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사랑스러운 자의식과잉들 같으니라고 [도서]

글 입력 2020.04.1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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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독히도 소심한 사람이다. 신나게 대화를 하다가도 상대의 표정이 한순간 좋지 않은 것 같으면 집으로 돌아와 하루종일 있었던 대화를 복기한다. 이것 때문인가 혹은 저것 때문인가, 묻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다. 식당에서 메뉴를 주문할 때도 큰 소리로 부르지 못하고 혼자 안절부절못하다가, 점원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겨우 용기내어 손을 든다. 소심한 인간의 하루 일과는 그 자체로 빽빽이 채워져 있다. 간단한 대화, 메뉴 주문, 버스벨 누르기, 카카오톡 메시지 전송 등 그 어느 하나 결코 쉽지 않다.


여기에 내가 러시아 소설을 오랫동안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19세기,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이어지는 러시아 소설들 속에는 나만큼이나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인물들로 가득하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주변인들의 못난 점을 찾아내기도 하고, 상관에게 실수로 한 재채기로 몇날 며칠을 괴로워하기도 하기도 한다. 뭐 하나 제대로 이뤄놓은 건 없다. 그들이 하는 것이라고는 하루종일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높은 자존심과 낮은 자존감으로 스스로 힘들어하는 일 뿐이다. 보다보니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놓을 수가 없다.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 말고, 러시아 소설 속 하찮지만 사랑스러운 ‘작은 인간’들을 소개한다.

 



1. “나를 시기하는 것이 분명하다” : 고골, 「광인일기」


 

광인일기.jpg

 

 

어디를 가도 뛰어나지 않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무시하는 것 같다. 나를 좀 지나치게 혼내는 것 같기도 하고 좀 비웃는 것 같기도 한데, 그저 내 기분탓인가 의심스럽기만 하다. 속으로 수없이 준비한 말들을 내뱉지만, 입 밖에 나온 말들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시원치 않다.


찌질한 인간을 그리는 데 있어 문학사를 통틀어 니콜라이 고골만큼 뛰어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양락에 버금가는 단발병 퇴치자 고골의 초상화는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소설 역시 초상화만큼이나 쉽게 잊을 수 없다. 고골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비교적 짧막한 작품 분량 때문인지, 그의 소설은 엄청난 서스펜스를 가지진 않았지만 사랑스러운 인물들과 맛깔나는 스토리텔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코를 잃어버렸다며 난리 치는 인물, 예쁘게 필사한 글씨를 보며 하루 온종일 행복해하는 인물 등 우리보다 결코 훌륭한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 고골의 주인공들이다. 모자란데, 상당히 사랑스럽다. 그런데 마냥 사랑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역시 러시아인지, 고골은 절대 인물들을 사랑스러운 상태 그대로 남겨두지 않는다. 작품 전체에 고골 특유의 음울함이 한 스푼씩 끼얹어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고골은 이 보잘 것 없는 인물들을 ‘개죽음’ 당하게 만든다. 죽음마저 위대하지 않아서, 비극적이지도 않다.


그 중 가장 안타까운 인물을 꼽으라면, 「광인일기」 속 “자루를 뒤집어쓴 거북이 같은” 9급 관리 ‘뽀쁘리시친’이다. 국장의 집 서재에서 펜 깎는 일을 하는, 썩 대단한 일을 하지 않은 이 인물은 남몰래 국장의 딸 소피를 좋아하고 있다. 그는 도무지 능력있어 보이지 않는다. 날마다 과장에게 혼나고, 혼자 떠드는 일기 속에는 남들과 대화한 흔적은 보이지 않고 어쩐지 혼자 망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들은 그를 모두 무시하는 것 같은데, 뽀쁘리시친은 자신의 일기 속에서 그들이 “나를 시기하는 것이 분명하다”며 엄청난 자기애를 보여준다. 소피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지만, 실상은 그녀가 쳐다보면 몸도 못 가누고 허우적거리다 넘어지고그녀의 방 안을 기껏해야 상상이나 하는 처지다. 혼자 상상하다,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아, 아니다……. 침묵.”이라 말하며 자신을 다그치기를 반복하는 이 못난 인간 뽀쁘리시친에게, 어느날 국장네 집 강아지 멧쥐의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2. 온종일 누워있는 인간 : 곤차로프, 『오블로모프』


 

나는 아주 줏대없는 사람임에도 어렸을 때부터 유일하게 변하지 않고 품어온 꿈이 있다면. 하루종일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꼭 하루일 필요는 없다. 여건만 된다면 더 오래 누워있고 싶다.


