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유럽 여행 되감기 (2) [여행]

랜선 유럽 여행
글 입력 2020.05.22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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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짧은 시간을 보내고, 어느 10월의 늦은 밤. 포르투갈의 작은 도시, 포르투에 도착했다. 자그마한 공항의 출국장으로 나가자, 공항 직원이 'Welcome to Porto'라며 포르투 지도를 건네주었다. 비행기로 2시간 남짓한 거리지만 런던과 느낌부터 달랐다. 가장 기대하던 도시의 첫인상이기 때문일까. 아직도 주황색 바탕에 알록달록하게 적힌 지명들이 단상처럼 남아있다.


포르투를 비롯한 대개 유럽은 대중교통이 아주 유동적이다. 정해진 시간에 오지 않는 건 기본, 갑자기 노선이 바뀌기도 한다. 버스 정류장에 붙어있던 노선도는 물론이거니와 구글 맵으로 몇 번이나 확인해도 불안했다. 내가 탈 버스가 삼십 분째 오질 않았다. 밤은 깊어져 가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택시를 탈까, 지금이라도 지하철로 경로를 바꿔서 갈까. 고민하던 차에 드디어, 버스가 천천히 오고 있었다.


작은 도시라 그런지 공항버스보다는 일반 버스와 비슷했다. 지하철 자체가 적은지 역 주변보다는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 허허벌판 한복판, 길거리 등에 멈추었다. 거의 한 시간쯤 버스를 탔던 것 같다. 내내 창밖을 바라보며 익숙한 듯 낯선 이질감에 적응했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어색해도 묘하게 할머니 댁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외관보다는 느낌이 비슷했다. 소박하고, 느릿하고, 따스한. 가로등도 많이 없어서 어둑한 밤이었는데도 따뜻했다.


포르투는 사방이 돌길과 경사 지대였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숙소까지 5분 거리였다. 그 5분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바퀴가 돌에 갈려 나가는 것 같았다. 공사장 하나를 끌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경사였다. 집에 캐리어가 21인치와 28인치 두 개뿐이라 후자를 택했는데, 처음으로 후회했다. 차라리 작은 거 끌고 큰 배낭 메고 다닐걸. 무조건 캐리어가 튼튼하고 편하고 도난 위험도 적을 것으로 생각했다. 틀린 생각도, 지금의 내 생각이 옳은 것도 아니다. 과거의 나는 과거의 시점에서 최선을 택했을 뿐.


*


세상에 완벽은 없고 기억은 미화된다지만, 그런데도 포르투는 이렇게 평하고 싶다. 완벽했다고. 숙소부터 음식, 날씨, 심지어는 물가까지 완벽했다. 캄캄한 밤이 지난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그 말은 곧, 상점이나 식당 대부분은 문을 닫았다는 소리다. 그들의 일요일은 우리와 가장 다른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비슷하기도 하다. 도우루 강 근처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길래 주변을 기웃거렸다. 실습인지 시험인지 제한 시간에 로프를 접고, 들고, 뛰어야 하는 듯했다. 스포츠 경기 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응원하고 있었다. 특별히 무얼 하지도 않았고, 설명을 알아들을 수도 없었는데 난간에 기대어 넋 놓고 바라보았다. 런던에서 군악대 행진은 볼 생각도 않았는데 별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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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걸었다. 처음에는 구글맵을 따라 걷다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듣던 대로 포르투는 작았다. 숙소는 클레리구스 탑 근처에 있었고, 그 탑은 포르투를 걷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보였다. 비슷하게 생긴 골목들이 좋았다. 길을 잘 못 외우는 편이라 한국에서도 지도를 따라가는데, 포르투의 골목골목은 구별했다. 어느 골목길은 유난히 좁고, 어떤 골목길은 올라갈수록 점점 넓어지고, 신기할 정도로 가파른 골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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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에서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 노숙자가 돈 달라고 다가온 일도, 버스 트렁크에 갇힌 일도, 사람을 만나서 노닥거린 일도, 종일 비 맞으며 돌아다닌 일도 없었다. 혼자임을 실감한 도시였다. 외롭다기보다 생경했다. 한국에서도 혼자 집에 있거나 혼자 밖으로 나서긴 했어도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사건은 없고, 자연스레 나와 생각만이 남았다.

