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해서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영화]

글 입력 2020.04.0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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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녜스 바르다를 알게 된 것은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서울 아트 시네마에서 하는 '아녜스 바르다 특별전' 영화를 예매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되었다. 특별전은 회고전이 되었다. 긴 경주를 끝낸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 처음부터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1955년에 만들어진 아녜스 바르다의 데뷔작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에는 영화와 삶에 대한 그의 진지한 성찰이 엿보였고, 2008년의 다큐멘터리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속 그는 에너지가 넘치고 유쾌하며 따뜻한 사람이었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감독인 아녜스 바르다를 뒤늦게 알게 된 것이 안타까웠지만, 알아가기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88세 영화감독과 33세 사진가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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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마을과 풍경, 얼굴을 찾아간다면

난 언제나 떠날 준비가 돼있어"

 

 

2018년 국내에 개봉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88세의 영화감독인 아녜스 바르다와 33세의 사진작가 JR의 여행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두 사람은 커다란 카메라처럼 생긴 대형 트럭을 타고 발길이 닿는 대로 자유롭게 여행하며 각자 담고 싶은 것을 찍기로 한다. 철거 직전의 광산촌과 140여 명이 살고 있는 농촌 마을, 염산을 만드는 공장 등을 다니며 그들의 얼굴 사진을 출력해 외벽에 전시한다.

 

 

 

얼굴들


 

흑백 사진을 크게 출력해 건물에 전시하는 방법은 JR의 작업 방식이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공간이 커다란 인물 사진을 통해 시선을 끌게 된다. 시선에 이끌린 사람들이 그곳에 모이고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그렇게 스러져 가던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들이 방문한 광산촌은 광부들과 그 가족은 모두 떠나고 단 한 사람만 남아있었다. 바르다와 JR은 주인을 잃어버린 집의 외벽에 옛 광부들의 사진을 붙인다. 옛 주민들의 모습이 재현되자,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광부의 자녀들은 추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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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마을을 지키고 있는 최후의 저항자 자닌의 얼굴은 크게 출력되어 그의 집에 전시되었다. 이는 자닌에게 보내는 경의와 존중이다. 자닌 역시 이를 느끼고 큰 감동을 받는다.

 

아녜스 바르다와 JR이 가는 곳은 사람들이 사라져 버린 곳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염산 공장의 노동자, 카페 직원, 항만 노동자의 아내처럼 가시화되지 않는 사람들을 크게 전시함으로써 그들을 존중한다. 항만 노동자의 아내는 이 작업이 자신을 존중해 주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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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얼굴이든, 어떤 이야기든 바르다와 JR이 발견한 이미지들은 예술이 된다. 평범한 개인들은 예술이 됨으로써 사회의 일원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내고, 마땅한 존중을 받게 된다. 카메라에 담긴 그들의 얼굴은 생기로 가득 차 있다. 그 모든 얼굴이 예술이다.

 

 

 

우리도 사라지겠지만, 영화는 끝나지 않고


 

아녜스 바르다는 JR의 선글라스를 싫어한다. 벽이 느껴지고 정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다. 눈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으니 말이다. 물론 아녜스 바르다 역시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눈에 문제가 있어 시야가 또렷하지 않다. 하지만 바르다는 자신의 흐릿한 시야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JR이 의아한 듯 묻자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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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넨 까맣게 보면서 좋아하잖나.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거지"

 

 

두 사람은 바르다의 흐릿하고 흔들리는 시야까지 재현해 작품으로 남긴다. 흐릿한 시야가 좋은 바르다와 눈을 가리는 선글라스가 좋은 JR은 서로의 시야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바르다는 마침내 JR의 까만 선글라스와 모자를 그의 스타일로 인정해 준다.

 

 

"당신의 눈과 발이 이야기를 하네요.

이 기차는 당신이 못 가는 많은 곳을 가겠죠."

 

 

다큐멘터리에서 둘의 마지막 작품은 아녜스 바르다의 눈과 발 사진을 출력해 기차에 전시하는 작업이다. 88번의 봄을 맞이했을 그 눈과 그 발이 기차를 통해 더 넓은 곳으로 향하게 된다. JR은 그렇게 자신의 방법으로 바르다를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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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사라졌고 우리도 사라지겠지만,

영화는 끝나지 않고 저 선글라스도 사라지게는 못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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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시가 JR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면,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아녜스 바르다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사진이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을 담은 영화는 끝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 존재의 시작과 죽음을 실감할 수 있다.


벙커에 붙였던 기 부르댕의 사진이 하루도 안 되어 바다에 씻겨내려갔듯이 사진은 사라지고, 사람들 역시 언젠가 땅으로 돌아가겠지만, 작품은 길이길이 기억되고 회자될 것이다. JR의 선글라스가 그의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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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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