여기 온종일 누워 있기만 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이반 곤차로프가 쓴 『오블로모프』의 주인공, ‘오블로모프’. 그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귀족의 집에서 태어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이 인물은, 굳이 일을 해야할 필요를 못 느낀다. 양말 한 짝도 스스로 신지 못하는 이 오블로모프가 하는 일이라곤 침대에 누워 달력 읽기, 소파에 누워 친구 맞이하기 정도이다. 총 2부로 이뤄진 이 소설의 1부가 다 끝나갈 때까지 오블로모프는 일어나지 않는다. 읽다보면 슬슬 답답함을 느낀다. 이 인간은 대체 언제 일어나는 것인가.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더 편안히 누워 있을 수 있는 자세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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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코치하는 오블로모프는, 그 자신이 정작 제일 문제가 많다. 영지가 파산을 하고, 사랑하는 여인이 생김에도 그는 도통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무언가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오블로모프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라는 위대한 작가에 가려 그 명성이 다소 덜 알려진 이반 곤차로프는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대가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메이저 듀오였다면, 곤차로프와 투르게네프는 마이너 듀오라고 평가받는다. 그가 창조해낸 이 오블로모프라는 인물은 당시 러시아 사회를 살아가던 허무와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평가받아, ‘오블로모프 기질’이라는 개념까지 탄생시키게 된다. 그때의 러시아 사람들만 그렇겠는가. 하는 일 없이 틈만 나면 침대에 엉덩이 붙일 생각만 하는 지금의 나 역시 오블로모프 기질을 타고난 것을.


 

 

3. “나는 아픈 인간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20년째 지하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 있다. 젊은 시절 관청에서 하급 관리로 일한 적이 있지만, 친척에게 유산을 상속받은 이후로 지하에 방 한 칸 마련해놓고 하루종일 생각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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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사회적이지 않은 이 인간은, 자신이 ‘정상’이지 않은 것은 남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이론을 펼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신이 사회로부터 도태되어있음을 잘 안다. 자의식이 지나치게 강한 인간이 동시에 쓰라릴 정도로 냉철한 자기객관화를 내리는 순간, 그는 겉잡을 수 없는 자기에 대한 분노에 빠진다.


극단적인 우월감과 열등감을 넘나드는 이 인간은 2부에 가서 20년 전, 즉 그가 20대에 겪었던 일들을 회상한다. 누군가 무심코 한 일에 혼자 모욕감을 느끼고, 길가에서 그의 ‘어깨를 치기 위해’ 몇 달에 걸친 계획을 짠다. 상상 이상으로 찌질한 인간이다. 이외에 처절한 경험들의 회상이 계속된다. 정말 정이 안 가는 인간이지만, 하루의 많은 시간을 과거의 수치스러운 일들을 회상하는 데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면, 그의 이 점차로 커져가는 피해의식과 자의식을 재밌게 읽을지도 모르겠다.


이 ‘지하인’은 이후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로 이어지는 도스토예프스키 대표작들의 주인공 형상의 원형이 된다.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 이론을 펼쳐나가는, 세상과 유리된 이 인간은 아직까지 지하에 머물며 하루종일 수기만 쓸 따름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후 『죄와 벌』에서 이 지독한 자의식을 가진 인간을 지하로부터 끌어올려 근대 페테르부르크의 현실 속에 위치시킨다. 이 찌질한 인간이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이 궁금하다면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펼쳐야 한다.

 



4. 분명히 나에게 화가 났을 거야: 체호프, 「관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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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잘못한 걸까?’ 이런 물음만 없었어도 내 인생은 조금 더 편해졌을 것 같다. 아까 그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았는데 혹시 내가 말실수한 걸까, 아니면 내 몸에서 냄새라도 난 걸까. 아니, 별다른 말이 없었으니 괜찮을거야. 아니면 나에게 직접 말하는 게 실례가 될까봐 애써 참은 건 아닐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괴로워하는 것의 반복이다. 하찮아 보이는 고민이지만, 내 일상은 존재하는 지 모를 나의 실수를 점검하는 일들로 이뤄져 있다.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에는 정확히 이와 같은 사람이 등장한다. 회계원 체르뱌코프는 오페라를 보러간다. 공연 도중 갑자기 재채기가 터져나온다. 그런데 하필, 재채기를 한 곳이 자신보다 한참 높은 직위에 있는 브리잘로프 장군의 벗겨진 머리다. 장군이 반질반질한 뒤통수를 쓰다듬는다. 체르뱌코프가 안절부절 못한다. 분명히 장군이 화가 났을 거라 생각하며, 공연을 보는 내내 사과를 한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다음날 또 사과를 하기 위해 접견실로 찾아간다. 끊임없이 사과를 한다. 그런데 돌아오는 건 도리어 새파랗게 질린 장군의 ‘꺼져!’라는 호통 뿐이다.

 

「관리의 죽음」은 체호프의 다른 작품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러시아의 위대한 극작가이자 단편소설의 대가답게 잘 짜여져 있다. 재채기라는 깜찍한 실수에서 비롯된 체르뱌코프의 심각한 불안이 어떻게 커져가는지, 그리고 얼마나 허무하게 해소되는지 6페이지 밖에 안되는 짧은 분량 속에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다. 체르뱌코프의 융통성 없음에 분통이 터질 것 같다가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기 잘못을 파고드는 이 인물의 소심함이 공감이 가다 못해 안타까워 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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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인간’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주요 모티프로 등장하는 인물 개념이다. ‘예브게니(푸시킨, <청동기마상)’, ‘아까끼 아까끼예비치(고골, <외투>)’ 등 그 전형에 포함되는 인물들이 따로 있지만, 이 글에서 소개하는 인물들 중에는 엄밀히 말해 ‘작은 인간’에 속하지 않는 인물들도 있다.

 

 



[장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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