 

도우루 강가에 앉아 강에 반사된 불빛을 보았다. 불빛은 물에 풀어진 물감처럼 형체를 잃고 마구 흔들렸다. 좌우로, 끊임없이. 그 까맣고 반짝이는 수면을 들여다보니 생물체를 마주한 것 같았다. 생명은 생각을 불러온다. 한국에 두고 온 현실이 떠올랐다. 돌아가면 끝이겠구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는 선선한 강바람도, 곳곳에 놓인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작은 노랫소리도, 넋 놓고 강을 바라보는 시간도, 그 순간에 존재하는 나도. 순간에 갇히고 싶었다. 그래서 부질없는 행위를 반복했다. 핸드폰 잠금을 풀고, 시간을 계속 노려보는 거다. 멈춰라, 멈춰라, 멈춰라. 아무리 노려봐도 시간은 1분, 2분, 3분, 착실히 지나갔다. 이미 그 순간의 나는 그 순간에 과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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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왜 그렇게 걱정되고 두려웠을까.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던 2년 전의 나. 시간이 흐른 만큼 나도 자라났을까, 내 생각도 달라졌을까. 언젠가 포르투에 다시 가서 그 강을 또 바라보고 싶다. 그때의 나는 바라건대 시간을 노려다 보며 순간에 갇히려 하지 않기를. 순간을 순간으로 놓아주고, 그때 느낄 바람과 풍경을 열심히 만끽하기를.


포르투에서 네 번째 밤을 보내고 다음 날,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으로 향했다.


*


리스본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사람도 많고, 소리도 크고, 무엇보다 호스텔의 스텝들이 아주 밝고 유쾌했다. 지독한 내향인은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힘들어하면서도 호스텔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두 개에 참여했다. 뭐라도 해보고자. 하나는 생전 좋아하지도 않던 쿠킹 프로그램이었고, 다른 하나는 투어 비슷한 개념이었다. 후자는 할 생각도 못 했는데 쿠킹 프로그램에 참여한 캐나다 사람이 '같이 할래?'라고 묻기에 좋다고 대답했다. 아마 술김에 기분 좋아서 그랬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면서부터 과거의 내가 내린 선택을 열심히 후회했던 것을 보면.


외국 여행의 목적 중 하나가 외국인들과 대화하며 하하 호호 시간 보내기일 것이다. 나도 그러했다. 다만 현실과 상상 속 나는 언제나 괴리가 있다. 머릿속으로 이미 다 문장을 만들어 놓고, 꺼낼 때 한참 고민하는 거다. 말할까, 말까. 알아들을까, 모를까. 떠올린 문장의 십 분의 일이라도 얘기했으면 묵언 수행하는 기분은 안 들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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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꽤 괜찮은 기억으로 남은 이유는 아마 바다 때문일 것이다. 현지인 호스트가 사람 적고 좋은 곳을 알려주겠다며 이끌고 간 어느 바닷가. 그의 말마따나 차에서 내리고 뒤를 돈 순간 놀랐다. 큰 규모는 아닌데도 하늘과 바다색이 비현실적이었다. 초록색이 눈의 피로를 풀어주어 좋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바다색은 눈을 씻겨주는 색이다.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영어권인지라 낯설다는 인상은 강했는데 수영복 때문에 다름을 느낀 것은 뜻밖이었다. 그들은 옷 안에 수영복을 입고 있는 것이 아주 당연했다. 바다를 보자마자 동시에 옷을 훌훌 벗고 뛰쳐 들어가길래 나 빼고 어디 가는지 미리 들었던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미리 알았어도 달라질 점은 없긴 하다. 수영복 자체를 안 가져온 것은 둘째 치고, 수영할 줄 몰랐다. 이게 얼마나 아쉬웠던지 여행이 끝난 후에 수영장 등록을 해서 배우러 다녔다. 언젠가 수영을 여행 테마로 삼아서 실컷 물놀이하다가 올 작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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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나저러나 바다는 정말 좋았다. 뒤이어 육지 최서단이라는 호카 곶에서 바다를 보았을 땐 느낌이 또 달랐다. 제주도에 온 듯한 거센 바람이며, 아주 진한 푸름을 가진 바다색까지.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닌데도 색이 다르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나처럼 보이는 바다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달랐다. 어떤 색, 어떤 느낌, 어떤 분위기를 가진 것인지. 해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한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물거품으로 흩어지는 그 흔한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 사실 이 광경은 국내에서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행지라는 특수 환경과 설레는 감정이 전에 없던 의미를 부여하여 평소엔 스쳐 지나갈 생각과 감정까지 붙잡아둔 덕에 작고 사소한 깨달음을 많이 얻었던 것 같다.


*


이렇게 여행의 반이 지났다.

마지막 국가, 스페인. 사람으로 얽히고설킨 2018년의 11월은 다음 주에 이어진다.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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