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정체성을 찾는 일에 관해 -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크롬과 익스플로러의 시대에서 리눅스형 인간이 되는 것
글 입력 2020.05.3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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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눅스형 인간


 

군대에 간 친구로부터 “몇 년을 봐도 참 신기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본인이 말하길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신기한 인간 세 명을 꼽으라면 거기에 내가 반드시 들어간단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달라고 물으니, 더욱 알 수 없는 소리만 내놓는다. 남들이 크롬이나 익스플로러를 쓸 때 혼자 리눅스를 쓰고 있는 것 같다고. 아예 프로세스를 돌리는 운영체제가 다른 것 같다고 말이다. (참고로 이 말을 해준 친구는 사학도다. 이공계생 아니다.) 아직도 친구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건지 정확히 이해할 순 없지만, 대충 세계를 응시하는 내 시선이 보편적인 차원과 사뭇 다르다는 점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자꾸만 저 말을 들은 이후, 대체 내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비춰지는지 고민하게 됐다. 성격상 무언가에 한 번 꽂히면 그것에 대한 생각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해서, 엊그제 이후로 계속 내 인격적 정체성을 반추하는 중이다. 그러던 와중, 일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비혼주의자이자 채식주의자이며, 고양이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작가가 쓴 책이 생각났다.

 

처음 책장을 넘길 때는 가벼운 에세이를 읽는다는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거창한 철학적 아이디어를 얻었다거나, 깊게 사색할 거리를 애써 떠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친구에게서 저런 소리를 듣고 나니 이상스럽게 이 책의 구절 몇 개가 머릿속을 자꾸만 맴돌았다. 덕분에 학보사에서 새벽 내내 조판을 하며 여유가 날 때마다 책을 다시 읽었다.

 

정신없이 조판에 시달리면서도 고민에 대한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의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인지 살펴보며 역으로 나는 어떤 인간인지 생각해봤다. 분명 이 사람의 특질과 내 것은 다르겠지만 나 또한 이상하고 자유롭게, 세계에 어중간하게 얽매인 할머니로 늙고 싶은 마음이니까. 동일한 지향점을 품은 사람의 견해가 본격적으로 궁금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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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타인을 향한 감정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으리라 판단했다. 성격적인 특질을 고민해보는 것과,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관에 대해 반추해보는 것. 첫 번째로 내 성격적 특질에 대해 고민할 때 단 번에 생각나는 책의 한 구절이 있었다.

    


“사람이 싫어질 때 마음을 다스리듯 ≪두 사람≫을 생각한다. 그리고 바다 위에 눈을 감은 채 떠 있는 섬들을 떠올린다. 우리는 각자의 풍랑 속에서 자기만의 침식과 퇴적을 거쳐 고유한 화산과 폭포와 계곡을 가지게 된 섬들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시간을 성실하게 살아 여기까지 왔고, 보이지 않는 섬의 반대편에는 깊게 우거진 숲과 아름다운 강과 비옥한 들을 가지고 있다.”


 

이 대목이 뇌리에 남은 이유는 사람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에 놀랐기 때문이다. 내게 저런 인류애 가득한 태도는 원천적으로 불능에 가깝다. 타인은 내게 그저 타인이고, 웬만하면 서로에게 최대한 폐를 끼치지 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자는 게 사람을 대하는 내 신조다. 무루 작가의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게 되면, 타인에 대한 정의는 내가 정의한 것과 정 반대가 된다. 이토록 따뜻한 시선을 건넬 섬세함을 지녔다니. 저 부분을 읽고 작가가 퍽 다정한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주변 사람들이 내게 건넸던 우려의 말들이 떠오른다. 위에서 언급한 친구를 포함해 나를 오랫동안 본 사람들은, 내가 너무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감정 없는 인공지능을 보는 것 같다고들 한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겠다면서. 실제로 나는 “영혼 없이” 대화하는 데에 도가 튼 편이다.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실어 발화할 명분이 없어서 그렇다. 그래서 타인을 위로할 때나, 타인의 고민을 들어줄 때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나. 대체로 무던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이런 태도가 주변인들이 지적하는, “일반적인” 사람과 비교했을 때 내가 보이는 상이함 중 하나다. 내 태도로 크게든, 작게든 상처를 받았다던 엄마는 내가 당신과 대화할 때 마치 싸움을 거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악의적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잘 몰랐었다. 지금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그들에게도 ‘거리’를 암묵적으로 유지하고 있기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친한 사람들에게도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지, 내게서 일정 수준 이상 심리적으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이 나를 정 없는 인간으로, 따뜻하지 않은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일까. 아직도 가까운 지인들은 어디 가서 오해 사기 딱 쉬운 성격이니 사회성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한다.

