 살아가고 싶은 방식의 본보기, 거푸집이 아닌 본보기다.

 

 

나는 그가 티엠아이에 의식의 흐름으로 글을 써서 힘들다고 쉽게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그는 글에 대한 가치관이 날카롭고 뚜렷하게 자리 잡혀 있었다. 의심이 오히려 죄가 되는 신앙(*도그마)를 약화시키고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것. 의심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이 믿는 것에 균열을 내는 행위로써 굉장히 피로하고 파괴적인 행위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래서 용감하게 ‘오류’로 갈 수 있는 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오류로 가는 길이라 할 지라도 그럴 때만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결정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자신의 글이 똑같은 메시지를 재생산하고 의심 없이 찍어내는 ‘거푸집’이 아니라고 밝힌다. 그는 자신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사유를 하고, 그걸 대중들에게 본을 보이고 싶은 본보기라고 자신의 글에 대한 소명을 밝힌다. 이 부분은 나에게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나에게 글에 대한 의미를 좀 더 깊게 고찰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독자들을 중요시 여기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 보니 사실 나는 독자들에게 집착하는 면모가 없지 않았다. 아트인사이트에 글을 기고할 때도, 조회수가 높기를 바라며 사이트를 들락날락 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 리뷰는 마감 기한 안에 지키지 못해 늦었고 아마 이 글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솔직해 지기로 했다. 이 글을 읽고 오히려 고민만 늘어났고 그 고민이 어떤지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럼에도 답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후련한 게 있다. 솔직한 글쓰기의 매력은 아마 여기서 있는 거겠지 생각을 하며 이만 마친다.

 

 

 

전문필진 박해윤.jpg

 

 



[박해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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