 

물론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는 일은 상도덕에 해당하니까, 그런 면의 사회성을 지적하고자 한 것은 아닐 테다. 조금 더 따뜻하고 다정한 시선을 견지하라는 말이겠지. 그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나를 걱정해서 그러리란 것도 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특질이 뿌리 째 바뀌는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작가의 태도가 유독 인상 깊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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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촬영.

 

 

 

3. 생을 위한 의지


 


“책장을 덮고 나면 알게 된다. 구멍을 만드는 소년은 사실 우리가 버린 어떤 마음이라는 것을.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저 밑바닥으로 추락해 버렸고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살아간다.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가 쉽게 내던지고 외면했던 것들이 있다. 약한 것, 다른 것, 느린 것, 돈이 되지 않는 것, 불편한 것, 나누는 것.

 

그렇게 뚫린 크고 작은 구멍들이 이제는 거대한 허공처럼 우리가 설 땅을 모두 잠식해 버렸다. 끝내 우리도 함께 떨어져 버리고 말 구멍들을 우리는 계속 만들고 있다.”


  

나는 굉장히 세속적이고 소시민적인 인간이다. 조금이라도 친해진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 언제나 덧붙이는 말이기도 하다. 대의나 인류 평화처럼 거창한 목표에 관심 없고, 내 안위와 가까운 타인의 안녕을 바라기에도 벅찬 삶이라고. 나같이 자존감이 아니라 자존심이 높은 사람들의 경우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안위를 돌보기에 본인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피곤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이를테면 타인의 능력치와 본인의 능력치를 비교해 자괴감을 느끼면서, 그 과정을 통해 성장의 원동력을 얻는다든지. 이때의 중압감을 가까운 개인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심리적인 부담을 안겨 준다든지, 그런 식으로 말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자신의 선명함을 유지하기에도 힘든 세상인 걸 모두가 알고 있기에 저런 말을 내뱉어도 최소한 ‘겉으로’ 나를 괴상히 여기는 반응은 잘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가끔 죄책감에 가까운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최근에 큰 트라우마가 될 뻔 했던 사건을 직면하며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이렇게 살아도 정말 괜찮은지, 내 이기심으로 피해를 보고 상처를 받거나, 소외되는 이들이 생긴다면 나는 뭐라 변명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유토피아와 판타지를 다룬 소설을 통해, 현실의 잔혹함을 논하던 작가를 읽으며 사색에 잠겼다. 작가의 말이 지금까지 나를 이상하게 돌보는 데에만 급급해 온 세월을 꾸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태껏 나는 생을 살아가는 의지를 독선적으로 발휘해왔던 게 아닐까.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드는 사실은, 그렇다고 한들 내가 삶에 대한 가치관을 크게 수정하진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어서다. 앞으로도 공부를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나는 언제나 높은 생산성과 완성도를 추구하며 살아갈 거다. 온전히 내 자신의 능력적인 발전을 위해 살아갈 자신이 있고, 그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따뜻한’ 감정들은 뒤로 제쳐둘 가능성이 높다. 내가 심적으로, 물적으로 안정적일 때에 한해 타인에게 애정을 쏟을 가능성 역시 높다. 그렇게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매순간 소시민적으로, 세속적으로 살아가느라 내가 무엇을 놓치고 버리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할 테다. 리눅스형 인간이 지닌 태생적인 한계다.

 

결국 책의 내용과 내 특질을 다시금 고민해보면서, 과연 내가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상당히 우울한 결론에 이른 셈이다. 나 역시 작가처럼 비혼주의를 지향하고, 고양이를 사랑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을 사랑함에도 저자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할머니의 모습처럼 늙어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마 죽기 직전까지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타인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고장난’ 인간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책이 주인을 잘못 찾아왔다는 생각도 물씬 들었다. 오히려 이런 결론을 도출한 것이 리눅스형 인간다운 결말일지도 모른다.

 

 

[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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